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인터뷰
길이 있다는 물이 있다는 그곳을 향하여

김종삼 시인과의 대화

  • 가상인터뷰
  • 2021년 여름호 (통권 80호)
길이 있다는 물이 있다는 그곳을 향하여

김종삼 시인과의 대화

김종삼


황해도 은율에서 출생하였다. 평양의 광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도요시마상업학교를 졸업했다. 광복 후에는 유치진을 통해 연극 활동을 하였고, 6·25 이후 시 「G 마이나」, 「돌각담」 등을 발표하여 등단하였다. 서울 환도 후에는 군사다이제스트사 기자, 국방부 정훈국 방송실의 상임연출자로 10여 년간 근무하다가 1963년부터 동아방송국 제작부에서 근무했다. 초기에는 실험적 경향을 보였으나 점차 현대인의 절망과 상처가 투영된 정신적 방황의 세계를 표현하였으며, 과감한 생략을 통한 여백의 미학을 개척하였다. 시집 『십이음계』, 『북치는 소년』 등을 발표하였다.

 

약속 시간이 한 시간쯤 지나서 벙거지 같은 모자를 머리에 얹은 그가 나타났다. 사진으로만 보았던 그의 모습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의 시가 그런 것처럼, 그렇게 생긴 사람은 세상에 그 사람밖에 없을 것 같은 인상이었다. 일어나 인사를 하자 눈도 마주치지 않고 자리에 털썩 앉았다. 먼 길을 걸어 만사가 귀찮은 표정이었다.

■ 이숭원(이하 이) : 오시느라고 힘드셨죠? 뵙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 김종삼(이하 김) : 반갑기는 뭐. 난 원래 인터뷰 싫어해요. 그래도 이렇게 나온 건 할 일이 없어서야. 아주 심심하고 따분해. 내가 있는 그곳은 술이나 담배도 없고 음악도 없고 시도 없어요. 시 못 쓴 게 벌써 사십 년 가까워. 이곳에 있을 때 내 시에 대해 물으면 내 시는 전부 사기고 가짜라고 했는데, 사실은 시가 내 구원의 빛이었어요. 그때는

인터뷰가 싫어서 어떻게든 빨리 끝내려고 억지를 부린 것 같아.

 이  동아방송 퇴직 후 정해진 일 없이 시만 쓰다 보니까 음주가 과해져서 고생하지 않으셨어요? 사막 같은 삶 속에서 시를 써야 그래도 살아 있음을 느끼는데, 맨 정신으로는 시가 안 나오니까 자꾸 술을 드신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선생님을 시의 순교자라고 했어요. 시를 쓰기 위해 목숨을 단축하는 음주를 계속하셨으니, 시의 제단에 몸을 바치신 겁니다.

 김  시의 순교자랄 것은 없고. 내가 1921년 4월생인데, 1976년 5월이 되니까 방송국에서 정년이 됐으니 나가라고 해요. 매일 술만 먹고 사람들하고 인사도 안 하고 괴팍하게 지내니 눈엣가시였겠지. 내 별명이 도깨비였거든. 두말 않고 나왔어요. 매일 나가던 직장이 없어졌으니 시간을 보낼 일이 막막했어요. 그래서 무작정 집을 나와 거리를 걸었죠. 주머니에 돈은 없지만 걷는 건 자신 있었어요. 서울 거리를 걷다가 허름한 식당에서 소주를 먹었어요. 술기운이 오르면 막막한 기분이 사라지고 가슴이 환해지면서 시가 나오는 겁니다. 평소 생각지도 못했던 오묘한 구절이 떠오르는 거예요. 그게 버릇이 됐지. 방송국 있을 때도 술을 먹었는데, 일을 해야 되니까 밤에 혼자 음악을 들을 때 먹었어요. 그때도 술이 취하면 생각이 명료해지고 시상이 떠오르는 거예요. 나이 오십이 넘으니까 방송국 일도 줄여 줬어요. 그래서 술을 더 먹게 되고 시도 많이 썼지. 그때 나온 시들이 좋았어요. “엄만 죽지 않는 계단”(「엄마」), “올페는 죽을 때 / 나의 직업은 시라고 했다”(「올페」), “살아온 기적이 살아갈 기적이 된다고”(「어부」), “하늬바람을 일으킨다 / 상쾌하다 / 이곳도 전쟁이 스치어 갔으리라”(「서시」) “물이 있다는 그곳을 향하여 / 죄가 많다는 이 불구의 영혼을 이끌고 가보자”(「형(刑)」), “나 지은 죄 많아 / 죽어서도 / 영혼이 / 없으리”(「라산스카」) 같은 구절이 그런 가운데 나왔어요. 나도 써 놓고 어떻게 이런 구절이 나왔나 스스로 의아해했지요.

