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①장수와 은희

  • 단편소설
  • 2021년 가을호 (통권 81호)
①장수와 은희

차는 공원묘지로 가는 진입로에 들어섰다. 진입로 우측 개천 너머에 연이어 있는 작은 공장들은 모두 폐업 상태인 것처럼 보인다. 아마도 주말이나 공휴일에만 이곳에 오기 때문에 그렇게 보일 것이다. 그와 대조적으로 개천가에 활짝 핀 개나리들과 꽃나무들은 생기가 넘쳐 보인다. 군데군데 보이는 벚꽃나무들도 제법 꽃을 피웠다. 연일 뉴스를 장식하는 코로나 상황에도 불구하고 들려오는 꽃소식은 반갑고 기다려진다.

“벚꽃은 다음 주면 완전히 다 피겠다.”

“오늘은 날이 날이니만큼 장모님 하시고 싶은 대로 두고 당신 괜히 또 이상한 소리 하지 마.”

남편의 당부에 나는 발끈했지만 아무 대꾸하지 않았다.

엄마는 몇 해 전부터 외할머니 묘를 처분해야 한다고 말해왔다. 우리 형제자매들은 그런 일을 해본 적도 없고 생각조차 해보지 않은 일이라 그리 귀담아듣지 않았다. 엄마의 주장은 가족들이 모일 때마다 지속되었다. 그러다 코로나라는 전염병이 전 세계를 뒤흔들었고 우리는 코로나 끝나고 좋은 날 잡아서 하자는 쪽으로 의견을 내었다.

코로나19는 기세가 꺾일 만하면 다시 살아나 일상을 암울하게 지배하고 있었다. ‘5인 이상 집합금지’라는 처음 겪어보는 규제가 발동되었다. 그런 위기 사태가 엄마를 더 자극했는지 엄마는 더 이상은 미룰 수 없다고, 벌써 몇 해를 미뤘다며 당신이 살아있을 때 해야 한다고 성화였다. 얘들아, 난 그것만 생각하면 잠이 안 온다. 내가 있을 때 해야지. 너무 오래 돼서…… 내가 안 하면 누가 하니?

설이 지나고 다행히 집합금지 조치는 직계가족 8인까지 허용하는 것으로 완화되었다. 결국 우리는 엄마의 성화대로 일단 관리소 측에 문의해 보기로 했다. 사실 이 일에 선뜻 나서기 어려웠던 이유 중 하나는 이장에 드는 비용이나 절차의 번거로움에 지레 겁을 먹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유로는, 할머니 묘는 엄마의 이복동생들이 주관해서 마련했던 것인데 그 이후로 왕래가 전혀 없어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는 상태이기도 했다. 그쪽과는 오래전에 할머니가 돌아가신 이후로 아예 연이 끊겼다.

엄마는 나달나달 해진 낡은 수첩의 한 페이지를 우리에게 내밀었다. ‘엄마 공원 자리’라고 쓴 흐릿한 글씨 옆에 몇 개의 번호들이 또박또박 적혀 있었다. 장모님은 글씨도 예쁘게 쓰시네. 관리번호 같은데 이걸로 되나. 남편은 그렇게 말하며 그 페이지를 휴대폰으로 찍고, 공원묘지 관리소에 전화를 걸었다. 관리 기한이 다 된 묘들은 화장해서 적당히 처분하게 해준다고 들었어. 엄마는 자신 있게 말했다. 일은 의외로 쉽게 진행되었다. 우리는 관리소 측과 협의해 이장할 날을 잡았다. 막상 쉽게 일이 되고 보니, 엄마는 상기된 얼굴로 진즉에 했어야 했다고 종주먹까지 쥐며 늑장을 부린 자식들을 힐난했다.

“납골당을 알아볼 걸 그랬나 싶어. 그렇게 그냥 한다니 왠지 좀…… 나라면 엄마를 그렇게 할 거 같지는 않은데.”

“어허, 이 사람이 또 그러네. 당신이 그런 소리할까 봐 내가 미리 얘기하는 거야. 당신 그럼 안 되는 거야. 이건 장모님이 결정해서 하시는 일이고 이미 돌이킬 수도 없는 일이야.”

남편이 언성을 높여 나는 가만히 있었다. 맞는 말이기도 하고 또 생각해 보면 할머니는 나를 예뻐하지 않았다. 내가 알게 뭐람. 언니들은 내가 엄마에게 잔소리를 할 때마다 엄마를 가르치려 든다고 눈을 흘겼다.

 

 

묘원은 한산하다. 이맘때 주말이면 성묘객들로 꽤 붐볐는데 오늘은 사람들도 차량도 거의 보이지 않는다. 더 이상의 매장지가 없을 정도로 봉분으로 가득 찬 묘원은 한산해서 그런지 꽃나무들과 무덤가의 형형색색 조화(造花)들로 지나치게 화려해 보인다. 며칠 미세먼지 농도가 높았는데 오늘은 상당히 대기가 맑다. 난 잠시 마스크를 내리고 숨을 들이마셨다.

엄마를 태운 막내의 차가 도착했다. 엄마는 이 하나뿐인 아들을 보기 위해 소불알을 삶은 물까지 먹었다. 외할머니가 저지른 터무니없는 만행이었지만 어찌 되었든 엄마는 아들을 낳았다. 엄마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 인생의 목표라고 말하는 아들이니 이쯤 되면 엄마는 성공한 인생이다.

