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후기
민족 언어 순화와 현대시의 세계화

영역 최동호 시집 『제왕나비』

  • 번역후기
  • 2021년 가을호 (통권 81호)
민족 언어 순화와 현대시의 세계화

영역 최동호 시집 『제왕나비』

 

 

번역은 언제나 곤혹스럽다. 한국 문학의 세계화라는 큰 프로젝트 앞에 놓인 난제들은 역자에게 엄청난 무게로 다가온다. 국제어, 유럽어에 비해 마이너 언어인 한국어가 가지는 한계, 고도로 정제된 시어의 함축성, 한국문학의 특수성을 통한 보편성의 발견 등은 언어와 표현의 문제와 긴밀한 관계를 갖는다. 언어의 고유성이 어떻게 한 민족의 언어의 한계를 넘어 국제적인 언어로 이해되고 읽힐 수 있으며, 특수성이 어떻게 보편성으로 심화, 확장될 수 있는가는 특히 마이너 언어권 작가들이 풀어야 할 과제이다.

지방 방언을 사용하여 자국 문학의 한계를 넘어 세계문학의 전범이 된 예를 단테에게서 찾을 수 있다. 단테는 당시 보편적인 지식인들의 언어인 라틴어가 아니라 피렌체 방언으로『신곡』을 썼다. 그것이 현대 이탈리아어로 정착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고, 민족의 언어를 넘어 세계적인 언어로 읽히는 데 크게 기여했다. 언어란 민족의 혼을 담고 있다는 점을 상기할 때 단테의 선택은 당시로서는 어렵지만 자연스러운 것이었으며, 이를 통해 폭넓은 자국민 독자층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는 무엇보다 지방 언어, 자국어의 순화를 통해 인간 영혼의 문제라는 심오하고 보편적인 주제로 발전시킨 고전적인 예이다.

“종족의 방언을 순화”해야 한다고 한 T.S. 엘리엇의 경우에서도 보듯이 민족 언어의 순화는 대부분의 작가들의 중요한 과제였으며, 한국 현대시사에서도 유사한 예를 찾아볼 수 있다. 한국 현대시는 1930년대 시문학파가 내세웠던 ‘민족 언어의 완성’이라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으며, 정지용, 김영랑 등이 개척한 이 명제는 청록파 박목월, 박두진, 조지훈으로 이어지고 이 흐름이 한국 현대서정시의 중심 줄기를 이룬다.

이번 번역 작품 선정에서 역자는 우선 민족 언어의 순화와 완성이라는 커다란 줄기를 이어가면서 고도로 순화된 언어로 우리 문학의 특수성을 보편적 주제로 발전시킨 최동호의 시에 주목했다. 그의 시는 정지용, 조지훈의 계보를 이으면서 서정시의 정수를 추구했다는 점에서 문학사적 의미를 갖는다. 난삽한 해체시가 유행하던 시절에도 최동호는 일관되게 서정시의 흐름을 잇고 발전시키는 데 집중한 한국의 대표적인 시인 중의 한 사람으로 이런 시인의 세계를 발굴하고 새롭게 조명할 때 한국 현대시가 세계화로 나아가는 큰 동력이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번역 대상 시집인 최동호의 『제왕나비』는 2019년 김삿갓문학상을 수상한, 저자의 50년에 걸친 시적 탐구의 최근 성과물로 문단에서 높이 평가되었다. 특히 저자의 불교적 상상력은 서양 시인들이 가질 수 없는 독자적 세계의 표현으로, 오히려 이 점이 세계 독자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중요한 지점이 될 것으로 기대했다.

그런 과정에서 외국문학 번역을 통한 문학과 문화의 국제화, 세계화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미국 텍사스주립대학 연계 출판사인 문두스아티움출판사(Mundus Artium Press)에 최동호 시인의 번역시 10여 편을 보내 출판 의향을 타진했다. 그 결과 최동호 시인의 시가 미국 독자들이나 세계 독자들에게 큰 흥미와 관심을 촉발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며 시집을 꼭 출판하고 싶다는 대단히 고무적인 출판 의향서를 받게 되었다. 다양한 미디어를 통한 특별한 광고홍보 전략도 가지고 있다는 내용도 덧붙여 있었다.

러시아문학을 전공하고 영화 <기생충> 자막 번역을 한 달시 파켓과 공역을 하기로 하고 본격적인 번역 작업에 들어가 초고를 만들고 약 4개월 동안 거의 매주 머리를 맞대고 작업을 했다. 때로 뛰어난 언어감각을 보여주기도 하여 시적 재능이 있는 것 같다고 했더니 사실은 시를 좋아하고 시를 쓰기도 한다며 부끄러운 듯 가방에서 트레이시 스미스(Tracy K. Smith)의 시집 『몸의 질문(The Body’s Question)』을 꺼내는 것이었다. 표지는 붉은색이었다. 얼굴이 시집 표지처럼 붉어졌다. 함께 미국시를 논하기도 하고 한국에서 시인으로 등단을 해보는 것이 어떠냐는 이야기도 나누면서 작업은 한결 속도감 있게 진행되었다. 여전히 풀리지 않는 문제들은 수차례 저자와 논의를 하면서 해결해나갔다. 이번 역시집은 주역자와 공역자, 그리고 저자 3인의 공동 역시집인 셈이다.

기대했던 대로, 출간된 『제왕나비(Monarch Butterfly)』는 발간 즉시 아마존에 소개되고 수많은 매체에 소개되어 좋은 평가를 받고 있으며, 아마도 불교적, 선적 상상력이 많은 독자들의 관심을 끌게 된 것 같다는 즐거운 소식을 출판사 측으로부터 듣게 되었다. 최동호 시인을 ‘한국시의 “제왕”’이라는 표제로 소개한 한 매체는 “특히 최동호의 극서정시가 그의 시의 중요한 특징이며, 간명하고 환기적인 강렬성은 숙련된 정신적 집중에서 나오는 것으로 이것이 독자들로 하여금 기왕의 관습을 벗어난 새로운 인식의 길로 안내한다.”라고 평하고 있다.

한국 불교 시의 심오한 깊이가 세계 독자들에게 전달되어 공감을 불러일으킨다면 한국문학의 특수성이 보편적 세계문학으로 나아가는 의미 있는 작업이 될 것 같아 내심 즐거우면서도 어깨가 무거워진다. 인간 부정, 생명 부정의 시대, 특히 오늘날 코로나19로 인해 우울한 분위기 속에서 인간을 존중하고 인간의 가치를 높이는 저자의 시가 세계 독자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줄 것이라 믿는다. 이를 통해 대산문화재단이 지속해 온 번역·출판 사업이 한국문학의 세계화를 선도하는 독보적이고 창의적인 사업으로 더욱 발전해나가기를 기대한다.

※ 영역 최동호 시집 『Monarch Butterfly(제왕나비)』는 재단의 한국문학 번역·연구·출판지원을 받아 필자와 달시 파켓의 공역으로 미국 텍사스주립대학 연계 출판사 문두스아티움출판사에서 2021년 출간되었다.

김구슬
시인, 번역가, 협성대학교 명예교수, 1953년생
영어시집 『잃어버린 골목길』(Lost Alleys), 루마니아어 시집 『아름다운 상처』(Frumuseti Fanite), 역시집 『대서양 연안에서 네루다와 함께』(잭 마리나이(Gjekë Marinaj) 저),
저서 『T.S. 엘리엇과 F.H. 브래들리 철학』 『현대영미시산책』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