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생 100주년 문학인 기념 : 나의 아버지
①아버지 목소리를 찾습니다

- 나의 아버지 류주현

  • 탄생 100주년 문학인 기념 : 나의 아버지
  • 2021년 여름호 (통권 80호)
①아버지 목소리를 찾습니다

- 나의 아버지 류주현

류주현(1921~1982) : 소설가, 경기 여주 출생. 중앙대 교수 및 한국소설가협회 초대회장 역임. 장편소설 『조선총독부』 『대원군』, 소설집 『자매계보』 『태양의 유산』 『장씨일가』 등
윤리의식, 특히 현실적인 억압으로 존재하는 윤리를 타파하고 풍자와 반항의 색깔이 짙은 인간의 본능과 본연의 자세를 추구함.

 

아버지 류주현 소설가, 1976년

아버지 호(號)는 묵사(黙史)이다. 호가 마음에 들기도 하셨던 것 같고, 달리는 호와 같은 삶을 희망하셨던 것 같기도 하다. 자식들에게도 직접적인 표현은 가능한 절제하셨고, 그냥 지긋이 지켜보는 것으로 많은 것을 말씀하셨다. 그래서 나는 아버지와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눈 기억이 그리 많지 않다. 그렇다고 아버지가 무뚝뚝한 분은 아니셨다. 잔잔한 표정으로 많은 말씀을 대신했지만 자상한 아버지이셨다. 내가 청년 시절 가벼운 일탈을 해도 아버지는 그냥 조용히 지켜보셨다. 하지만 그때는 그런 묵언이 주는 무게를 제대로 느끼지 못했다. 내가 20대 후반이 되어 조금씩 아버지의 묵언이 들리기 시작할 때쯤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셨다. 세월이 많이 흐르기도 했지만 아버지의 목소리가 또렷이 기억나지 않는 것도 그런 이유가 아닐까. 그래서 더욱 아버지의 목소리가 그립다.

 

1975년 정원에서   

1974년의 아버지, 어머니, 누이    

 

 

늦은 가을 저녁으로 기억한다. 식사를 준비하시던 어머니가 서재에 계신 아버지를 모셔오라고 하신다. 집안은 이미 불을 켜지 않고서는 서재로 향한 복도를 걷기에도 부담스럽게 어둑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런데 아버지의 서재는 여전히 불이 꺼져있는 것이 아닌가. 문득 걱정도 되었지만 잠시 피곤을 초저녁잠으로 풀고 계신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조심스럽게 서재 문을 열고 들어서니 짙은 어둠 속에서 아버지는 돌부처처럼 책상 앞에 앉아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이 작품을 쓰고 계셨다. 내가 인기척을 하니 그때에서야 아버지는 주변의 짙은 어둠을 인식하셨다. 당시 대학생이었던 내게 아버지는 새롭게 들어왔다. 이 기억은 워낙 강렬해서 종종 아버지를 추억할 때 말하곤 한다.

아버지는 작가로서 다양한 경험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래선지 스포츠나 여가활동도 다양하게 시도하면서 종종 나를 데리고 다니셨다. 내가 중학교를 다닐 때쯤 아버지를 따라 이미 당구장을 구경하기도 했고, 대학을 다닐 때는 심지어 경마장도 구경시켜주면서 도박이 아닌 도락으로서의 경마를 일러주셨다. 아버지의 문재를 이어받지 못하고 내가 건축을 공부하던 시절, 글쓰기와 건축은 둘 다 감성적 풍요로움도 중요하니 음악도 즐길 줄 알아야 한다며 전축을 구입해오라는 심부름을 일부러 시키기도 하셨다. 그 후 집필이 잘 안되거나 오수를 즐기실 때는 서재에서 음악소리가 들리곤 했다. 가까운 문우를 따라 낚시터를 찾기도 했는데 가끔 나를 데리고 다니셨다. 자신의 본분에 충실하기 위해서라도 잠시 쉬어가는 여유를 가질 줄 알아야 한다는 지혜를 주려 하신 것 같다. 하지만 그때는 몰랐다. 요즘 가끔 낚시터에 앉아있으면 아버지가 생각난다.