 이  그런 시구가 어떻게 우연히 나왔겠습니까? 선생님 마음속에 배양되고 숙성된 내용이 언어로 응결된 것이지요. 여러 시구를 언급하셨는데 이 기회에 선생님이 정말 아끼는 시가 어떤 것들인지 몇 편 소개해 주실 수 있으신지요?

 김  사람들이 내 시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를 많이 거론하던데 사실 난 그 시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그건 좀 진술로 기울었거든. 난 그래도 50년대 첨단 이미지즘의 세례를 받은 사람이야. 시는 이미지로 구성된다는 믿음을 젊은 시절 나도 모르게 흡입했거든. 사는 게 너무 고달프고 몸이 아파서 이미지 구성의 긴장감을 유지하기 힘들 땐 어쩔 수 없이 진술의 시를 썼어요. 그런데 출판사에서는 그 시가 쉽고 좋다고 아예 시집 제목으로 삼았어요. 몸과 마음이 피폐할 때라 마음대로 하라고 했지요. 그 시집에 수록된 작품 중에는 「소공동 지하상가」가 마음에 들어요. 그 시에는 말로 다 하지 못한 짠한 무언가가 있거든. 시는 그렇게 말로 다 못한 비밀이 있어야 오래갑니다. 하나같이 동그랗고 하나같이 작은 두 소녀의 모습이 왜 지워지지 않고 자꾸 떠올랐을까? 말로는 설명할 수 없지만 느낌은 분명히 있는 그런 것, 그런 것을 시로 쓰는 것이지. 시인이면 그 심정을 이해할 거예요. 난 월남 피난민이기 때문에 마음이 늘 불안했어요. 전쟁과 죽음의 공포를 견뎌내기가 힘들었어요. 그 두려움을 넘어서기 위해 쓴 시가 「돌각담」, 「그리운 안니·로·리」, 「원정」, 「어둠 속에서 온 소리」, 「라산스카」, 「아우슈비츠」 연작이고, 그 연장선상에 「민간인」이 놓여요. 이 작품으로 처음으로 문학상을 받았을 때 살아온 보람을 느꼈어요.

 이  나중에 시선집 제목으로 삼은 「북 치는 소년」은 어떠세요? 선생님의 대표작으로 꼽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김  「북 치는 소년」도 사실은 죽음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어요. 사람들이 그 시에 나오는 “내용 없는 아름다움”이란 구절이 좋다고 해요. 난 떠오르는 이미지로 시를 쓰니까 그 의미를 분명히 설명할 수는 없어요. 다음에 이어지는 구절을 보세요. 가난한 아이에게 서양 나라의 아름다운 크리스마스카드가 왔단 말입니다. 이게 가능한 일입니까? 가공의 이야기지요. 가능하다 하더라도 그것은 의미 없는 일입니다. 가난한 아이에게는 과자 한 봉지가 필요한 것이지요. 아이에게 그것은 내용 없는 아름다움에 불과합니다. 어린 양들의 등성이에 반짝이는 진눈깨비도 마찬가지예요. 보통 사람에게는 이 장면이 아름답게 보이겠지만 양에게는 쓸데없는 일이지요. 양들은 건초 한 주먹을 더 좋아할 겁니다. 진눈깨비는 오히려 싫어할 걸요. 그러니 이것도 내용 없는 아름다움이에요. 그런데 사람들은 이 내용 없는 아름다움을 좋아합니다. 어떤 사람은 아름다움에 목숨을 걸어요. 이게 인간인 겁니다. 누구에게는 내용 없는 아름다움인데, 다른 누구에게는 죽음을 넘어서는 아름다움입니다. 이게 묘한 거예요. 그것을 시로 표현하고 싶었는데, 내 체질상 길게는 못 쓰겠고 진술은 피하고 싶고 그래서 그렇게 썼지요. 시를 거의 끝냈을 때 크리스마스 캐럴 <북 치는 소년>이 들려왔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제목으로 삼았죠.

