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영 탄생 100주년 : 온몸의 시, 온몸의 철학 ②
김수영과 온몸의 사유

  • 김수영 탄생 100주년 : 온몸의 시, 온몸의 철학 ②
  • 2021년 여름호 (통권 80호)
김수영과 온몸의 사유

편집자 주 | 김수영 시인의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여 그의 작품에 드러난 온몸의 철학을 주제별로 살펴보는 특별코너를 4회에 걸쳐 연재한다. 연재 순서는 다음과 같다.1. 온몸의 존재 / 2. 온몸의 사유 / 3. 온몸의 시학 / 4. 온몸의 윤리

  

김수영


(1921~1968) 시인, 한국 현대 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김수영은 과감하고 전위적인 시작법으로 오늘날 모더니즘 시의 뿌리가 되었고 문학의 정치 참여가 가지는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한 깊은 성찰을 보여주었다. 김경린, 박인환 등과 함께 합동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을 간행하여 모더니스트로서 주목을 끌었다. 초기에는 모더니스트로서 현대문명과 도시생활을 비판했으나, 4·19혁명을 기점으로 자유와 저항정신을 바탕으로 한 참여시를 썼다. 마지막 시 「풀」에 이르기까지 200여 편의 시와 시론을 발표하였다.


먼 곳에서부터

먼 곳으로

다시 몸이 아프다

조용한 봄에서부터

조용한 봄으로

다시 내 몸이 아프다

여자에게서부터

여자에게로

능금꽃으로부터

능금꽃으로 ……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몸이 아프다


- 「먼 곳에서부터」 전문


온몸의 존재를 노래하는 대표작이 「풀」(1968)이라면, 온몸의 사유를 노래하는 대표작은 「먼 곳에서부터」(1961)다. 통념상 사유는 자기 이외의 어떤 대상을 전제한다. 사유는 특정 대상에 의해 수동적으로 자극될 수도, 특정 대상을 능동적으로 구성할 수도 있다. 하지만 사유는 자기 자신을 대상으로 할 수도 있다. 다른 어떤 것에 관계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 관계하면서 자극을 주고받는 사유, 그런 사유는 보통 반성이라 불린다. 그런데 반성은 깊어질수록 대상화할 수 없는 것, 그래서 대상화의 차원을 넘어서는 저편으로 향한다. 어떤 먼 곳에 이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유는 세 가지 관계에 따라 구조화됨을 알 수 있다. 대상 관계, 자기 관계, 원격 관계가 그것이다. 모든 사유 속에는 이 세 가지 관계가 함께 펼쳐진다. 그러나 보통의 평범한 생각에서는 대상 관계가, 온몸의 사유에서는 원격 관계가 주축이 된다. “먼 곳에서부터 먼 곳으로 다시 몸이 아프다.” 이것이 온몸의 사유를 드러내는 시적인 정식이다. 먼 곳과의 원격 관계, 그것이 온몸의 사유를 정의하는 핵심 요소다. 이때 먼 곳이란 물리적으로 멀리 떨어진 장소가 아니다. 대상 관계 안에서 성립하는 저편이 아니라 대상 관계 자체를 넘어서는 저편이다. 대상 관계에 따른 평범한 사유가 수평적 구도를 이룬다면, 원격 관계에 따른 온몸의 사유는 수직적 구도를 이룬다.

온몸이 수직적으로 관계하는 먼 곳은 평범한 사유의 바깥이다. 하지만 그 바깥에 일상적 사유의 기원이 숨어있다. 현재의 사유를 가능하게 해준 조건과 비밀이 놓여있는 곳. 칸트 이래 철학자들은 그런 바깥을 ‘초월론적(transcendental)’이라 불렀다. 경험적 사유와는 다른 평면을 이루기 때문이다. 온몸의 사유는 그런 초월론적인 바깥을 자기 안으로 끌어들이는 사유이고, 그렇게 끌어들이기 위해 자기 자신을 한없이 자극하는 사유다. 자기를 자극하는 사유. 그러므로 온몸의 사유는 먼 곳과의 관계 못지않게 자기 자신과의 관계를 핵심 요소로 한다. 「시여, 침을 뱉어라」(1968)에 나오는 공식 ‘온몸에 의한 온몸의 이행’은 사유가 빠져든 역동적인 자기 관계의 표현이다. 시는 온몸에 의한 온몸의 이행이고, 그 ‘자유의 이행’에는 어떠한 외부의 지원도 개입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김수영은 말한다. “자유는 고독한 것이다. 그처럼 시는 장엄하고 고독한 것이다”(『김수영 전집 2』, 501쪽).