인왕산 줄기에 마련하신 집은 비교적 마당이 넓은 편이었다. 여름에 집필이 잘되지 않거나 휴식이 필요하면 정원수를 다듬고, 잔디의 잡초를 뽑거나, 나무에 물을 주곤 하셨다. 당시 『대원군』과 『조선총독부』가 베스트셀러가 됨으로써 예전의 작은 집을 허물고 다시 지은 집인데 당시 동네에서는 단연 돋보이는 이층집이었다. 마당에 조선시대 장명등을 구입해 배치해놓기도 하고, 작은 연못을 만들어 낚시로 잡은 붕어나 잉어를 기르기도 하고, 연꽃을 심어 정성으로 키우기도 하셨다. 그렇게 아버지는 집 안팎을 정성으로 다듬고 치장하면서 십오 년 남짓 그 집에서 많은 작품을 집필하고 돌아가셨다. 그때는 지금과 같이 자가용이 흔치 않았던 시기였는데, 차도 구입해서 타고 다니셨다. 자칫 허세로 보일 수도 있었는데 그 주된 이유인즉슨 이렇다. 소설가도 작품을 통해 집도 짓고 차도 굴릴 수 있다는 희망을 후배 문인들에게 보여주는 것도 큰 의미가 있다는 말씀이시다. 그런 사연이 많던 집에서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머니와 함께 이십여 년 동안 생활하며 작품의 산실을 지켜보려 했다. 그러나 나의 의지와 능력이 부족하여 문학기념관으로 발전시키지 못하고 지역 재개발사업에 포함되어 철거되는 것을 허락하고 말았다. 아버지의 흔적을 지켜내지 못한 무능함과 조급함이 한없이 부끄럽고 죄송스럽다. 그나마 여주시의 도움으로 조촐한 문학관이 여주박물관 내에 설치되어 일부 유품들이 보관되고 전시되어 다행으로 생각한다.

사찰 등을 여행하실 때는 가족들을 데려가곤 했는데 거의 예외 없이 조그만 종이에 많은 메모를 하시던 모습이 생각난다. 그런 기록들은 꼼꼼히 정리되어 어느새 역사소설에 반영되곤 했다. 오십 세를 전후해서는 작품을 위해서라도 체력이 필요하다며 나를 데리고 연식정구와 배드민턴을 치기도 하셨고, 당시로서는 쉽게 접하기 힘든 볼링이나 골프도 잠시 시도하셨다. 특히 연식정구를 즐기실 때는 한참 기운이 넘치던 고등학생이었던 나와 몇 시간을 계속하실 정도로 체력도 좋으셨다. 당시 많을 때는 동시에 몇 개 일간지에 연재소설을 게재하셨는데 그러려면 매일 30장 이상의 원고를 써야 하는 지난한 작업의 연속이었다. 중간중간 단편소설도 발표하려면 정말 대단한 열정과 집념이 아니면 불가능할 지경이었다. 그 결과 불면증과 신경과민으로 고생을 하기도 하셨고, 집필실은 늘 담배연기로 눈이 매울 지경이었다. 결국 그것이 화근이 되었는지 환갑도 되시기 전에 척추질환이 발병하여 수년에 걸쳐 병원과 집을 오가면서 투병을 하셨다. 투병 말기에는 종일 누워계시다 보니 등창으로 고생도 많이 하셨고, 너무 수척해져서 주위 사람들의 안타까움도 더해가고 있었다. 그래도 투병 의지는 대단해서 끝까지 다시 일어나 작품을 쓰겠다는 집념을 버리지 않으셨다. 섬세한 아버지의 강인한 모습이 내게 어색할 정도로 새롭게 들어왔다. 그런 아버지 병상 옆에는 항상 수집한 회중시계 몇 개가 걸려있었고, 시계가 멈출까 수시로 태엽 감는 것을 소일거리로 투병하며 지내셨다. 하지만 그때도 시간을 이겨보려는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다. 그나마 선산에 모실 때 가장 좋아하셨던 회중시계를 함께 넣어드린 것으로 위안을 삼을 뿐이다.

아버지가 좋아하셨던 질박한 고가구 몇 점은 여전히 내 곁에 있다. 가구에 왁스 칠을 하며 아버지를 생각한다. 아버지가 처음 접하게 해준 음악을 듣는다. 이제야 잔잔한 아버지 목소리가 조금 들린다.

류호창
류주현 소설가의 장남, 건국대학교 글로컬캠퍼스 명예교수, 1954년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