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밭단상
③나는 당신을 경애해*

  • 글밭단상
  • 2021년 가을호 (통권 81호)
③나는 당신을 경애해*

스무 살 말의 겨울, 첫 문신을 했다.

“Lolita. 

Light of my life. Fire of my loins. 

My sin, my soul. Lo-li-ta.”

 

『롤리타』를 시작으로 고전을 읽기 시작했던 것 같다. 가물가물하지만, ‘롤리타’라는 제목을 인용한 ‘팬 픽션’을 읽고 원전에 대한 관심이 생겼던 기억도 있다. 그러니까, 시 쓰는 재진의 시작은 나보코프의 『롤리타』였던 것이다.

그래서 내가 주로 쓰는 것들이 사랑 시가 된 걸지도 모르겠다. 지독하게 미워하거나 지독하게 사랑해야 쓸 수 있다는 생각을 요즘도 종종 한다. 미움과 사랑은 결국 한끗 차이니까. 상대만 보면 심장이 빠르게 뛰고, 속에서 무언가 치솟아 오르고, 자기 전이면 불쑥불쑥 생각나고. 결국 관심의 문제인 것도 같다.

미워하는 것보다는 사랑하는 것을 쓸 때 조금 더 간절해진다. 영화 끝부분에서 죽어버리는 악당, 바다를 건너간 짝사랑, 차트 인에 실패하는 곡만 내놓는 아이돌. 돌려받을 것을 생각하지 않고 사랑하다 보면 첫 문장이 나온다. 그들에게 주고 싶은 마음을 덧붙이다 보면 시가 완성되기도 한다. 물론 가는 마음은 있어도 오는 마음은 없기 마련이라 글 말미엔 꼭 사랑에 실패한다는 묘사가 나온다.

그렇지만 욕망만 있고 해소는 없어서 멋진 서사가 있고, 짝사랑은 내가 없어야 비로소 행복해지며, 나의 아이돌은 꾸준히 앨범을 낸다. 그렇다면 그 사랑을 꼭 실패라고 말할 수 있을까. 성공은 아니더라도 완성은 된다는 생각이 든다.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지 못해서 모두가 기억하는 러브 스토리가 있기 마련이다.

물론 내 사랑을 전 세계가 기억하지는 않겠지만, 그러기는 불가능한 일이지만, 어쨌든 그것이 한 편의 시가 된다면 만족한다. 나는 계속 실패할 것이고 그 실패는 아마 시나 에세이나 혹은 일기장에 써야 할 만한 낙서가 될 테다. 물론 낙서에 그칠 법한 문장을 바꿔 시로 만드는 것이 시인이 해야 할 일이라고도 생각한다.

모든 세상이 알아줄만한 첫 문장을 쓰지는 못하더라도, 읽은 사람은 그거 좋았지, 하고 드문드문 떠올리는 글을 쓰고 싶다. 스무 살 겨울에 차가운 아크네에 엎드려, 진동하는 바늘이 등허리를 지나가는 것을 느끼며 성실하게 쓰자,라고 생각했다. 건강하기. 성실하게 쓰기. 언젠가부터 매번 하게 된 다짐이다.

모자란 천재는 없어도 뛰어난 범재는 있기 마련이라고 하면 너무 노인 같은가. 성실하게 쓰다 보면 누군가는 그 노력을 알아줄 것이라는 말은 노인조차 아니고, 이미 죽어 없어진 사람이나 했을 법한 말인 것 같다. 내가 사랑을 완성하는 방식은 늘 고리타분한 실패다. 그러니, 각기 다른 사람들을 죄 비슷한 방식으로 사랑하는 내가 고지식한 말 좀 한다고 뭐 큰일이라도 나겠는가.

슬픈 마음으로 완결되는 사랑을 위해, 촌스러운 방식의 충고밖에 하지 못하는 사람을 위해,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알지만 그럼에도 어딘가로 향하는 마음을 위해 쓴다. 멋있는 말을 하지 못하는 것이 부끄럽다고 생각하면서도 어떻게든 쓰는 것에 의의를 두려 한다. 사랑하는 일도 쓰는 일도 늘 고되지만 정말 싫었다면 하지 않았을 거다.

실패하기 위해 쓴다. 도무지 성공하는 법이 없다고 혼자 슬퍼할 빌미를 위해 쓴다. 슬프다 보면 또 무언가를 쓰게 될 것이고, 성공은 없어도 완성은 있는 법이니까. 꽉 닫힌 해피엔딩 대신 가장 보통의 열린 결말을 사는 사람의 이야기를 기록하는 사람도 있다고 생각하며. 기록해놓고 보면 아름다운 마음이 있고 악당은 착한 사람이 되겠다고 결심하다 끝난다. 오늘 밤도 아마 평범한 하루의 끝일 것이다. 그저 마음이 있는 하루 말이다.

서재진
시인, 제16회 대산대학문학상 시 부문 수상자, 1996년생
시 「극지의 밤」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