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문학의 순간들
뒤바뀐 평론집과 쑥대머리 시인의 죽음

  • 우리 문학의 순간들
  • 2021년 가을호 (통권 81호)
뒤바뀐 평론집과 쑥대머리 시인의 죽음

‘쇄(刷)’가 아니라 ‘판(版)’이어서 사고였다. ‘쇄’가 바뀌면 펴낸 책이 잘 팔려서 새로 찍어내는 상황이니 반가울 일이었다. 그런데 문학평론집을 펴내자마자 내용이 잘못 인쇄되어 ‘판’을 바꾸게 된 것이다, 그것도 두 권의 평론집을 동시에. 아마도 문단 역사상 전무후무한 해프닝으로 기록될 만한 사건이었을 것이다. 1992년 민음사 사장실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문단에 진출한 지 4년 만에 첫 평론집을 펴내게 되었다. 민음사 편집부에서 평론집이 출간되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반가운 마음에 한걸음으로 민음사에 달려갔다. 마침 《세계의 문학》 편집위원인 친구 이남호가 민음사에 나와 있던 터라 나를 사장실로 안내했다. 박맹호 사장이 축하한다며 손을 내밀었는데 사고를 축하한 셈이 되고 말았다.
잠시 후에 연극인이자 시인이며 문학평론가이기도 한 이윤택이 사장실로 들어섰다. 그때까지 나는 이윤택과 내 평론집이 동시에 민음사에서 발간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곧 두 권의 ‘따끈따끈한’ 평론집이 탁자 위에 놓였고 이윤택과 나는 각자의 책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 어, 이게 뭐야!

이윤택이 눈을 치켜뜨면서 자신의 평론집을 내려놓더니 내 평론집을 보여 달라는 눈짓을 보냈다. 아무런 영문도 모른 채 내 책을 건네자 그는 서둘러 평론집의 중간 부분을 펼치고는 마치 범인을 색출하는 수사관의 몸짓과 말투를 연출해 보였다.

- 내용이 서로 바뀌었네요, 출판 사고야.

이윤택의 선언에 당혹스러워하던 박맹호 사장의 눈빛과 표정이 아직도 선연하다. 그 무렵에는 나도 어림하고 있었다. 문예지를 발간하는 문학 출판사에서 문학평론집이란 대부분 문단의 인맥을 관리하기 위한 필자 서비스요, 출판사 입장에서는 천덕꾸러기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그런데 그런 천덕꾸러기가 탈이 나서 다시 찍어내야만 하는 사태가 발생한 것이었다. 그것도 두 권씩이나. 졸지에 나와 이윤택은 평론집을 받아들자마자 재판을 발간해내는 놀라운 실적(?)을 민음사에 안겨주게 된 것이었다. 박맹호 사장은 수백만 원의 추가 비용을 지불하고 우리 두 사람에게 새로 찍어낸 평론집을 쓰린 마음으로 안겨주어야만 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첫 평론집으로 인사동의 지금은 사라져버린 “안동국시”라는 한옥 음식점에서 출간기념회라는 것을 마련하게 되었다. 열댓 명 남짓한 또래 문우들을 초대하여 마련한 술자리에 느닷없이 인사동을 배회하던 문인들이 끼어드는 바람에 술자리 규모는 두 배 가깝게 확장되고 말았는데 그중에는 이미 술이 거나해진 황지우도 포함되어 있었다.

고등학교 3학년 시절 짧은 시간 나의 가정교사였던 인연을 맺은 이후로 몇 차례의 기이한 만남을 이어간 황지우는 또 다른 우연으로 내 출판기념회에 참석해 주었던 바, 나는 처음으로 황지우의 노래 솜씨를 확인할 수가 있었다. 술김 탓이었던지 주변의 요청을 마다하지 않고 서슴없이 자리에서 일어난 황지우는 듬직한 체격에 전혀 어울리지 않을 법한 대중가요를 불러서 좌중을 압도해버리는 필살기를 과시하였다. 1980년대 중반에 명혜원이라는 여성 가수가 부른 <청량리 블루스>라는 노래는 끈적끈적하면서 허스키한 음색으로 난이도가 만만치 않은 고음의 멜로디와 그루브를 과시하는 곡이었는데, 황지우는 간드러진 목청에 몸까지 비틀어 보이는 열정으로 그 노래의 분위기를 완벽하게 되살려내었던 것이다. 그 바람에 황지우는 졸지에 문단의 명가수로 부각되었다. 그때까지 구석자리에 웅크리고 있던 한 여성 시인의 노래가 시작되기 전까지는.

