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의 풍경
어느 댁 아기가 가장 크나

- 우량아 대회 70여년

  • 근대의 풍경
  • 2021년 여름호 (통권 80호)
어느 댁 아기가 가장 크나

- 우량아 대회 70여년

오늘날 ‘우량아 대회’하면 TV에 토실토실한 아기들의 신체를 측정하고, 순위를 매기던 모습을 연상한다. 사실 우량아 대회의 연원에는 국가가 열등아, 허약아, 비정상아, 불량아, 저능아를 통제하겠다는 사상이 깔려있다. 이른바 우생학이다.

19세기 말 프랜시스 골턴이 우생학을 제창한 이래 20세기를 풍미한 사상이었다. 인간을 적격자와 부적격자로 나눈 뒤 부적격자를 인종개량하여 사회를 발전시키겠다는 사상이었다. 국가가 부적격자를 통제하는 방식에 따라 부적격자를 사회에서 제거하자는 네거티브 흐름과 부적격자를 질적으로 개선하자는 포지티브 흐름으로 나눌 수 있다. 우량아 대회는 포지티브 우생학 입장에서 부적격 불량아를 적격 우량아로 만들고자 개최되었다.

근대국가가 앞장서서 우량아 대회를 열었다. 2세 국민의 건강이 국가의 미래라는 믿음 속에 ‘우량아 선발대회’, ‘Baby Show’, ‘Baby Contest’ 같은 이름의 우량아 대회를 열었다. 우량아 대회는 국가가 어머니를 가르치는 장이었다. 근대국가는 아기가 튼튼하게 자라려면 낙후한 재래 양육법 대신 선진적인 근대 양육법으로 길러야 한다고 믿었다. 국가는 어머니가 아기를 청결, 위생, 정시, 정량, 측정, 규칙, 영양지식 등과 같은 근대 규율에 입각해서 기르도록 계몽하였다. 근대화, 산업화, 과학화, 합리화에 열망하던 20세기 시대성이 배어있는 양육법이었다.  

어머니로서도 아기가 우량아로 선발되면 가정은 물론 사회적으로 인정받았다. 상은 아기가 받지만 공은 어머니에게 돌아갔다. 사회에서는 우량아 어머니를 현명하고 지혜롭고 모범적이고 정성스러운 어머니로 치하했다. 아기가 우량아로 선발된다는 것은 어머니로서 최고의 영예이고 자랑이었다. 거꾸로 아기가 허약하거나 불량하면 어머니 책임이었다. 어머니가 무지하고 부주의하여 아기를 제대로 기르지 못한다고 비난했다.

우리나라에 우량아 대회를 처음 소개하고 개최한 것은 1910년대 서구 선교사였다. 선교사는 포교와 기독교적 근대를 구현하고자 우량아 대회를 열었다. 교회에서 육아교실을 운영하고, 과학적 양육법을 지도하고, 우량아 대회를 열어 그 성과를 대외에 알렸다. 우량아 대회는 장안의 화제거리였다. 가령 1930년 경성연합아동보건회가 우량아 대회를 일주일 동안 열었는데 구경꾼이 수천여 명이나 될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다. 선교사는 대회 기간에 아기 목욕하는 법을 보여주고, 기생충 약을 설명하고, 적절한 이유시기를 가르치고, 위생 포스터와 서적을 전시하고, 보건위생 영화를 보여주었다. 대회가 끝나면 신규 교인이 늘어났다. 우량아대회는 경성만이 아니라 인천, 공주, 개성, 평창, 거창 등지의 교회에서도 열렸다. 당시 조선에서는 영유아 사망률이 매우 높았기에 선교사의 우량아 대회는 아기를 건강하게 기르고 싶어 하는 어머니 열망과 부합했던 것이다.

식민권력인 조선총독부도 1927년부터 우량아 대회를 열었다. 그러나 이는 조선에 거주하는 2세 일본인을 위한 행사였다. 일본인 어머니가 아기를 강건한 우량아로 기르도록 조선총독부가 앞장섰다. 전문 의료인이 아기의 신체를 측정하고, 일본 어머니에게 근대적 양육법을 가르쳤다. 

그러다 1937년 일제가 도발한 중일전쟁이 장기화되며 상황이 바뀌었다. 일제는 전쟁에 동원할 인적 자원이 크게 부족해지자 일본인만이 아니라 조선인도 병력자원으로 여기게 되었다. 조선총독부는 그 일환으로 1939년부터 조선 전역에서 최고 우량아를 선발하는 ‘전선우량유아심사회(全鮮優良乳兒審査會)’를 열었다. “병참반도 건설에 위대한 시사, 건강조선을 자랑하는 유아들의 씩씩한 자태” “건강조선을 대표한 빛나는 흥아(興亞) 2세들” “귀여운 건민(健民)의 첨병” 등의 수사를 동원하며 일본인과 조선인 참여를 종용했다. 조선총독부의 우량아 대회는 1943년까지 해마다 열렸다.