자주색 투피스를 입은 엄마는 차에서 내려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엄마는 늘 그랬듯이 오늘도 곱다. 장모님만 한 미모의 딸들이 없다고 사위들은 입을 모아 엄마를 추켜세우곤 했다. 우리 자매들은 팔순 노인네가 아직도 미모에 신경을 쓴다고 엄마를 놀리기도 하지만 속으로는 그런 엄마를 자랑스러워한다. 나는 아이처럼 엄마를 부르며 뛰어가 얼싸안았다. 엄마는 웃으며 내 등을 쓰다듬었다.

“얘는 애가 없어서 지가 애기야.”

엄마한테 자주 듣는 말이다. 하나도 기분 나쁘지 않은 말. 아직도 엄마 가슴을 만지며 옆에 눕는 딸은 나 하나다.

가끔 애가 없다는 말은 엄마에게 억지를 부리는 시빗거리가 되기도 한다. 원인이야 어떻든 간에 내게 결핍인 것은 분명하니까.

관리사무소에 들러 일정과 절차를 확인하는 동안 언니들이 도착했다. 모임 제한 인원수에 맞추느라 여동생과 형부들은 참석하지 못했다. 코로나로 인해 오랜만에 보는 터라 나들이를 온 것처럼 우리 가족들은 서로 안부를 물으며 깔깔 웃었다. 인부들과 약속된 시간은 많이 남아 있었다.

“인부들한테 목욕값이라도 따로 줘야 하는 거 아냐?”

둘째 언니의 말에 엄마가 답했다.

“걱정 마라, 인부들한테는 내가 다 알아서 했으니까. 아마 다 삭아서 화장할 것도 없을 거야.”

“엄마도 참, 급한 일도 아닌데, 코로나 끝나고 해도 될 텐데…… 제대로 납골당을 준비할 걸 그랬나 봐. 왠지 좀 그래.”

내 말에 엄마는 눈을 흘긴다.

“딴 소리 마라. 나 죽으면 납골당은 또 어떻게 할 거니. 다들 그렇게 한다더라. 이거 해 놓으면 난 내 할 일 다 한 거다.”

그렇게 말하고 엄마는 조그맣게 숨을 내쉬었다. 엄마는 자기주장이라고는 거의 없는 사람인데 이번 일에는 단호했다.

 

 

할머니의 묘는 공원묘지 초입에 고즈넉하게 자리 잡고 있다. 그때만 해도 묘지가 부족했던 시절도 아니었고, 평생을 고생만 하다 돌아가신 할머니는 최초이자 마지막인 호사를 누리듯 꽤 넓은 자리에 모셔졌다. 조강지처를 버린 것에 대한 할아버지의 속죄였는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드디어 마침내 기다리고 기다리던 진짜 아내와 엄마를 호적에 모시게 된 그들의 잔치였는지도…… 할아버지와 그쪽 할머니는 검은 머리 파뿌리 되도록 오래오래, 우리 할머니보다 족히 30년은 넘게 잘 먹고 잘 살았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날은 무더위가 막 시작되던 때였다. 날짜는 기억하지 못해도 요일은 정확하게 기억한다. 일요일이었다. 원래 집안일은 할머니 몫이었는데 그날따라 아침부터 대청소를 요란스럽게 하셨다. 할머니는 욕을 달고 살았다. 그날도 할머니는 내게 눈물이 쏙 빠지도록 욕을 했다. 성질 고약한 사위 눈치 보느라 할머니는 욕도 이를 악물고 했다. 옷을 더럽게 입고 내놓지 않았다는 게 이유였는데, 나는 욕설이 일상인 아버지와 할머니가 무서웠다. 너무 무서워서 미워하지도 못했다.

할머니의 야단을 맞는 건 주로 나였다. 그런 내가 의식불명의 할머니를 엄마와 함께 모시고 병원에 갔다. 나는 아직도 그날 내가 병원에 가게 된 이유를 모르겠다고 언니들한테 말하곤 한다. 특별한 이유가 없다는 것을 나도 알고 있다. 내 의문의 방점은 사랑받았던 언니들이 안 가고 왜 만날 야단만 맞은 어린 내가 거기에 따라갔느냐는 데에 있다. 말하자면 나는 옛날을 들춰내면서 투정을 부리고 있는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태어나면서부터 실망을 안겨준 아이였기 때문인 것도 같다. 난 아들로 태어나기로 돼 있었는데 음양이 바뀌어서 딸로 태어났단다. 점쟁이의 말도 안 되는 변명이었지만, 딸 여섯 뒤에 아들을 본다는 그 점쟁이의 말대로 엄마는 결국 아들을 낳았다. 이 이야기도 알게 된 지 오래되지 않았다. 우리가 4녀 1남인데 어떻게 딸이 여섯이야 했더니, 엄마는 내 뒤로 하나 유산하고 여동생 뒤로 또 하나가 유산됐는데 그것들이 다 딸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아무튼 할머니는 여덟 식구의 가난한 살림을 도맡아 했고, 꾸중과 잔소리를 듣는 건 맨 가운데, 딱히 뭐 하나 잘 하는 게 없는 셋째 딸인 나였다.

