탄생 100주년 문학인 기념 : 나의 아버지
②실존주의 문학 대표작가의 가훈은 ‘거짓말 하지 말고 형제는 사이좋게’

- 나의 아버지 장용학

  • 탄생 100주년 문학인 기념 : 나의 아버지
  • 2021년 여름호 (통권 80호)
②실존주의 문학 대표작가의 가훈은 ‘거짓말 하지 말고 형제는 사이좋게’

- 나의 아버지 장용학

장용학(1921~1999) : 소설가, 언론인, 함북 부령 출생. 경기고등학교 교사, 덕성여자대학교 교수 및 경향신문·동아일보 논설위원 역임. 대표작 『원형의 전설』 「요한 시집」 「비인탄생」 「역성서설」 등
관념소설이라는 새로운 계보를 만들어냈으며 한국전쟁을 세대적 자의식으로 인식하여 그 시대상을 소설적으로 드러냄.



아버지 장용학 소설가, 1986년

아버지 장용학(張龍鶴)은 1921년 함경북도 부령에서 태어나 1999년 79세를 일기로 작고하셨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아버지는 항상 사색하고 고뇌하는 지식인의 모습이셨습니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시는 것을 지키기 위해서는 타협하지 않으셨습니다. 자식들에게는 매우 엄격하셨지만 자식들의 생각을 존중하고 깊은 사랑을 주신 분이셨습니다.

아버지는 동경유학생으로 와세다[早稻田] 대학교에 다니다가 1944년 학병으로 징집되었습니다. 학병 시절을 회상하시면서 한번은 구타를 심하게 당해 부상을 입었는데 야외에서 비를 맞고 자다가 상태가 많이 악화되었다고 하셨습니다. 그때도 군의관이 있었을 텐데 왜 치료를 안 받으셨느냐고 여쭈었더니 어차피 죽을 목숨인데 치료가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생각하셨다고 합니다. 이 말을 듣고 저는 아버지가 전쟁의 공포 앞에서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드는 극한의 불안과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을 체험하셨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해방이 되자 학병으로부터 돌아와 고향인 청진에서 교사 생활을 시작하였고 1947년 공산주의를 피해 월남하였습니다.

주지하듯이 아버지는 전후 한국 실존주의 문학의 대표작가 중 한 분이셨습니다. 전쟁, 분단과 이데올로기 대립 등 비인간적인 시대상황이 인간의 삶을 어떻게 파괴시키는지 밝히고 인간 실존을 탐구하는 것이 아버지 문학의 주제였습니다. 아버지의 소설은 관념적이고 난해하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살아온 시대의 아픔과 고통을 평범한 언어로 표현하기는 어렵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아버지가 글을 쓰실 때 떠오르는 이미지는 고독과 인내입니다. 적절한 단어를 찾지 못하여 불면의 밤을 보내시는 모습을 여러 번 뵈었습니다. 아침에 재떨이에 수북이 쌓인 담배꽁초를 보면 어젯밤 창작의 고통이 느껴지곤 하였습니다. 그러시다가 설탕과 크림을 듬뿍 넣은 달달한 커피를 한 잔 드시면서 다시 펜을 잡기 시작하셨습니다. 지금도 아버지 묘소에 가면 즐겨하시던 커피와 담배를 묘지 앞에 올려놓고 아버지를 추억하곤 합니다.

아버지의 정치적 활동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버지가 직업적인 정치인은 아니셨지만 반독재활동을 하는 문인들과 뜻을 함께 하셨고 아버지의 인생에서 적지 않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1967년부터 1973년까지 동아일보 논설위원으로 재직하시는 동안 사설, 칼럼 등을 통해 박정희 정부를 지속적으로 비판하셨습니다. 당시 젊은 기자들이 해고되기 시작하면서 그들의 윗사람으로 더 이상 직장에 다닐 수가 없다고 판단해서 사표를 내고 신문사를 퇴직하셨습니다. 당시 다른 신문사로부터 취업 제안을 받았지만 거절하면서 언론인으로서의 생활은 마무리되었습니다. 퇴직 이후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영구 집권을 저지하고 표현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자유실천문인협의회에 참여하여 활동하셨습니다. 당시 중앙정보부와 경찰은 정기적으로 사찰을 했으며 사전검열을 통해 창작 활동을 지속적으로 방해하였습니다. 소설을 탈고한 후 출판사로 원고를 보내면 원고지에 빨간 줄이 죽죽 그어진 채로 집으로 되돌아왔고 그 부분이 고쳐지지 않은 상태로는 출판이 불가하다는 말도 함께 전달되어 왔습니다. 빨간 줄이 그어진 이유는 나쁜 일을 저지른 인물의 직업이 단지 군인이라는 이유, 또는 경찰이 시민을 때린다는 이유 등 납득하지 못할 것들이 많았습니다. 당시 아버지께서 화를 내시며 고통스러워하시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히 기억납니다. 그런 일들을 감내해야 하는 기간이 오랫동안 지속되다 보니 세상과 고립되고 사실상 절필 상태에 놓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당시 아버지는 서재에서 글을 읽거나 정원을 가꾸면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셨습니다. 이처럼 아버지는 선비적 자세로 은둔을 택하셨는데 야만적인 집단에 대항하는 아버지만의 방식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1943년 일본 와세대대학 재학 시절의 아버지 

1971년 불광동성당에서. 장남, 차남 두 아들의 첫영성체 기념 가족사진   

 

 

아버지는 소설가이시면서 교사, 교수, 언론인으로 생활하셨습니다. 제가 사회생활을 하면서 아버지를 기억하시는 분들을 만날 기회가 몇 번 있었습니다. 장용학 선생님의 교사 시절 추억을 회상하거나 사상계에 연재되었던 『원형의 전설(圓形의 傳說)』을 접했을 때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고 말씀하시면서 아버지의 이름에 누가 되지 않도록 올바르게 살아야 한다고 격려해 주셨습니다. 저희 집안의 종교는 천주교인데 1964년 명동 성당에서 가족 모두가 세례를 받았습니다. 아버지는 “천주교가 만들어주는 그늘이 넓어서 자식들이 어긋나지 않고 올바른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보호해 줄 수 있는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줄 것이라고 생각하여 우리 가족의 종교로 받아들이게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초등학교 시절 가훈(家訓)을 가지고 오라는 숙제가 있었습니다. 그때 아버지께서 “거짓말을 하지 말고 형제는 사이좋게”라는 가훈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제 어린 생각에는 소설가이신 아버지가 좀 더 거창하고 멋있는 가훈을 만들어 주실 것이라 기대했는데 너무 간단해서 조금은 실망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양심적인 삶’과 ‘가족 간의 화목’이 당신이 자식들에게 요구하는 가장 기본적인 덕목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1970년대 후반 아버지가 중앙정보부에 연행되는 일이 몇 번 있었습니다. 그때 어머니와 삼형제가 아버지의 무사귀환을 바라며 촛불을 켜놓고 ‘묵주의 기도’를 드렸고 아버지가 돌아오시면 기쁜 마음으로 뛰어나가서 반갑게 맞이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러한 경험이 어린 삼형제를 일찍 철들게 하였고 가족들을 서로 아끼고 묶어주는 역할을 한 것 같습니다.

아버지 탄생 100주년을 맞아 아버지가 더욱 그리워집니다.

장한철
장용학 소설가의 장남, 전 한국은행 제주본부장, 전 예금보험공사 부사장, 1961년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