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데뷔작
나는 불안하지 않다

- 2014년 《창작과비평》 신인소설상 수상작 「레바논의 밤」

  • 나의 데뷔작
  • 2021년 여름호 (통권 80호)
나는 불안하지 않다

- 2014년 《창작과비평》 신인소설상 수상작 「레바논의 밤」

 

「레바논의 밤」을 쓴 건 소설을 쓰겠다고 회사를 그만두고 대학원에 입학한 첫해의 여름방학이었다. 대학 졸업 후 출판사에서 해외문학 편집자로 일하던 나는 언젠가는 소설가가 되겠다는 희미한 계획을 현실화하기 위해 서사창작과 전문사 과정에 지원했고, 포트폴리오 제출과 영어 시험과 면접을 거쳐 어렵사리 합격 통지를 받은 후 대학원에 진학한 참이었다. 학기 중에는 일종의 연구실 겸 작업실인 전문사실에서 발제문도 쓰고 소설도 썼지만 여름방학이 되자 전문사실의 냉방이 제대로 되지 않아 도서관 열람실로 자리를 옮겨야 했다. 예술학교여서 그런지 다행히 도서관을 이용하는 학생이 많지 않아 해가 잘 드는 넓은 열람실을 나 혼자 독차지하는 날도 적지 않았다. 나는 근로장학금으로 생활비를 조금이라도 해결해보고자 방학 동안 열람실 대출대에서 2교대로 일하기까지 해서 그 무렵엔 하루 종일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내곤 했다. 매일 아침 개관 시간에 들어갔다가 폐관 시간이 되어서야 나왔는데, 하루의 반은 대출대를 지키고 나머지 반은 자리를 옮겨 내 작업을 하는 식이었다. 「레바논의 밤」을 읽은 사람이라면 이쯤에서 내 상상력이 얼마나 빈약한지 알아차렸을 것이다. 도서관에 앉아 머리를 굴리다가 결국 도서관을 무대로, 도서관 사서가 주인공인 소설을 써버리고 말았으니 말이다. 뭔가 흥미로운 이야깃거리가 없을까 고민하던 나는 주인공이 서가에 숨겨진 시체를 발견하며 시작하는 뻔한 탐정소설에나 나올 법한 도입부를 떠올렸고 그렇게 쓰게 된 소설이 바로 「레바논의 밤」이었다.

 

 「레바논의 밤」이 실린 소설집 『애호가들』   

소설가가 되고 나서는 어디서 영감을 얻느냐는 질문을 종종 받는데 그럴 때면 난감한 기분이 된다. 대답을 회피해 영감의 원천을 독차지하고 싶어서가 아니라(그럴 수 있다면 좋겠지만), 딱히 영감이라는 걸 받아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순서를 반대로 해서 완성된 하나의 소설에서 이야기나 사유를 촉발하는 무언가를 추출해내 어떤 소설을 바로 그 소설이도록 하는 특정 요소의 원형을 영감이라고 부르기로 한다면 이렇게 대답할 수는 있을 것 같다. 그것은 오는 것이 아니라 파헤쳐서 끄집어내는 것이라고. 적어도 내 경험으로는 그렇다. 그리고 (이것도 내 경우지만) 그렇게 파헤쳐서 얻어낼 수 있는 것도 별로 대단한 것들은 아닌 경우가 대부분이다. 중요한 건 ‘무엇을’이 아니라 ‘어떻게’이기 때문이다. 소설을 재현이라 본다면(나는 그렇게 본다) 어떻게 재현하느냐가 중요하지 무엇을 재현하느냐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다. 기발한 아이디어로 넘쳐나는 듯 보이는 이야기들도 사실 그것이 전개되는 과정과 방식이 흥미로운 것이지 일단 이야기가 진행되기 시작한 뒤에는 애초의 아이디어가 무엇이었든 그다지 중요하지 않게 되어버린다. 작가의 스타일, 사유, 인물이 생겨나고 나면 오히려 초기 아이디어는 나중에 얼마든지 대체되어도 무방한 것이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내가 도서관에 들어앉아서 창의적이지 못하게 도서관을 배경으로 벌어지는 일을 소설로 썼다고 해도, 크게 나무랄 일은 아닌 것이다…… (누가 뭐랬나?)

이러한 생각은 당연히 지금 내가 쓰고 있는 소설에도 해당되는데, 처음에는 나름 흥미로운 아이디어에서 출발했다고 여겨졌던 이야기가 실제로 진행되다 보니 그다지 창의적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고 해도 그 사실은 전혀 중요하지 않으며 중요한 건 그것을 어떻게 이야기하느냐,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재현되느냐라는 걸 나는 알고 있기 때문에 이 소설이 어쩐지 「레바논의 밤」처럼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손쉽게 발견한 소재에 (좋게 봐줘서) ‘약간’ 뻔한 느낌이 드는 이야기인 듯한 느낌이 나를 엄습하였다고 해도 지금까지 내가 쓴 소설들을 조금이나마 그럴듯하게 만들어준 내 내면의 무언가, 내가 살아오면서 쌓아온 문학적 태도랄지 정신이랄지 그런 것들이 이 소설을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게 할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나는 불안하지 않다. 불안하지…… 않은 것이다.

정영수
소설가, 1983년생
소설집 『애호가들』 『내일의 연인들』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