그날 할머니는 피곤하다며 점심도 거르고 방에 들어가더니 어둑어둑해질 때까지도 나오지 않으셨다. 그날 아버지는 통닭구이 한 마리를 사 왔다. 귀한 간식이라 우리는 할머니도 부르지 않고 허겁지겁 먹어치웠다. 내가 할머니를 부르러 간다고 했을 때 아버지는 눈을 부라렸다. 만약에 그때 할머니를 깨우러 갔다면 할머니는 조금 더 오래 사실 수 있었을까. 할머니는 평소 낮잠을 자는 법이 없었다. 저녁때를 놓치도록 잠에 빠져 있다니 아무래도 이상해서 방에 들어가 보니, 할머니는 모로 누워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아무리 흔들어도 할머니는 깨어나지 않았다. 택시를 불러 엄마와 나는 할머니를 태우고 가장 가까운 영등포의 한 병원으로 갔다. 엄마는 택시 안에서 할머니를 안고 간헐적으로 엄마를 부르며 흐느꼈다. 나는 그 옆에서 처음 타보는 택시의 바깥 풍경을 힐끗힐끗 내다보았다.

 

나는 그날을 선명하게 그러나 흑백으로 기억한다. 날은 어두웠고 처음 타보는 택시도 어두웠고 병원의 응급실도 어두웠다. 환자들이 없었던 것으로 보아 응급실이 아닌 진료실이었던 것도 같다. 아무튼 내 기억에 그날의 한 장면으로 아로새겨진 것은 서늘한 먹빛의 병실과 그 어둠 속에서 차갑게 빛나던 은빛 철제 침상이다. 할머니는 늘 보던 모습 그대로, 꾀죄죄한 마고자에 낡은 옥색 치마를 입고 눈을 꼭 감은 채 침상에 누워 있었다. 할머니가 추울 거라는 생각이 들어 덮을 것을 찾았던 기억도 난다.

미간이 펴질 날이 없었던 할머니의 얼굴은 거의 찰흙 빛이었다. 발목까지 내려온 낡은 치마 아래로 누런 흙빛의 맨발 두 개가 벌어져 있었다. 엄마는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할머니의 팔다리를 주물렀고 나는 병실의 냉기에 코를 훌쩍였다. 한참 만에 나타난 젊은 의사는 가운 주머니에 꽂혀 있던 볼펜을 꺼내더니 그것으로 할머니의 양 발바닥을 사정없이 북북 그어댔다. 할머니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눈을 뒤집어보고 의사는 사망 판정을 내렸다. 엄마는 오열했다. 그날 밤 나는 초경을 시작했다. 그래서 더 기억이 강렬한지도 모른다. 그날의 할머니는 내가 겪은 최초의 죽음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때 처음으로 아버지의 눈물도 보았다. 장례식을 다녀온 날, 아버지는 석양이 쏟아지는 한여름의 방 안에서 혼자 땀을 뻘뻘 흘리며 울고 있었다. 난 그때 적잖이 놀랐었다. 아버지의 눈물은 생각해 본 적도 없었고, 노골적으로 외할머니를 타박한 아버지였기 때문이었다. 딸네 집에 얹혀사는 할머니는 아버지의 눈치를 살피고 비위를 맞췄다. 그러나 가난한 살림에 걸핏하면 하나뿐인 딸을 잡는 팍팍한 사위의 성미에 두 분 사이는 결코 좋을 수가 없었다. 그런 두 분이 죽어서 같은 묘원에 있다. 아버지는 할머니가 계신 이 공원묘지가 맘에 들었는지 죽어서 여기 묻히고 싶다고 여러 번 말해왔다. 엄마를 배려한 것이기도 해서 우리는 아버지를 꼭대기 전망 좋은 자리에 모셨다. 나중에 엄마가 들어갈 합장묘라 했는데 자리는 아주 작았다. 성묘 때마다 우리가 엄마도 저기 가셔야 한다고 하면 엄마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죽어서도 아빠를 못 벗어난다고 놀리면 그제야 엄마는 배시시 웃었다. 아무튼 아버지 덕분에 우리는 할머니도 잊지 않고 찾아뵐 수 있었다.

당시 우리집은 심하게 쪼들리고 살던 때라 할머니의 장례를 치를 형편이 아니었다. 엄마는 그나마 소식을 주고받던 이복동생에게 할머니의 부음을 전했다. 병원비부터 장례식장, 장지까지의 모든 비용을 그쪽에서 부담했다. 부담이 아니라 당연히 그쪽에서 주관했다. 그래도 우리 형편이 되었다면 엄마는 그쪽 사람들을 부르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아버지의 눈물에는 무능한 자신에 대한 자괴감과 장모에 대한 연민과 회환이 뒤섞여 있었을 것이다. 혹시 그날 통닭을 드시라고 할머니를 부르지 않았던 자신의 치졸함에 대한 부끄러움도 섞여 있었을까.

 

“엄마, 나 왔어.”

엄마는 여기 올 때마다 작은 소리로 그렇게 말하며 봉분을 살폈다. 엄마가 부르는 엄마 소리는 낯설고 애처롭다.

봉분에는 뗏장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지난번에 봤을 때보다 무덤은 훨씬 더 내려앉은 것 같다. <安長壽之墓>.