 이  죽음과 관련해서는 「개똥이」, 「소년」, 「그리운 안니·로·리」, 「음악」, 「시체실」 등 아이의 죽음을 소재로 여러 편의 작품을 쓰셨는데, 그것들과 전쟁의 공포와는 구분되겠지요?

 김  내 시에 나타난 아이의 죽음은 사실은 아우의 죽음과 관련이 있습니다. 동생의 죽음을 대리적으로 표현한 게 많아요. 내 동생은 불쌍합니다. 나보다 열한 살 아래인데 평양에서 서울로 월남해서 같이 살다가 6·25때 같이 피난 갔고 22살에 세상을 떠났어요. 결핵을 앓아서 병약했지요. 이십 년 이상의 세월이 흐른 다음 「운동장」이란 시를 썼어요. 내가 열 몇 살쯤 되었을 때 어린 아우와 운동장에서 함께 놀다가 철봉놀이에 정신이 팔려 아우를 돌보지 않았더니 그 애는 혼자서 교문을 나가 울면서 어디론가 가고 있었어요. 뛰어가서 동생을 달랬지만 울음을 그치지 않고 좋아하는 것을 사 주어도 먹지 않았어요. 시간이 흘러 각자 성장하면서 그 일은 잊었는데 나중에 동생이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연민의 감정이 들 때마다 어릴 때의 그 장면이 자꾸 떠오르는 거예요. 마치 내가 큰 잘못을 저지른 것처럼 깊은 죄의식으로 가슴에 자리 잡았습니다. 어린 날의 그 일이 원인이 되어서 아우가 결핵이 걸렸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이십여 년 세월이 흘러 시상이 정돈된 다음에 시를 썼습니다. 시를 쓴 얼마 후 아우가 꿈에 나타났어요. 표정이 밝아 보여서 마음이 좀 놓였습니다.

 이  그와 비슷한 성격의 시가 「여수(女囚)」라는 작품 아닙니까? 이 작품은 동생과는 관련이 없고 선생님을 돌보던 보모와 관련된 작품이네요.

 김  맞아요. 많은 세월이 흘렀는데도 기억에 남아 사라지지 않기에 시로 썼지요. 그건 아주 어릴 때 다섯 살쯤의 일이라 기억이 흐릿해요. 흐릿하니까 오히려 시로 쓰기는 더 좋더군요. 진술을 피하고 이미지로 구성하기에 더 적합한 점이 있어요. 그때 나를 돌보던 보모를 따라 어떤 여인을 방문했어요. 우리 집이 평양 시내에서 꽤 여유 있게 살아서 보모를 둘 수 있었지요. 자혜병원이라는 큰 병원 앞을 지나는데, 얼굴에 나뭇가지 같은 것을 뒤집어쓴 이상한 복장의 여자들을 보았어요. 상당히 겁이 났습니다. 보모의 손을 꼭 잡고 빨리 걸어서 그곳을 벗어났어요. 우리는 얕은 울타리에 나무가 많고 가늘고 오뚝한 창문이 있는 벽돌집에 도착했어요. 그런 집은 그때 처음 보았던 것 같아요. 보모가 왜 나를 거기 데려갔는지는 전혀 모르겠어요. 아무튼 거기 어떤 어둑한 방에서 한 여인을 만나서 둘이 손을 잡고 반가워했어요. 내게 선물로 커다란 배도 주었죠. 그것이 사건의 전부인데 그 일이 잊히지 않고 떠오르는 거예요. 그래서 시로 썼죠. ‘여수(女囚)’라는 제목은 내가 본 장면의 전후 맥락을 이해한 다음에 붙인 것이에요. 오랫동안 마음에 담아두었던 내용을 시로 썼기 때문에 그 시도 잊을 수 없습니다.

