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문학의 공간
그날 밤 나는 두 곳에 동시에 있었다

  • 내 문학의 공간
  • 2021년 여름호 (통권 80호)
그날 밤 나는 두 곳에 동시에 있었다

 

한 방송작가 친구는 모이면 아직도 나를 가리키며 오래전의 그 일을 얘기한다.

“둘 다 책 원고 마무리하자고 경기도 어디 수녀원엘 2박 3일 일정으로 들어갔는데 첫날밤 열한시쯤에 이 여인이 베개 하나 딱 들고선 다급히 내 방문을 두드린 거야. 도저히 혼자 무서워서 못 자겠으니 바닥에서라도 좀 자게 해달라고. 자기가 무슨 <사운드 오브 뮤직> 영화에 천둥 친다고 마리아 방에 뛰어드는 어린애도 아니고 마흔이 넘은 사람이 말이야.”

 

 

다른 숙소에 가서 잤던 동네(위)

미국 아이오와 국제창작프로그램때의 숙소. 1층은 레스토랑. 2층은 중고서점.

3,4층이 작가들 숙소였다(아래).   

 

나마저 재밌다고 같이 웃지만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어린애 같은 불안이나 공포의 감정에 병적일 정도의 에너지도, 시간도, 체면도 구기지 않는 게 인생에서 얼마나 큰 이익인지, 내 안의 불안이나 겁이 연약한 여성인 체하려는 혀 짧은 어리광 같은 거라면 얼마나 좋을지 모를 그녀들이 부럽고 서럽곤 한다.

이제 와서 고백이지만 미국 아이오와의 국제창작프로그램으로 석 달간 숙소 4층에 머물 때도 몇 번이나 베개 들고 다른 작가 숙소로 뛰어갈 뻔했었다. 어느 날인가는 네 명쯤 되는 숙소의 다른 작가들이 전부 제각각 여행을 떠나서 그 4층 집에 나 혼자란 걸 우연히 알고는 정말로 신발을 신고 방을 나섰던 날도 있었다. 그러나 국가 차원의 망신이 될까 봐 어떻게든 참아냈다. 그런 사람이 왜 프로그램엘 지원했느냐고, 앞으론 지원 자격에 ‘담력’ 같은 것도 포함시킬까 봐 말해놓고도 조심스럽긴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식으로는 사람구실 제대로 못하겠다는 생각에서, 불안과 공포에 직접 맞서는 기분으로 일부러 혼자 더 많이 여행을 다니긴 했다. 그때마다 내 숙소 선택 기준은 게스트하우스의 여성 6인실 내지 8인실. 그리고 게스트하우스 마당이나 옆의 술집에서 밤새 술 먹고 떠드는 소리에 잠을 설쳤어요, 절대 가지 마세요, 같은 후기가 있는 곳이다. 그런 곳에서라야 나는 베개 들고 뛰어나가고 싶어지는 불안과 공포 없이 푹 잘 잔다.

그곳도 그런 후기 때문에 택했던 한인 게스트하우스였다. 도착해보니 여성 도미토리룸은 밀림 같은 지하 3층의 외진 위치였지만 방엔 여학생들의 캐리어들이 가득했고 밤에는 과연 바로 앞쪽의 넓은 테라스에서 여학생들과 옆방 남학생들의 맥주와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나는 보디가드라도 수십 명 세운 듯이 푹 잘 잤다.

그러나 다음 날 밖에서 놀다가 저녁쯤에 내려가 보니 남학생들 방엔 밖으로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다. 여학생 방에도 내 캐리어뿐이었다. 나는 당장 뛰어올라가서 주인 남자에게 1층 방갈로 중의 하나를 달라고 했다. 방값은 양쪽 다 치르겠다면서. 방갈로 앞의 사방이 트인 마루 휴게실에선 벌써 청년들이 군데군데 모여앉아서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그런데 주인남자는 만실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완전히 낙담해서 어쩔 줄 모르고 서있는데 홀연히 한 커플이 들어와선 방을 취소했다. 나는 기적이라도 만난 듯이 그 방을 내게 달라고 했다. 주인 남자도 나만큼 좋아할 줄 알았는데 뜻밖에 그는 거절했다. 내 귀를 의심하면서 몇 번이고 다시 요구했지만 그는 여러 가지 이유를 대면서 거절했다.

고약한 다른 불안까지 겹친 나는 결국 밤 열시쯤에 캐리어만 남겨둔 채 이번엔 베개가 아니라 손가방만 들고 무조건 숙소를 나섰다. 그리고 그 번화한 좁은 도로 양옆을 헤매다가 도로 바로 옆의, 가족 투숙객이 올라가던 현지인 게스트하우스에 독방을 얻고 두고 온 캐리어를 생각하면서 잠을 자는 둥 마는 둥 했다. 그렇게 그날 밤 나는 두 곳의 숙소에 있었다.

 

그런 식으로 여행만이 아니라 일상에서도 매일 남모르게 베개를 들고 뛰면서 체면을 구기면서 혼자 소동을 벌일 때마다, 불안과 공포 때문에 너무나 많은 시간과 일을 턱없는 이유나 방식으로 변경하거나 대응할 때마다, 아니 대응하지 못할 때마다 (요즘은 그 증세에 ‘공황장애’란 이름이 붙는듯하다) 자꾸 옛 가족들을 소환한다. 스물 몇 살에 한강변의 집을 떠날 때까지 집에선 밤마다 신문에 날 수준의 싸움이 벌어졌고 집에서 제일 어린 내가 키운 건 여차하면 혼자라도 살겠다고 베개 들고 뛰쳐나가려는 비겁하면서도 극단적인 각오와 나간들 이렇게 시끄러운데도 아무도 안 와보는 조용한 이웃 누구의 집도 가서 문 두드릴 수 없으리란 공포밖엔 없었다. 시끄러움과 조용함에 대한 그 이중적인 공포는 안전한 가족을 얻고 나서도 내 마음에서 내내 습관으로 남았던 것이리라.

 

그래서 스물 몇 살 이후로 그 동네 쪽으론 발걸음도 안했다. 그런데 그런 집엘, 그 동네엘 요즘엔 심지어 다시 가서 살고 싶어진다. 그것도 고향이라고 그리운 건지, 혹은 오래전에 그만뒀어야 할 그 가족 탓, 남 탓을 이제야 멈추고 담담한 어른이 되려는 건지, 그때 손 내밀어 준 건 오직 문학뿐이었다는 고마움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다.

김경미
시인, KBS-FM 작가, 1959년생
시집 『고통을 달래는 순서』 『밤의 입국심사』 『카프카식 이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