비석에는 할머니 이름 안장수만 새겨져 있다. 그 이름 석 자마저도 세월에 씻겨 간신히 알아볼 정도다. 생몰 연대도, 자식 이름도 없는 낡은 비석의 여백이 새삼스럽게 눈에 들어온다. 평생 고생만 하다 간 우리 장수 할머니. 이름에 맞지 않게 할머니는 환갑을 넘기자마자 낮잠을 자다 돌아가셨다. 잔치는 칠순 때 하기로 했는데, 가뿐히 환갑을 넘긴 할머니는 달콤한 잠에 빠져 돌아오지 못했다. 우리 식구들은 할머니를 이야기할 때마다 할머니의 유일한 복은 주무시면서 돌아가신 거라고 입을 모으곤 했다.

“너무 매정하지 않아? 이 비석에는 아무것도 안 써 있어.”

그러네. 내 말에 언니들도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쪽 입장도 그렇지 않았겠니…… 할아버지의 처라고 새길 수도 없고, 그 삼촌네 엄마는 결혼해 같이 살면서도 호적에도 못 올라가고 첩으로 산 거잖아. 할머니가 죽어서야 그 엄마가 호적에 올랐으니 거기들도 왜 한이 없겠어. 호적에 지들 엄마 이름 대신 할머니 자손들로 여태 올라가 있었는데 비석에 뭘 새기고 싶었겠니. 그러고 보면 저 묘가 호적 값이야.”

“그건 알겠는데 엄마 이름은 왜 없냐구, 생몰 연도라도 새겼어야지.”

우리 대화를 듣고 엄마가 정색을 하며 말했다.

“얘네들이 별 얘기를 다하고 있네. 그런 소리들 말어. 다들 할 만큼 했어.”

할머니는 헛고생만 하다 가신 것은 아니다. 평생을 온 힘을 다해 싸우고 있었다. 호적상으로 할머니는 그 집안의 아내이자 이복형제들의 엄마였다. 아마도 그쪽에선 애가 많이 탔을 것이다. 엄마에게 아버지와 이복동생들이 할머니를 설득해달라고 애원도 하고 으름장도 많이 놓았으리라. 할머니는 말 그대로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지’ 이혼을 거부했고 결국 돌아가셔서야 호적의 자리를 내주었다. 나는 그런 할머니의 사연을 잘 알지도 못했고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도 거의 없었다. 잔칫상 한번 받아보지 못하고 가신 소박데기 할머니. 낮잠을 주무시다 세상을 하직한 것이 유일한 복이었던 우리 장수 할머니. 우리는 조금 전에도 할머니 인생이 너무 불쌍하다고, 그나마 그렇게 편하게 가셔서 너무 다행이라고 말했다. 정말 그럴까. 외할머니의 삶은 정말 박복 그 자체였을까.

장례를 끝내고 할머니가 쓰던 반닫이를 정리하면서 엄마는 눈물을 훔쳤다. 제대로 된 옷 한 벌이 없었는데, 낡은 옷가지 틈새에서 돈 몇 만 원과 무명 손수건에 곱게 싼 아기 금반지가 하나 나왔다. 달러 빚을 내던 암울한 시기여서 그것들을 발견한 엄마는 눈물 자욱이 번진 얼굴로 너무도 좋아했다. 손수건 속에는 아기 사진도 들어 있었다. 돌 사진 같았는데, 증명사진 크기의 작은 흑백사진 속에서 양 주먹을 꼭 쥔 아기가 동그랗게 뜬 눈으로 우리를 보고 있었다. 엄마네. 우린 그렇게 말했고 할머니가 남긴 유품을 기쁘게 처분했다. 그 사진을 엄마는 아직도 갖고 있을까.

우리는 할머니에 대한 새로운 사실들을 알게 되었다. 할머니가 절에 다니셨다는 것이다. 내 기억으로는 살림을 도맡아 하느라 할머니는 집에만 계셨다. 이웃집 할머니와 동네에서 잠깐잠깐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것 외에는 외출하는 것을 거의 본 적이 없는데 절이라니. 할머니는 절에 가서 어떤 기도를 드렸을까. 어쩌면 소박데기 할머니는 우리 생각보다 그리 불행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인생의 목표가 뚜렷하게 있었으니까. 할머니는 엄마를 지키고 호적의 자리에서 버티는 것이 삶의 목표이자 과제였을 것이다. 오래전에 할머니가 해준 이야기가 생각난다. 꿈에 삼신할미가 둘씩이나 나와서 딸 하나나 잘 건사하라고 했다고. 그러면서 할머니는 흐물흐물 웃었다. 그게 언제 적에 들은 이야기인지 가물가물하지만, 맞다. 할머니가 웃은 적도 있었다.

인부들이 오기 전에 우리는 간단한 제사상을 차렸다. 사과와 배, 그리고 떡을 올렸다. 막내가 엄마에게 상자를 내밀었다. 한복 상자다. 엄마는 그것을 조심스럽게 열어 무덤 앞에 펼쳐 놓았다. 분홍색 저고리와 치마가 얌전히 상자 속에 누워 있다. 그 순간 엄마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난 엄마한테 옷 한 벌을 못해줬네. 왈칵 눈물이 나오려 한다.

