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피로사회,시에 대한 시

  • 2021년 가을호 (통권 81호)
①피로사회,시에 대한 시

최근에 들었던 가장 재밌는 농담은 이거였다.
“어디 가나 꼭 진상이 하나쯤 있다. 그런데 이번에 새로 옮긴 직장은
하나 같이 사람들이 좋아. 여기서 진상은…… 나인가?”

 


피로사회

아내가 지난밤 꿈에서 내가 물고기를 잡았다고 얘기해줬다.
별 도구랄 것도 없이 맨손에 낚싯바늘 같은 걸 들고
잠수를 하더니 사람 키만 한 물고기를 잡아오더라며 활짝 웃는다.
방어같이 큰 물고기였어요 하기에
여보 그건 부시리야. 방어는 여름에 맛이 없어 했다.

하는 일이 없는 것 같아도 내가 이렇게나 바쁘다.
어제는 아내 꿈에 들어가 물고기를 잡았지.
지난주에는 서프라이즈! 아이의 꿈에 들어가 죽다 살아났지.
세상엔 내 이름자만 들어도 치를 떠는 사람도 있을 텐데
내가 미운 그에게 들러 통사정이라도 해 봐야지.
아무리 바빠도 일생 자식 걱정인 어머니 마음에도 들러야 한다.
요즘은 물 마시러 냉장고에 갔다가 물은 잊고
개수대에 놓인 우유 컵을 설거지하고는 돌아와
다시 물을 마시러 가기도 한다.

밤하늘의 별이 그냥 한 점으로 보이지만
실은 별들이 엄청난 속도로 운동하는 은하계 같은 것이듯
자는 게 자는 게 아닌 사람이 있고 쉬는 게 쉬는 게 아닌 사람이 있는 거다.
낮밤 가릴 것 없이 더운 날씨에 할 일은 태산이지.
물속을 걷듯 몸은 천근만근이지.
나야 잡는 사람이니 그렇다 치고 피곤해서 쉬어야 하는데
나 때문에 꿈꾸느라 잠도 못 자고,


시에 대한 시

시를 주제로 시를 쓰지 않는 건 내 오랜 신념이었다. 장미에 관한 시는 붉은 장미의 아름다움에 대해 쓰면서 동시에 장미의 아름다움을 보는 마음에 대해 말하고 더하여 아름다움에 대한 찬미의 방법도 같이 말하기 때문이다. 줄리엣이 로미오를 사랑하는 일에는 로미오를 사랑하는 자신을 사랑하는 것도 포함되며 그것은 로미오의 편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로미오는 자신을 사랑하는 줄리엣을 사랑하는 줄리엣이 사랑스럽다. 말에는, 무엇에 대해 말하든 어쩔 수 없이 자기 자신에 대해 말하는 재귀성과 자기지시성이 있어서 모든 시에는 하나의 시론이 담겨 있게 마련이다. 로미오는 탐스럽게 피어난 장미 한 송이에서도 줄리엣을 보며, 절정의 아름다움을 마주할 땐 꺼질 듯한 탄식이 절로 나오는 것을 어쩔 수 없다. 그러나 장미의 아름다움이 장미에 대한 시에 국한되지 않는 것처럼, 줄리엣을 향한 마음과 줄리엣을 사랑하는 마음의 상태를 사랑하는 것 사이에서 미세한 균열이 일어나면 어떻게 되는가? 한 편의 시가 시와 시론이 따로가 되면 어찌 되는가? 착한 사람이 되자는 반성이 사람을 착하게 하는 것이 아니듯 자기소개서엔 자기소개가 없고 이력서에 이력이 담기지 못하면? 시에 대한 시는 피터팬의 그림자를 꿰매는 웬디의 바느질이다.

이현승
시인, 계간 《파란》 편집위원, 1973년생
시집 『아이스크림과 늑대』 『친애하는 사물들』 『생활이라는 생각』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