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영 탄생 100주년 : 온몸의 시, 온몸의 철학 ③
김수영과 온몸의 시학

  • 김수영 탄생 100주년 : 온몸의 시, 온몸의 철학 ③
  • 2021년 가을호 (통권 81호)
김수영과 온몸의 시학

 편집자 주 : 김수영 시인의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여 그의 작품에 드러난 온몸의 철학을 주제별로 살펴보는 특별코너를 4회에 걸쳐 연재한다. 연재 순서는 다음과 같다.
1. 온몸의 존재 / 2. 온몸의 사유 / 3. 온몸의 시학 / 4. 온몸의 윤리

 

김수영
(1921~1968) 시인, 한국 현대 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김수영은 과감하고 전위적인 시작법으로 오늘날 모더니즘 시의 뿌리가 되었고 문학의 정치 참여가 가지는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한 깊은 성찰을 보여주었다. 김경린, 박인환 등과 함께 합동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을 간행하여 모더니스트로서 주목을 끌었다. 초기에는 모더니스트로서 현대문명과 도시생활을 비판했으나, 4·19혁명을 기점으로 자유와 저항정신을 바탕으로 한 참여시를 썼다. 마지막 시 「풀」에 이르기까지 200여 편의 시와 시론을 발표하였다. 

 

 

심연은 나의 붓끝에서 퍼져가고
나는 멀리 세계의 노예들을 바라본다
진개(塵芥)와 분뇨를 꽃으로 마구 바꿀 수 있는 나날
그러나 심연보다 더 무서운 자기 상실에 꽃을 피우는 것은 신이고

나는 오늘도 누구에게 얽매여 살아야 한다

돼지우리에 새가 날고
국화꽃은 밤이면 더 한층 아름답게 이슬에 젖는데
올겨울에도 산 위의 초라한 나무들을 뿌리만 간신히 남기고 살살이 갈라 갈 동네 아이들……
손도 안 씻고
쥐똥도 제멋대로 내버려 두고
닭에는 발등을 물린 채
나의 숙제는 미소이다
밤과 낮을 건너서 도회의 저편에
영영 저물어 사라져 버린 미소이다.

- 「꽃」(1960) 전문



<김수영 탄생 100주년 시그림전>에 출품 된 김선두 화가의 김수영 초상(장지에 먹 분채, 72x37.5cm, 2021)  

우리는 앞에서 온몸의 존재에 대해서는 「풀」(1968)을, 온몸의 사유에 대해서는 「먼 곳에서부터」(1961)를 논의의 출발점에 놓았다. 그렇다면 김수영의 시 중에서 온몸의 시학을 압축적으로 대변하는 작품은 무엇인가? 이전의 경우와 비교할 때 고르기가 다소 어려웠다. 후보작이 없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많기 때문이었는데, 이렇게 저렇게 따져보다가 결국 두 작품이 남았다. 하나는 「꽃」(1960)이고, 다른 하나는 「설사의 알리바이」(1966)다.

두 시는 유사한 의미론적 구조를 지닌다. 꽃과 똥(설사)은 김수영의 시학에서 시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이때 시는 명사로서의 시라기보다는 동사로서의 시다. 완결된 시만이 아니라 시를 생산하는 과정을 꽃이나 배설의 이미지에 담은 것이다. 김수영에게 시를 쓴다는 것이 “온몸에 의한 온몸의 이행”이라면, 그 이행은 결국 꽃을 피우는 일이나 배설하는 일과 다름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꽃을 피우고 어떻게 배설하는가?

먼저 꽃에 관한 시부터 살펴보자. 김수영의 작품세계에서 꽃은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시어에 속한다. 초기부터 마지막 시기의 작품에 이르기까지 꽃에 대한 성찰은 ‘시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답하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가 많다. 이런 이유에서 이영준 교수는 김수영의 시학을 ‘꽃의 시학’이라 부른다. 꽃의 시학을 뒷받침하는 작품으로는 꽃만이 아니라 채소, 파, 보리, 풀 같은 것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경우까지 꼽아야 한다. 모두 바람 속에 자라나 다시 소멸하기까지의 죽음을 견딘 만큼 견고해지는 생명을 노래한다는 점에서 이런 식물 역시 꽃과 다르지 않다.