그러나 온몸의 자기 관계는 자폐적인 자기 관계가 아니다. 그것은 먼 곳을 우회하는 열린 자기 관계다. 균형적이고 대칭적인 자기 관계가 아니라 불균형적이고 비대칭적인 자기 관계다. 단번에 즉각 이루어지는 자기 관계가 아니라 실패를 반복하는 자기 관계다. 왜 그런가? 초월론적인 바깥은 어떤 한계로서, 죽음으로서 경험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온몸이 먼 곳을 포착하기 위해 자기를 끝없이 자극한다면, 그 자기 자극은 고통을 수반한다. 바깥은 사유 안으로 쉽게 접혀 들지 않고 다시 멀어져 가기 때문이다. 그렇게 멀어져 갈 때 우리는 “다시 몸이 아프다.” 불균형에 빠지고 분열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분열의 고통을 치르지 않는다면, 우리는 사유의 한계를 경험할 수 없다. 한계로서의 그 문턱을 넘어 변신할 수도 없다.

이것은 온몸의 존재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온몸의 존재는 (지난번에 언급했던 것처럼) 바람으로 표상되는 힘이다. 힘은 다른 힘과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변화해간다. 이것이 대상 관계 안에서 힘이 존재하는 방식이다. 그런데 대상 관계가 초래한 예상 밖의 변화 속에서 힘은 자기를 상실할 수 있다. 힘이 다른 힘과 관계하면서 자기를 유지할 수 있는 이유는 스스로 자기 자신과 관계한다는 데 있다. 힘은 자기 자신을 자극하면서 복잡해진 내용에 단순한 형식을 부여한다.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면서 흐트러진 균형에는 중심을 잡는다. 그러나 그런 자기 자극이 어떤 상승적인 자기 함량 운동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자신의 바깥을 자기 안으로 끌어들일 수 있어야 한다.

이 점을 노래하는 것이 「풀」(1968)이다. 이 시에서 풀은 세 단계의 변화를 거쳐 간다. 처음에는 바람이 부는 대로 나부낀다. 그다음에는 바람보다 더 빠르게 움직인다. 그리고 마침내 바람과 무관하게 움직인다. 이것은 대상 관계에 종속되었던 풀이 자기 관계 속에서 중심을 회복하다가 마침내 원격 관계 속에서 자유에 도달하는 과정이다. 우리의 사유도 마찬가지다. 사유는 ‘죽음의 고개’를 넘어가듯 자신의 바깥과 관계할 때만 대상 관계에서 해방되고, 마침내 새로운 변신의 문턱을 통과할 수 있다. 「시여, 침을 뱉어라」의 도입부에서 먼 곳은 ‘무한대의 혼돈’으로, 그 혼돈에 관계하는 시적인 형식은 모호성으로 지칭된다.

 

“나의 시에 대한 사유는 (…) 명확한 것이 못 된다. 그리고 그것을 조금도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지 않다. 이러한 나의 모호성은 시작(詩作)을 위한 나의 정신 구조의 상부 중에서도 가장 첨단의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고, 이것이 없이는 무한대의 혼돈에의 접근을 위한 유일한 도구를 상실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김수영 전집 2』, 497쪽).

무한대의 혼돈, 그 죽음의 밤으로 접근하는 시적인 사유가 정확히 김수영이 말하는 ‘온몸에 의한 온몸의 이행’이다. 그 온몸의 이행은 모호하고 무의식적이다. 거기에는 명석한 시선과 투명한 의식이 개입하지 않는다. 온몸이란 시선 없는 신체, 의식 없는 신체, 기관 없는 신체다. 분화 이전의 원점으로 돌아간 신체, 그것은 어떤 순수한 힘이다. 온몸은 힘의 다른 이름이다. 그 힘은 아폴론적인 형상이 아니라 디오니소스적인 도취 속에 드러난다. 모호성은 그런 도취의 다른 이름이다.

이 점을 설명하기 위해 김수영은 시적 사유 전체를 교회당에 비유한다(『김수영 전집 2』, 497쪽). 이 건축학적인 비유에서 교회당은 두 부분으로 분할된다. 한 부분은 십자가 달린 뾰족탑이다. 다른 한 부분은 십자가 하반부에서부터 까마득한 주춧돌 밑까지 이르는 ‘건축의 실체의 부분’이다. 이 실체의 부분은 ‘명석의 개진’에 의해 축조된다. 논리적인 의미가 하반부의 벽돌이다. 반면 ‘시의 탐침’은 뾰족탑 끝에 달린 ‘십자가 상반부의 창끝’에 해당한다. ‘정신 구조의 상부 중에서도 가장 첨단의 부분’은 모호성의 구름 속에 머리를 묻고 무한대의 혼돈과 교신한다.