1945년 8월 15일 해방된 뒤에도 우량아 대회는 계속되었다. 자주독립국인 한국에서도 2세 국민의 건강은 미래의 희망이었다. 1946년 이래 해마다 어린이날 기념행사의 일환으로 열렸다. 시, 도, 면, 읍, 동과 같은 지방행정기구가 최우량아, 우량아, 가량아를 선발했다. 이승만 대통령 부인 프란체스카나 박정희 대통령 부인 육영수가 서울시 우량아 대회에 참석해서 국가의 미래를 짊어질 우량아를 치하하고 장려했다. 선발된 우량아는 보사부장관상을 위시한 상장과 상금 그리고 상품을 받았다.

우량아 대회를 가장 잘 활용한 것은 우유회사였다. 19세기 중 후반 이래 서구열강은 자신들의 우유 소비문화를 문명화된 음식문화라 자부하며 연유, 조제분유 등의 유제품을 개발하고 산업화해나갔다. 우유회사는 우유=과학적 문명자양이라는 논리를 펴며 전 세계를 유제품 시장으로 만들어갔다. 우리나라에서도 우유회사는 이러한 논리를 펼치며, 토실토실한 아기를 광고도안에 실었다. 우유회사는 우량아 대회에서 선발된 아기가 자사 분유를 먹고 자란 아기라면서 우량아=과학적 영양=분유라고 선전했다. 심지어 “부실한 후진국 모체의 젖”보다 과학적으로 만든 선진국 분유가 더 영양가가 많다고 홍보했다. 미국제 비락분유는 1957년부터 각 지역 우량아 대회에서 비락분유를 먹고 최우량아로 뽑힌 아기에게 현상금과 상품을 준다고 홍보했다.

우유회사의 광고는 점점 더 대담해졌다. 1961년 비락분유는 자사분유를 먹은 아기가 모유 먹은 아기보다 서울시 우량아 심사대회에서 더 많이 당선됐다고 선전했다. 비락분유만이 아니었다. 1960년대 베비락 분유도, 비만분유도, 영유아영양제 비오비타도 자사 제품을 먹은 아기가 각 지역 우량아대회에서 최우량아로 뽑혔다고 홍보했다. 국산조제분유인 남양분유도 1969년 서울시 우량아 대회의 4명의 최우량아 아기가 전부 남양분유로 자랐다고 광고했다가 서울시로부터 허위광고로 고발당하기도 했다.

1960년대 대한식품공사가 분유상표를 비만분유라고 지을 정도로 당시는 비만아를 선망하던 시대였다. 우유회사의 우량아 광고는 어머니의 시선을 확 끌어당겼다. 더욱이 1971년부터 TV로 우량아 대회가 중계되자 한국사회는 우량아에 열광하게 되었다. 남양분유는 1971년 이래 해마다 어린이날이 되면 MBC TV 및 경향신문과 손잡고 전국 우량아 선발대회를 열었다. 우량아대회에서 1등으로 뽑힌 아기는 1년 내내 분유광고 주인공으로 나왔다. 이러한 선전은 분유를 먹이면 우량아가 된다는 믿음을 전국에 확산시켰다. 더욱이 남양분유는 어머니의 인정욕구를 자극했다. “귀여운 아기를 기르시기에 온갖 정성을 다하여온 어머니, 이제 튼튼하게 자란 우리 아가를 우량아 선발대회에서 마음껏 자랑하여보세요!”

더욱이 정부도 남양분유의 전국 우량아 선발대회 1등에게 1973년부터 보사부장관상을 수여하는 등 힘을 실어주었다. 우량아 대회의 인기가 높아질수록 분유수유가 늘어나고 모유수유를 기피하는 현상이 일어났다.

한편 서구에서 20세기 후반부터 분유수유와 인공영양을 반성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모유가 아기영양과 감염예방 등에 인공영양보다 탁월하다는 연구들이 나오며 모유수유를 장려하는 분위기로 급변했다. 이러한 움직임은 국제사회에도 울려 퍼져 1981년 세계보건기구가 영유아분유의 과대선전금지 규약을 채택하기에 이르렀다.

우리나라도 공식적으로 이러한 분위기에 부응하여 우량아 대회와 분유광고를 폐지했다. 남양분유의 우량아 대회가 1984년에, 분유광고가 1991년에 중단되었다. 하지만 우량아=분유라는 믿음은 계속 이어졌다. 그 결과 모유수유가 계속 줄어들어 1994년이 되면 온전히 모유만 먹는 아기가 11.4% 밖에 안되었다. 우리가 지나온 20세기 풍경이다.

이은희
한국근현대사 연구자, 가천대학교 문화유산역사연구소 연구원, 1963년생
저서 『설탕, 근대의 혁명』, 공저 『6.25전쟁과 1950년대 서울의 사회변동』 『근현대 서울 사람들의 여가생활』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