엄마는 할머니에게 절을 올렸다. 교회에 다닌 이후로 엄마는 성묘 와서 절을 드린 적은 없었다. 엄마는 한참을 엎드려 일어나지 않았다. 우리들도 다 같이 할머니께 마지막 절을 올렸다.

보름 전, 엄마는 열무김치를 담그러 우리집에 왔었다. 이번에 확실히 배워서 다음엔 내가 엄마 해드릴게. 나는 그렇게 말하고 엄마를 모셔왔었다.

밀가루 풀을 쑤다 말고 엄마가 말했다. 난 엄마한테 옷 한 벌을 못해줬네.

느닷없는 엄마의 말에 나는 설거지를 하다 말고 엄마 쪽을 돌아보았다.

그것이 무슨 말인지는 금방 알았지만 나는 못 들은 척, 가스레인지 앞에 서서 고개를 숙인 채 휘적휘적 주걱을 젓고 있는 엄마의 옆얼굴을 힐끗 보았다. 마치 엄마에게서 뒤늦은 자백을 받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내 대꾸를 바란 것도 아니겠지만 한동안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뭔가 마음이 복잡했다. 설거지를 끝내고서야 나는 뒤에서 엄마를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아이처럼 말했다. 난 엄마 옷 많이 사줬지? 거 봐, 나는 엄마한테 잘 하잖아. 나는 속도 없이 엄마의 염장을 지른 셈이다.

우리 엄마는 좀 달라. 다른 이들에게 엄마에 관해 말을 할 때면 나는 늘 첫 입을 그렇게 떼곤 했다. 어떻게 말을 풀어야 할지 난감해하다 정작 하는 이야기라곤 무심해,라거나 울 엄마는 아직도 미모에 관심이 많다는 말 정도에 그쳐버렸다. 이건 아닌데, 좀처럼 당신을 설명할 수가 없다. 엄마를 말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들 중의 하나인 것 같다. 가끔 엄마랑 다투고 나면 나는 남편한테 절규하듯이 말하곤 했다. 우리 엄마는 어떻게 표현을 할 수가 없어.

엄마는 말이 없는 사람이다. 그것이 엄마의 남다른 점이라는 것을 나는 최근에 깨달았다. 엄마는 자기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남 이야기도 하지 않는다. 자랑하는 법도 모르고, 어려웠던 시절의 재미있는 일화나 서러웠던 일 따위를 말하는 것을 거의 보지 못했다. 말주변이 없는 것도 사실이다. 가끔 상대방의 감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말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할 때가 있다. 남편은 장모님의 그런 점이 좋다고 하는데, 그런 얘기를 옆에서 듣고 있을 때도 엄마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는 듯이 새치름한 표정으로 꼿꼿하게 앉아 있곤 한다.

그런 엄마에게서 엄마의 엄마, 그러니까 외할머니의 이야기를 듣는 일은 거의 없었다. 불행했던 시절의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은 것도 이유겠지만 - 이것도 나의 예단인지도 모른다. 엄마는 그런 감정 표현의 단어를 말한 적이 결코 없으니까 - 나는 그것을 어려서부터 눈칫밥을 먹고 살아서 절로 습득된 자기방어의 일종이라고 규정짓곤 했는데, 사실 내 마음에는 엄마에 대한 애정 결핍 같은 고약한 마음이 도사리고 있어 종종 엄마를 향한 공격의 날을 세우곤 했다. 어쩌면 엄마와 같이 살려고 했던 것도 가슴 한편에 깔려 있는 그런 뒤틀린 심사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한동안 엄마는 우리집에서 지냈다. 노년의 전원생활을 꿈꾸던 아버지는 강화도에 집을 마련하고는 일 년도 채 지내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엄마는 그 집에서 무서워서 도저히 혼자서는 지낼 수 없다고 했다. 사흘이 멀다 하고 무성하게 자라나는 잔디도 지겹고 텃밭 가꾸기도 힘들다고 엄마는 매일 우는소리를 했다. 집이 팔리고 엄마가 새 거처를 마련할 때까지라는 조건으로 엄마는 우리 집에서 살게 되었다. 그 제안을 먼저 해준 남편이 고마우면서도, 나는 딱 그때까지만이야 라는 말을 남편에게 여러 번 못 박았다.

솔직히 나는 엄마랑 지낼 생각에 들떠 있었다. 엄마를 독차지하겠군. 그런 생각조차 들었다.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는 엄마는 전적으로 아버지 차지였다. 아버지는 늘 엄마가 옆에 있어야 했다. 엄마는 평생을 아버지의 과한 애정에 시달렸다. 그 애정의 다른 이름은 의심을 수반한 집착이다. 아버지는 일가를 이룬 우리들 앞에서 나한테 남은 건 니들 엄마 하나뿐이라고, 내가 다른 건 다 실패했어도 가정 하나만은 지키려한다고 피를 토하듯 말한 적이 있다. 그때가 엄마가 아버지랑 싸우고 처음으로 딸네 집에서 며칠 지낸 날이다. 아버지는 며칠을 엄마랑 찍은 사진들을 들고 다니면서 엄마를 찾아다녔다. 내가 평생 한 일이라곤 당신을 기다린 것밖에 없네. 돌아가시기 전에 아버지는 엄마에게 자주 그렇게 말했다. 그러고 보면 아버지는 외할머니와 같은 목표를 지닌 셈이다. 엄마를 지키는 것이 가정을 지키는 것이었을 테니까.