무한대의 혼돈과 교신하기, 이것이 시가 ‘죽음의 고개를 넘어가는 모습’(『김수영 전집 2』, 665쪽)이다. 시적 사유는 ‘온몸에 의한 온몸의 이행’을 통해 죽음의 고개를 넘어간다. 그러나 그 이행이 죽음에 붙들리지 않는 것은 모호성 덕분이다. 투명한 자기의식을 버리고 모호성을 취하지 않는다면 사유는 무한대의 혼돈을 통과하여 자기로 돌아올 수 없다. 우리는 여기서 온몸의 사유를 정의하는 또 다른 요소를 발견한다. 모호성은 자기 관계와 원격 관계에 이어 온몸의 사유를 정의하는 세 번째 특징이다. 무한대의 혼돈이 죽음이라는 형태를 띤다면, 모호성은 도취, 광기, 그러나 무엇보다 사랑의 형태를 취한다. 온몸의 시학에서 사랑이란 죽음의 고개를 넘어가는 이행, ‘온몸에 의한 온몸의 이행’이다.

 

“시작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고 ‘심장’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몸’으로 하는 것이다.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온몸으로 동시에 밀고 나가는 것이다. (…) 그런데 시의 사변에서 볼 때, 이러한 온몸에 의한 온몸의 이행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그것이 바로 시의 형식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김수영 전집 2』, 498쪽).

 

온몸에 의한 온몸의 이행, 그것이 사랑이라 불리는 모호한 시의 형식이자 시 쓰기 자체다. 그러나 이것이 시의 전부는 아니다. 시에 형식이 있다면 내용도 있어야 한다. 시 쓰기(시작)가 있다면 시를 논하는 일(시론)도 있어야 한다. 김수영에게 ‘현대시’는 이 두 측면을 모두 가져야 한다. 시작과 시론, 형식과 내용은 서로 대립하면서 시를 구조화하는 양극(兩極)이다. 김수영은 이런 양극에 좀 더 커다란 동심원을 그려나간다. 먼저 노래와 산문, 예술성과 현실성이라는 이항 대립이 더해진다. 이후 하이데거를 끌어들여 대지의 은폐와 세계의 개진이라는 동심원을, 엘리엇을 끌어들여 음악 대 의미라는 동심원을 그려놓는다.

그러므로 시의 형식 쪽에는 무의식(모호성), 시작, 예술성, 노래, 대지, 은폐가 하나의 계열을 이룬다. 내용 쪽에는 의식(명석함), 시론, 현실성, 산문, 세계, 개진이 다른 하나의 계열을 이룬다. 우리가 건축학적인 비유에 붙들려 있으면, 이 두 계열은 시의 공간을 절반씩 차지하는 두 부분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김수영은 힘의 관점으로 돌아가 그런 공간적 표상을 거부한다. 역학적 관점에서는 두 계열이 각각 시의 전체가 될 수 있다는 것이고, 그래서 정태적인 분할 구도가 아니라 역동적인 갈등과 긴장이 시의 구조적 특성이라는 것이다.

“예술성의 편에서는 하나의 시 작품은 자기의 전부이고, 산문의 편, 즉 현실성의 편에서도 하나의 작품은 자기의 전부이다. 시의 본질은 이러한 개진과 은폐의, 세계와 대지의 양극의 긴장 위에 서 있는 것이다”(『김수영 전집 2』, 499쪽).

 

그러나 온몸의 시학에서는 형식과 내용 혹은 시작과 시론의 대극적 긴장 이외에 또 다른 긴장이 자리한다. 그것은 ‘죽음과 사랑의 대극’(『김수영 전집 2』, 664쪽)에서 오는 긴장이다. 이 두 유형의 대극적 긴장은 어떻게 겹치고 어떻게 다른 것인가? 이 점은 다음 기회에 다루어보기로 하자.

김상환
서울대학교 철학과 교수, 1960년생
저서 『김수영론: 풍자와 해탈 혹은 사랑과 죽음』 『김수영과 논어』 『근대적 세계관의 형성』 『왜 칸트인가』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