 이  저도 그 시를 좋아합니다. 아까도 말씀하셨지만 선생님 시는 사실을 직접 서술하는 경우는 거의 없고 사건의 음영만 보여주면서 암시를 통해 거기 담긴 의미를 유추하게 하는 작법을 구사합니다. 그런 작법으로 선생님만의 독특한 개성을 확립하셨죠. 다른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선생님만의 세계를 창조하신 겁니다. 「여수」는 우리가 별생각 없이 겪었던 사건이 마음에 깊이 박히고 시간이 지날수록 그것이 운명의 마주침처럼 다가오는 그런 기이한 체험을 표현한 것이지요. 김춘수 시인은 선생님의 시에 대해 일찍이 ‘존재자로서의 근원적 슬픔’을 다루었다고 지적했어요.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가운데 생의 슬픔의 단초를 마주치게 되고 나중에 그것이 우리들의 존재 근거임을 발견하게 되는 그런 현상을 지칭한 것 같습니다. 선생님의 시는 분명히 그런 운명의 얼굴을 보여주고 있어요. 생의 불안한 그늘이 은밀하게 다가왔다 사라지지만 그것이 사라진 다음에도 그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는 씁쓸한 뒷맛을 남기는 사건들이 우리들 주위에 있지 않습니까. 전부들 잘난 체하고 살고 있지만 결국은 머리에 나뭇가지를 뒤집어쓴 죄수의 처지로 살 수밖에 없다는 불길한 예감,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인간 존재에 대한 연민을 나타냈다고 저는 읽고 있습니다.


 김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럴듯해 보이기는 하네요. 나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시를 쓴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그저 내 머릿속에 떠오른 영상, 잊히지 않는 기억, 그것이 내게 환기하는 느낌, 이런 것을 중심으로 시를 구성했어요. 나는 논리적 사고에 약한 사람입니다. 인간으로서 삼류죠. 그냥 마음을 움직이는 예술의 흥취에 매료되었을 뿐이고, 할 수 있는 일이 음악 편성이니까 밥벌이를 위해 그 일을 했고, 내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수단이 시밖에 없으니까 시를 쓴 것이지요.

 이  선생님의 육십여 년 삶을 되돌아볼 때 가장 행복했던 시기는 언제였습니까? 아까 「민간인」으로 현대시 작품상을 받으셨을 때 살아온 보람을 느끼셨다고 했는데 그때 가장 큰 행복감을 느끼셨나요?

 김  내 삶 전체를 놓고 생각하면 그런 만족감은 순간이에요. 내가 다른 여인과 사랑을 나눈 적도 있는데 그 기쁨도 순간이고 이별의 괴로움도 그 당장에는 죽을 것 같더니 시간이 지나니까 그것도 사그라집디다. 난 천성이 허무주의자예요. 연극 같은 세상을 살아서 그런지 모든 것이 덧없어 보여요. 그래도 내 일생에서 행복했던 때, 행복은 아니어도 마음이 편안했던 때는 일본 유학 시절이에요. 앞에서 말한 대로 우리 집이 유복했기 때문에 일본 생활에 부족한 것은 없었어요. 먼저 유학 와 있던 형이 학업을 마치고 귀국할 때 나는 대학에 진학하지 못했어요. 예술을 한답시고 음악과 문학을 넘보자 화가 난 아버지가 학비를 끊었어요. 남은 돈으로 생활하다가 생활비가 동나면 부두에 나가 노동을 했지요. 한창 젊을 때니까 힘이 있었습니다. 며칠 힘을 쓰면 일주일 생활비는 벌었어요. 고생을 한다고 엄살을 떨었더니 생활비가 다시 송금되었어요.
그때 난 일본의 첨단 예술을 체험했어요. 태평양전쟁 중이었지만 동경은 화려했어요. 중국을 반 이상 먹고 미국과 전쟁을 벌이는 강성한 나라였으니까. 세계의 최신 문물이 동경에 다 있었습니다. 거기서 세계 일급의 클래식 음악을 접하고 연극에 심취했지요. 순수 연극이 퇴조하고 전시 연극이 융기하는 상황이지만 예술가의 정신이라는 게 하루아침에 바뀌지는 않거든요. 세계 일급의 예술을 향유하면서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자유롭게 살았으니 그때가 제일 행복했지요. 난 민족의식 같은 건 없었어요. 일본말도 꽤 잘 해서 괄시 받지 않고 지낼 수 있었어요. 그렇지만 굴욕적인 태도는 보이지 않았고 평생 동안 남에게 해를 끼치는 일도 하지 않았어요.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 편에 서서 그들을 이해하려고 애썼습니다. 누구에게도 흠 잡히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내 길을 걸었어요. 일본이 전쟁에 패했다고 해서 귀국하여 남한의 서울이라는 데를 와보니 가관인 겁니다. 예술의 수준이 너무 낮은 거예요. 그래서 난 절망했지요. 취직할 생각도 안 했어요. 형이 사람 노릇 좀 하라고 국방부에 취직을 시켜 줘서 들어갔는데 다행히 음악 일을 맡겨서 흥미를 느꼈어요. 동아방송도 마찬가집니다. 방송 프로의 배경 음악이나 드라마 브리지를 맡았는데 잘 한다는 평을 받았어요. 음악에 대한 풍성한 이해가 몸 전체에 배어 있었기 때문이지요. 그 점에 대해서는 자부를 합니다.