엄마랑 나는 함께 지내면서 많이 다투었다. 엄마가 이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존재라서 그렇다고는 하지만 나는 한동안 돌아가신 아버지가 빙의한 것이 아닌가라는 터무니없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엄마를 들볶고 닦달했다. 싸움의 발단은 늘 말 한마디였다. 아마도 어린 시절의 기억 때문일 것이다. 나는 아빠가 엄마를 죽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가득 찬 유년시절을 보냈다. 성년이 되어서야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엄마는 아버지보다 훨씬 강한 사람이다. 아버지에게 엄마는 유일하게 남은 지켜야 할 대상이었고 욕망이었다. 엄마는 아버지의 그런 마음에 무심했다. 이 표현도 적당하지 않으리라. 엄마는 아버지의 곁을 떠나 있던 적이 결코 없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내 것이 되지 않는 엄마의 무심함에 아버지는 평생 안달복달이 났던 것이다. 물론 그것은 전적으로 아버지의 폭력일 뿐이다. 온전한 내 것이 될 당신이 세상에 어디 있을까. 그런데 엄마랑 살면서 아버지가 엄마한테 했던 애정의 폭력을 내가 행사하고 있었다.

난 옛날 일을 끄집어내면서 엄마를 추궁하곤 했다. 시작은 악의가 없었다. 도란도란 어려웠던 시절 얘기를 하면서 이젠 먹고 싶은 거 먹고, 입고 싶은 거 입을 수 있는 현재를 감사하자는 취지이거나, 보잘것없던 내가 이렇게 엄마를 돌보고 있다는 생색내기 정도였을 것이다. 그런데 그러다 보면 ‘그때 엄마 왜 그랬어’가 튀어나왔다. 물론 엄마는 그런 일들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고, 결국 눈물을 보이는 건 나였다.

엄마랑 다툴 때 내 마지막 말은 언제나 같았다. 엄마가 할머니한테 한 걸 생각해 봐. 그 말이 얼마나 잔인한 말인지 알면서도 나는 그 말을 아직도 놓지 못했다. 사위 눈칫밥을 먹으며 부엌데기로 생을 마감한 할머니를, 나는 엄마의 약점이라도 잡은 듯이 툭하면 들이밀었다. 엄마에 비하면 나는 얼마나 엄마한테 잘하느냐, 엄마 사위가 얼마나 잘하는데 엄마는 어쩜 말을 그렇게 본새 없이 하느냐는 식이었다. 엄마는 내 화풀이에 거의 반응하지 않았다. 그런 무심함과 무반응이 돌아가신 아버지의 화를 더 돋게 했던 것은 분명했다. 잠 못 자는 사람은 아버지였고 엄마는 그 옆에서 잘도 잤다. 물론 화해를 청하는 사람도 늘 아버지였고, 그 성미를 닮은 나 역시 미안해서 아이처럼 엄마 품을 파고들곤 했다.

나는 엄마를 쉽게 놔주지 않았다. 집이 팔리고서도 거의 한 계절을 우리 집에 계시게 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제일 먼저 청바지를 사 입은 엄마는 혼자서 자유를 누리고 싶어 했다. 전혀 남들과 어울릴 것 같지 않게 생긴 엄마는 놀라울 정도로 활동적이었다. 그동안 숨이 막혀서 아버지랑 어떻게 살았나 싶을 정도로 열심히 외출했다. 엄마는 교회는 물론이고 노인대학, 복지관, 경로당 등등 노인 활동의 모든 거점에 이름을 올렸다.

 

세 명의 인부들이 도착했다. 우리는 분주히 탈상을 했다. 인부 중 하나가 개장 작업에 앞서 과정을 대략 설명해 주었다. 과정은 생각보다 간단했다. 파묘를 해서 유골을 수습하고 분골을 하면, 그 뼛가루를 갖고 우리가 공원묘지 뒤 숲으로 가서 적당한 나무를 골라 묻으면 된다고 했다.

바로 파묘가 시작되었다. 나는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무덤이 열리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오랜 세월에 주저앉은 무덤은 삽질 몇 번에 쉽게 열렸다. 얼마 걸리지 않아 누런 뼈들이 보이기 시작했고 인부들은 조심스럽게 흙을 털어내며 유골들을 수습하기 시작했다. 아주 깨끗하게 육탈이 되었다며 우리에게 들어 보였다.

나는 관이 있으리라고 생각했기에 바로 유골이 나타나 놀랐다. 나도 모르게 “어머, 관이 없네”라고 했더니, 엄마는 관은 오래돼서 다 썩어서 없어졌을 거라고 했다.

“원래 시신만 매장하는 게 더 깨끗하게 잘 썩어요.”

우리가 하는 말을 들었는지 한 인부가 나를 보며 그렇게 말했다. 인부의 말에 얼굴이 화끈거렸다.옆에서 남편이 매장할 때 탈관을 하기도 한다고 말하자, 나는 그런가 보다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칠성판에 놓인 할머니의 유골들을 우리는 말없이 바라보았다. 어른 유골이 아니라 아이의 것 같았다.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에 칠성판에 깔아놓은 한지가 파닥거렸다. 햇볕을 받은 작은 두개골은 웃고 있는 것 같았다. 엄마는 손에 들려 있던 한복 상자를 인부들에게 내밀며 태워달라고 말했다. 인부들이 오기 전에 막내가 한복을 어떻게 할 거냐고 물었을 때 엄마는 선뜻 답을 하지 못했다. 옆에서 언니들이 아깝다고 했을 때도 망설이는 기색이었다.