황지우와 거의 동년배였음에도 바로 전 해인 1991년 가을에 문예지 《작가세계》로 등단한 이연주가 바로 조금 전에 화려하게 밀려든 장강의 앞 물결을 밀어내 버린 뒷물결의 장본인이었다. 직업이 간호사인 이연주는 오래전에 문단에서 별로 인정을 받지 못하는 문예지로 등단하였으나 시인으로서의 보람을 기약하기가 어려워지자 뒤늦게 ‘재등단’이라는 고육지책을 선택하였다. 그 선택이 신의 한 수로 적중하여 이연주는 1990년대 한국 시문학사의 독특한 활로를 열어놓는 첫 시집을 재등단 후 이삼 개월 만에 세계사에서 펴내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매음녀가 있는 밤의 시장』이었다. 그런데 부패와 절망과 죽음의 지옥을 자화상의 풍경으로 너무도 선연하게 그려낸 그 시집이 문단의 주목을 받기도 전에 이연주는 스스로 유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이연주가 첫 시집을 펴내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시기에 마련된 나의 출판기념회에서 부른 노래는 <쑥대머리>였다. 판소리 <춘향가>에서 춘향이 옥에 갇힌 채로 죽음을 예감하며 한양으로 떠난 이몽룡을 그리워하며 부른 그 노래를

 

 

이연주는 대중가요 풍으로 부르지 않았다. 취중의 문인들 정신을 번쩍 깨어나게 만들어버린 노래의 창법은 우리 민족의 고유한 정서라고 하는 ‘한(恨)’을 다독여 풀어내는 ‘서편제’의 것도 아니었으며 그야말로 슬픔을 우렁찬 에너지로 뿜어내는 판소리 목청이었다. 그것을 ‘동편제’의 창법이라고 규정해 버릴 수 있을까? 어쨌거나 좌중의 문인들은 그 목청의 주인공을 반은 놀라는 듯한, 그리고 반은 질려버린 듯한 표정으로 응시하게 되었다. 절망과 분노를 함께 담아낸 그 강렬한 목청은 마치 예감처럼 그 해를 채 보내기도 전에 비극의 사건으로 자신의 생을 폭발시키고 말았다.

내가 그 전화를 받은 것은 1992년도가 저물어갈 무렵이었다. 이연주보다 한 해 먼저 《작가세계》로 등단하고 나이도 엇비슷해서 이연주와 친분이 두터웠던 김상미 시인이었다. 평소보다 유난히 가라앉은 음색으로 들려준 소식은 내 머릿속을 둔기로 강타해 버렸다. 얼마 전까지도 얼굴을 마주했던 이연주 시인이 세상을 떠났는데 그것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니. 김상미는 장례를 치르는 발인 날에 문인들끼리 추모 영결식을 갖기로 했다는 사실을 알려주며 내게 사회를 부탁했다. 정신없이 전화기를 내려놓고 이연주와 만났던 여러 차례의 기억을 곰곰이 돌이켜보았으나 어디에서도 죽음의 그늘을 찾아내기는 어려웠다.

추모식을 거행하는 날에 전해 들은 소식은 더욱 기가 막힌 것이었다. 후배가 이연주 집을 찾아가 밤늦도록 함께 술을 마시다가 취기가 오른 후배는 먼저 잠이 들어 버렸다. 이른 아침에 눈을 뜬 후배는 곁에 이연주가 보이지 않자 방으로 들어가서 자겠거니 생각했다. 그리고 좀 더 시간이 경과한 후에 방안의 기척이 없어서 노크를 했다. 방문은 잠겨 있었고, 문득 불안한 예감에 사로잡힌 후배는 마당으로 나가서 방 창문 쪽으로 다가섰다가 끔찍한 형상을 바라보고 주저앉아버렸다. 허공에 매달린 시신을 목격해버렸던 것이다. 그런 상황을 내게 알려주던 시인은 “그 후배 주량이 이연주보다 조금만 더 많았더라면……”이라며 긴 탄식을 내뱉었다.

벽제 화장터까지 동행하는 우리의 발걸음은 어느 때보다 무겁고 더디기만 했다. 이연주는 유서를 남겼고 북한강에 유골을 뿌려달라는 그녀의 유언을 따르는 길에 나는 동참할 수가 없었다. 죽어서라도 북한강을 거슬러 올라가 이연주가 만나고 싶었던 맺어지기 어려운 인연이 있을 것이라는 귀띔 때문이었다. 나와도 친분이 두터웠던, 하지만 장례식장에 모습을 드러낼 수 없었던 그 시인의 모습이 자꾸 떠올라서였다.

그로부터 다시 삼사 개월이 지나고 1993년 3월에 이연주의 유고 시집인 『속죄양, 유다』가 발간되었으며 시집의 해설을 맡은 나는 “누가 와서 내 집 문을 두드린다”(「우렁달팽이의 꿈」)는 시행을 주목하며 “그녀는 ‘문을 두드린다’는 기미를 새로운 삶의 기대감으로 심어놓고 싶었지만, 결국 그녀 삶의 문을 두드린 손님은 죽음이 되고 만 셈이”라고 풀어놓았다. 이연주의 기대감은 죽음을 예감하면서도 이몽룡에 대한 사랑을 확인하려는 춘향의 <쑥대머리> 같은 것이었을 듯하다

 

이경호
평론가, 1955년
저서 『문학과 현실의 원근법』 『문학의 현기증』 『상처학교의 시인』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