김수영에게 꽃이란 생명과 죽음의 이중체이자 존재와 무의 변증법이다. 거기서 의미와 무의미의 역설적 통일, 침묵과 함성의 역동적 일치가 일어난다. 설움과 긍지, 상처와 미소의 이접적 종합이 일어나는 사건, 그것이 꽃이다. 혼돈과 질서, 타율과 자율의 대리적 보충이 일어나는 사건, 김수영은 거기서 오욕과 영광, 기억과 희망, 과거와 미래의 동시성을 본다. “죽음과 사랑의 대극은 시의 본수(本髄)”라는 김수영의 진술, “모든 시론은 이 죽음의 고개를 넘어가는 모습과 행방과 그 행방의 거리에 대한 해석과 측정의 의견에 지나지 않는다”(『김수영 전집 2』, 664~665쪽)라는 진술은 그가 스스로 구축한 이런 꽃의 이미지에서 구체적인 근거를 얻는다.

 

중단과 계속과 해학이 일치되듯이
어지러운 가지에 꽃이 피어오른다
과거와 미래에 통하는 꽃
견고한 꽃이
공허의 말단에서 마음껏 찬란하게 피어오른다

- 「꽃 2」(1956) 마지막 연

사실 김수영 시학의 특징은 불가능한 종합을 향한다는 데 있다.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것만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보이는 것, 가령 첨예한 이념 갈등이 만든 한반도의 38선 같은 것도 시의 꽃이 피어날 장소가 된다. 죽음은 시가 꽃처럼 피어날 그런 모순의 힘을 의미한다. 사랑은 그런 “죽음의 고개를 넘어가는 모습”이며, 마침내 그 죽음의 힘을 이용하여 “여태껏 없었던 세계가 펼쳐지는 충격”(『전집 2』, 501쪽)을 가져오는 이행, “온몸에 의한 온몸의 이행”이다.

이런 이행의 운동에 초점을 맞춘다면, 오로지 꽃노래 계열의 작품만이 온몸의 시학을 대변한다고 볼 수 없다. 다른 계열의 작품, 가령 “아픈 몸이 / 아프지 않을 때까지 가자 / 온갖 식구와 온갖 친구와 / 온갖 적들과 함께”라고 노래하는 「아픈 몸이」(1961) 같이 적을 주제로 한 계열의 작품도 후보작이 될 수 있다. 세대의 차이를 넘어서는 시적 교량술의 노래 「현대식 교량」(1964)도 이 계열의 작품이다. 그러나 김수영을 읽을수록 그가 시적 교량술을 통해 건너고자 했던 마지막 심연은 동서 문화의 차이인 것처럼 보인다.

내가 『김수영과 논어』(2016)에서 자세히 밝힌 것처럼, 서양의 근대성과 동아시아 전통(특히 유교 전통)을 횡단하는 실험이 김수영 작품세계 전체를 통해 반복된다. 「공자의 생활난」(1945), 「폭포」(1957), 「거대한 뿌리」(1964), 「사랑의 변주곡」(1967),「풀」(1968) 같이 널리 애송되는 시일수록 그런 시적 교량술이 빚어낸 결과다. 이런 시들은 모더니즘과 선비 정신이 서로 식별되지 않는 영점을 향하여 동서의 차이를 지우며 뻗어가는 도주선을 그려내고 있다. 김수영의 온몸은 그런 도주선이 발산하는 원점이자 그런 원점에서 일어나는 어떤 상향적인 자기 함량 운동이다.

온몸은 적으로 이미지화되는 온갖 모순들, 낙후한 역사적 현실 속에 들끓는 분열과 이질성을 정돈, 소화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자극하면서, 그러나 동시에 도주의 방향과 구도를 얻기 위해 먼 곳과 교감하면서 그런 자기 함량 운동을 이어간다. 그런 자기 함량 운동 속에서 온몸은 어두운 역사를 통과해오면서 잃어야 했던 건강을 회복해간다. “아픈 몸이 / 아프지 않을 때까지 가자”라는 구호는 그런 자기 순화적인 함량 운동을 위한 외침이다. 우리가 도입부에서 인용한 「꽃」(1960)에서는 그런 함량 운동의 지속은 “진개(塵芥 : 먼지와 쓰레기)와 분뇨를 꽃으로 마구 바꿀 수 있는 나날”로 표현된다.

이런 자기 순화적이고 자기 이행적 함량 운동의 결과는 장르의 혼합으로 나타난다. 고전주의 문학은 장르의 규칙에 충실하기를 요구했다. 그러나 낭만주의 이후 현대문학은 장르의 규칙으로 환원되지 않는 개별 작품의 특수성을 강조한다. 오늘날 추리 소설이나 대중문학은 장르의 규칙에 충실할 때 성공하기 쉽다. 그러나 순수문학은 특정 장르를 일탈하고 변형하면서 독창성을 다툰다. 문학은 크게 서정문학, 서사문학, 극문학이라는 세 가지 장르로 나뉜다. 그러나 김수영의 작품세계에서는 서정성, 서사성(산문성), 연극성이 공존하면서 서로 자극하고 변형한다. 현대문학은 모더니즘, 리얼리즘, 민족문학이라는 세 갈래로 나뉘기도 한다. 그러나 김수영의 문학에서는 이 세 가지 사조(思潮)가 함께 뒤섞이면서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 간다. 온몸의 시학은 뒤떨어진 현실의 온갖 “진개와 분뇨” 못지않게 장르상의 이질성과 사조상의 대립을 “꽃으로 마구 바꿀 수 있는 나날”을 꿈꾼다.