인부는 상자에서 분홍 저고리와 치마를 꺼내 들어 보며 말했다.

“완전 새 건데요. 아주 곱네요. 근데 이건 집에 가셔서 따로 하셔야……”

“따로 어떻게…… 아이, 못해요. 그냥 여기서 같이 해 주세요.”

인부는 엄마의 간곡한 말에 잠깐 망설이더니 곧 치마저고리로 유골들을 감쌌다. 분홍 보자기에 싸인 유골들은 작은 화기로 옮겨졌고 인부는 토치로 불을 붙였다. 불은 활활 타올랐고 금세 재가 날리기 시작했다. 나는 눈을 감고 분홍 꽃비가 날린다고 생각했다.

오래된 유골이라 엄마 말대로 화장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뜨거운 열기만 빠지면 곧 분골이 시작된다고 했다. 인부는 우리에게 시간이 좀 걸리니 다른 데서 잠깐 시간을 보내고 오라고 했다.

우리는 막간을 이용해 아버지께 다녀올까 하다 왠지 양쪽에 도리가 아닌 것 같아 아버지 성묘는 이쪽 일이 다 끝나면 하기로 하고 휴게소 쪽으로 이동했다. 휴게소 정자는 코로나 때문에 출입금지 테이핑이 되어 있었다. 마땅히 앉을 곳이 없어 차에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우리 딸들은 엄마가 있는 차에 모여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다.

 

“이모는 건강이 좀 나아지셨나?”

“언니는 오래 못 버틸 거 같아. 딱해.”

엄마가 침울하게 말했다.

엄마가 언니라 부르는 사람은 엄마의 사촌, 그러니까 큰집의 따님이다. 엄마랑 친동기 간처럼 지냈다고 하는데 독실한 기독교인이다. 예전부터 이따금 걸려오는 이모 전화를 내가 받으면 이모는 내 목소리가 엄마랑 비슷했는지, 매번 “은희니?”라고 다정하게 말했다. 이모가 부르는 은희라는 이름은 뭐랄까, 아련하고 아득한 느낌을 주곤 했다. 엄마에게도 이름이 있지. 이름을 가진 것들은 모두 비밀을 갖고 있다. 아무리 다가가도 끝내 닿을 수 없는 진실 같은 것…… 은희는 어떤 비밀을 간직하고 있을까.

나는 지금도 이모를 생각하면 엄마의 이름을 부르는 그 목소리가 제일 먼저 떠오른다. 엄마가 교회를 다니고 싶어 한 것도 독실한 기독교 집안인 큰집에서 자랐기 때문인 것 같다. 어쩌면 엄마의 가장 그리운 시절은 아현동 큰집에서 이모와 함께 보낸 시기인지도 모른다. 이따금 엄마는 여고시절에 배운 왈츠 가락을 흥얼거리며 춤추는 시늉을 하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행복해 보였다.

“엄마랑 할머니는 언제부터 큰집에서 살게 된 거야?”

내 말에 엄마는 6.25 나고 나서라고 간단히 대답했다.

엄마는 할머니와 함께 큰집, 그러니까 아버지의 형님 댁에서 결혼할 때까지 살았다. 엄마로부터 직접 이야기를 들은 적은 없고 단편적으로 주워들어 구체적인 사연을 알지 못했다. 엄마 얘기는 우리가 추정하고 있던 시기와는 많이 달랐다. 우리는 할머니가 혼인한 지 얼마 안돼서 할아버지에게 소박을 맞고 쫓겨난 것으로 알고 있었다. 우리는 이구동성으로 엄마에게 도대체 왜 할머니는 쫓겨난 거냐고 물었다. 이렇게 모여서 엄마에게 대놓고 물어본 적은 처음이었다.

“오빠가 둘 있었대.”

할머니의 유일한 외동딸인 줄로 알았던 엄마에게 오빠가, 그것도 둘이나 있었다니. 그런데 그다음 말은 더 놀라웠다.

“둘 다 죽었어. 할머니가 약을 먹였는데, 그게 잘못돼서……”

“무슨 병이었는데? 엄마 몇 살에? 그게 할머니 때문이야? 할머니가 죽였어?”

우리가 너무도 관심을 보이며 캐묻자 엄마는 괜한 소리를 했다고 생각했는지 더 이야기를 하려고 하지 않았다.

“엄마, 엄마의 문제는 말을 하지 않는다는 거야. 왜 가슴에 묻어만 두고 있어? 이젠 얘길 해야지. 지난 이야기들 하면서 사는 거야. 그래야 맺힌 것도 풀리지.”

큰언니의 말에 엄마는 싫은 기색을 하며 몸을 틀었다. 그러고는 한참 입을 다물고 있더니, 중얼거리듯 말했다.

“나도 다 들은 얘기지. 살리려고 그랬대. 그때는 어려서들 많이 죽었어. 약이 귀하니까. 시골 사람들 뭐가 좋다 그러면 다 먹였지.”