 이  음악 분야에 대해서는 자신감이 있다는 말씀이신데, 시에 있어서도 저는 선생님의 시인적 자부심을 보게 됩니다. 선생님은 자신의 시에 대해 엉터리라고 내던져 버리듯 말씀하셨는데 사실 선생님 시를 면밀히 읽어 보면 그 내면에 상당한 자부심이 담겨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가령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에서 남대문 시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고귀한 인류이고 / 영원한 광명이고 / 다름 아닌 시인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이 말속에는 ‘시인=고귀한 인류=영원한 광명’이라는 등식이 설정되어 있습니다. 처음에 자신은 시인이 못 된다고 하셨지만, 결국 남대문 시장에 들어가 빈대떡을 사 먹음으로써 그들과 한 무리가 된 것이니까 선생님도 시인이 된 것이지요. 여기서 시인으로서의 자긍심을 발견합니다. 또 「한 골짜기에서」에서 앉은뱅이 한 그루의 나무가 잎새가 풍성하고 색채도 찬연하였다고 한 것도 시인의 초라한 외형에 대비하여 풍성한 내면을 나타낸 것 아닌가요? 「연주회」에서 거론한 “영원불멸의 인간다운 아름다움의 내면세계”는 음악에만 있는 것이 아니잖아요. 그것이 시에도 있다고 생각하니까 그런 구절을 언급한 것이죠. “요연한 유카리나무 하나”(「시작 노우트」)도 시의 경지를 상징한 것이고, “나의 본적은 푸른 눈을 가진 한 여인의 영원히 맑은 거울”(「나의 본적」)이라고 노래한 것도 그렇고, “인간을 찾아다니며/물 몇 통 길어다 준 일밖에 없다”(「물통」)고 한 것도 시인으로서의 맑은 지향을 염두에 둔 발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김  그렇지, 그런 자존심이 없다면 이 굴욕의 삶 속에서 어떻게 버틸 수 있었겠습니까? 다만 그것을 내세우고 싶지 않았던 것이지요. 그것은 내 삶이 현실적으로 보잘것없기 때문이기도 하고 내 스스로 현실에서 누락된 존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처음에는 예술의 영토를 지키려는 자긍심이 있었지만 내 힘으로 삶을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을 자각하면서 환멸의 허무감을 느꼈어요. 자멸의 피로감 속에서도 시에 대한 자긍심을 지키려고 나도 모르게 노력했던 것 같습니다. 어찌 보면 그 상반된 요소가 내 시를 이끈 동력일지 모릅니다. 얘기를 너무 오래 한 것 같아요. 몹시 고단하군요. 먼 길을 걸어 돌아가야 하니 이만 일어서겠습니다.

 이  네 선생님 살펴 가십시오. 이곳에서 다시 뵙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럼 안녕히.

이숭원
평론가, 서울여자대학교 명예교수, 1955년생
저서 『탐미의 윤리』 『몰입의 잔상』 『시 속으로』 『세속의 성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