이런 시각에서 볼 때 온몸은 과거와 단절하는 갱생의 몸으로, 미래의 잠재력으로 가득 찬 원시의 몸으로 현상한다. 온몸은 새로운 규칙과 문법을 잉태하는 원시의 몸이다. 이런 뜻의 온몸에 기준을 둔다면, 월트 휘트먼(1819~1892)을 길게 인용하면서 시작하는 「미스터 리에게」(1959) 같은 시도 온몸의 시학을 대변하는 작품으로 꼽을 만하다. 이 작품은 “문명에 대항하는 비결은 / 당신 자신이 문명이 되는 것이다 / 미스터 리!”로 끝난다. 이 구절은 유럽 문화의 구속력에서 벗어나 미국 문화 고유의 개성과 언어를 살리려 했던 휘트먼의 정신을 시적으로 압축하고자 한다.

김수영은 1964년 「미국의 현대시」라는 제목으로 펭귄 문고판 미국 시선집 서문을 번역했던 적이 있는데, 이 번역문에는 ‘휘트먼의 전통’을 길게 언급하는 대목이 있다. 이런 것을 보면 휘트먼에 대한 김수영의 관심이 제법 지속적이지 않았을까 짐작해 볼 수 있다. 김수영의 마지막 걸작이자 동서 횡단적 작시법의 절정에 해당하는 「풀」(1968)이 휘트먼의 시집 『풀잎』(1855)에 대한 오마주가 아닐까 하는 추측마저 든다. 사실이야 어쨌든 온몸의 시학은 서양적 상상력은 물론 일본식 어법에서 벗어나 한국적 문학 전통을 수립해야 한다는 김수영 세대의 과제를 걸머지고 있다.

김수영에게 죽음은 그런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 기존의 분류법이 무너지는 사건이자 미지의 잠재력이 태동하는 사건이다. 사랑은 그런 죽음의 사건을 견디고, 그렇게 견딘 만큼 찬란한 꽃을 피워내는 이행, 온몸의 이행이다. “아픈 몸이 / 아프지 않을 때까지” 나아가는 그런 온몸의 이행은 우리가 위에서 언급한 그 어떤 시보다 「설사의 알리바이」(1966)에서 훨씬 더 정교하면서도 극적으로 연출되었다. 특히 정신분석, 하이데거, 블랑쇼 및 영미문학이론을 소화한 사고의 깊이가 돋보인다는 점에서 온몸의 시학을 대표하는 최고의 작품으로 꼽을 만하다.

 

설파제를 먹어도 설사가 막히지 않는다
하룻동안 겨우 막히다가 다시 뒤가 들먹들먹한다
꾸루륵거리는 배에는 푸른색도 흰색도 적(敵)이다

배가 모조리 설사를 하는 것은 머리가 설사를
시작하기 위해서다 성(性)도 윤리도 약이
되지 않는 머리가 불을 토한다

여름이 끝난 벽 저쪽에 서 있는 낯선 얼굴
가을이 설사를 하려고 약을 먹는다
성과 윤리의 약을 먹는다 꽃을 거두어들인다

문명의 하늘은 무엇인가로 채워지기를 원한다
나는 지금 규제로 시를 쓰고 있다 타의의 규제
아슬아슬한 설사다

언어가 죽음의 벽을 뚫고 나가기 위한
숙제는 오래다 이 숙제를 노상 방해하는 것이
성의 윤리와 윤리의 윤리다 중요한 것은

괴로움과 괴로움의 이행이다 우리의 행동
이것을 우리의 시로 옮겨 놓으려는 생각은
단념하라 괴로운 설사

괴로운 설사가 끝나거든 입을 다물어라 누가
보았는가 무엇을 보았는가 일절 말하지 말아라
그것이 우리의 증명이다

- 「설사의 알리바이」(1966) 전문

김상환
서울대학교 철학과 교수, 1960년생
저서 『김수영론: 풍자와 해탈 혹은 사랑과 죽음』 『김수영과 논어』 『근대적 세계관의 형성』 『왜 칸트인가』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