엄마 이야기를 종합하면 큰아들은 불알이 기형적으로 컸는데, 그 병에는 망건을 먹이면 낫는다고 해서 할머니가 그걸 끓여 아들에게 먹였는데 바로 죽었다는 것이다. 둘째도 무슨 병이었는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두 번째 아들 역시 할머니가 무언가를 먹였다는 것이다. 첫째는 돌도 지나기 전이었고 둘째는 돌은 넘겼다고 했다.

“그게 얼마나 독한지 바로 까무러치더니 죽었대.”

엄마는 그렇게 말했다.

“망건이면 옛날 사람들 머리에 쓰는 거잖아. 하긴 할머니는 엄마한테 소불알 삶은 물도 먹였잖아. 근데 그런 얘기를 누구한테 들었어?”

“엄마한테…… 어려서 들은 얘기라 이젠 다 잊어버렸어.”

엄마는 맥없이 그렇게 말했다.

할아버지에게 다른 여자가 있었다는 게 가장 큰 이유였겠지만 두 아들을 죽게 한 것이 할머니가 쫓겨나는 명분이 되었다고 한다. 엄마가 태어나기 이전에 일어난 일이다. 이후 할아버지는 큰집과 함께 서울로 이사를 가서 새살림을 차렸고 할머니와 갓난쟁이 엄마는 시골에 남겨졌다. 그리고 또 세월이 지나 6.25 때 모녀는 시골로 피난 온 큰집 식구들과 다시 만났다. 서울로 돌아갈 때 큰 아버지는 동생이 버린 제수씨와 조카딸을 함께 데려갔고 그때부터 모녀는 아현동 큰집에서 지내게 되었다.

“그래도 아버진데 가끔 봤을 거 아냐. 할머니 장례식 때도 봤겠지. 그때 보고 한 번도 못 봤나?”

내 말에 엄마는 인상을 쓰고 도리질을 쳤다. 못 봤다는 것인지 말하기 싫다는 것인지 알 수 없으나, 그만하라는 신호다.

아비 이야기만 나오면 엄마는 도리질을 쳤다. 엄마는 할아버지, 그러니까 부친의 임종 소식에도 문상을 가지 않았다. 이모에게서 연락을 받았을 텐데 그때도 엄마는 도리질을 쳤다. 거길 뭐 하러 가. 아내와 딸을 버린 아비에 대한 원망의 표현 따위는 엄마로부터 들어본 적도 없지만 우리는 당연하게 엄마의 도리질을 받아들였다. 엄마는 아버지를 거의 만난 적이 없는 것 같았다. 엄마를 뱃속에 든 채로 할머니가 쫓겨났다고 하니 태어날 때부터 아비는 없었다. 엄마도 대단하지만 그분도 대단하네. 하나밖에 없는 예쁜 딸인데 안 보고 싶었을까. 언젠가 내가 그렇게 말했을 때도 엄마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큰집이 아현동에서 큰 약방을 했어. 그 냄새가 아직도 기억나. 죽기 전에 거기 가보고 싶다. 너네 동네잖아.”

엄마가 내게 말했다.

“그래 엄마, 다음에 한번 같이 가보자. 한복 예쁘더라. 나중에 엄마도 해줄게.”

시간이 꽤 지나 있었다. 우리가 다시 올라갔을 때 인부는 유골을 쇠절구에 빻고 있었다. 왠지 그 광경을 지켜보기가 민망했다. 그래서 우리에게 다른 데 가 있으라고 했나 보다고 큰언니가 소곤거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작업이 끝났다. 인부는 가루가 된 유골들을 봉지에 담고 한지로 차곡차곡 접어 엄마에게 내밀었다. 어른 손바닥만 한 그것은 따뜻했다. 우리는 인부들과 인사를 나누고 그들이 알려준 묘원 뒤편의 숲으로 들어갔다.

소나무와 신갈나무들이 어우러진 숲은 울창했다. 쭉쭉 뻗은 나무들 사이로 산진달래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수목장이네. 남편은 그렇게 말하며 앞장서서 나무를 골랐다. 엄마는 너무 깊이 들어가지 말라고 소리쳤다.

“아, 이 나무 괜찮네요.”

남편은 나무 한 그루를 가리켰다. 둥치가 굵고 곧게 뻗은 소나무였다. 햇볕이 잘 드는 곳이라 좋아 보였다.

우리는 온기가 남아 있는 뼛가루를 소나무 아래 땅을 파고 묻었다.

“기억해 둬, 이 나무. 아버지 성묘 올 때마다 들러야지.”

내 말에 엄마는 그럴 필요 없다고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이제는 다 끝난 거다. 아버지한테 가봐야지. 해지기 전에.”

엄마는 그렇게 말하고 앞장서서 숲을 나갔다.


그날 밤 나는 설핏 할머니를 보았다. 빨간 수가 놓인 겨울 배자에 까만 조바위를 쓴 할머니가 나무 아래 서서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잠결에 그런 모습을 그린 것인지, 진짜 꿈인지 알 수 없었으나 나는 생각했다. 엄마한테 빨리 이 얘길 해줘야 하는데.

 

박혜상
소설가, 1966년생
소설집 『새들이 서 있다』 『그가 내린 곳』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