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식당
‘아버지’라는 말이 새롭고 무겁게 다가선 식당, 용금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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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년 가을호 (통권 81호)
‘아버지’라는 말이 새롭고 무겁게 다가선 식당, 용금옥

1993년 새해를 맞고도 몇 주가 지났지만 마음은 심란했다. 신년을 맞으면 으레 크든 작든 새로운 계획을 세우거나 지키기 어려운 신년 작심으로 조금은 분주하고 들뜨기 마련이지만 전해 12월 ‘민족문화 창달’과 ‘한국문학의 세계화’를 위한 민간재단인 대산문화재단 출범이라는 야심찬 포부를 밝힘으로써 언론과 문화계로부터 큰 주목을 받은 사무실 분위기는 말이 아니었다.

무슨 일인지 의사결정을 해야 할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하나둘 재단을 떠났다. 자네는 대학시절 시를 쓰는 문학청년 아니었나? 문학을 지원하는 직장에서 문청의 꿈을 펼쳐보면 좋을 것이네, 라며 이직을 이끌었던 존경하는 은사는 문화재단 설립이 끝났으니 자신의 분야인 농촌 관련 업무로 돌아간다며 새로운 사람들과 호흡을 맞춰 일을 잘 해보라고 당부했다. 책임감 강하고 온화함을 잃지 않았던 상임이사 겸 국장도 떠났다.

실무자들 몇이 남은 사무실은 한동안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한국문학의 발전과 세계화라는 거창한 청사진을 입안하고 대외적으로 알리는 일을 맡았던 나는 초조했고 시간이 지날수록 불안감이 커져갔다. 이제라도 호기롭게 사표를 던졌던 직장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을 타진해 보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과 문학을 지원하는 첫 번째 민간 문화재단이라는 아무도 가지 않은 길에 대한 호기심 또는 기대가 매일 자리를 바꿔가며 마음을 흔들었다.

그리고 얼마 후 새로운 사람들이 왔다. 단구에 쩌렁쩌렁한 목소리를 가졌으나 웃음이 없고 좀체 자신의 방에서 나오질 않는 60대 후반의 과묵한 상임이사와 출연사의 경리부장을 역임한 노련하고 권위적인 인상의 관리부장. 사람들은 새로 온 상임이사가 일제 때 경기중·고등학교와 경성제대 법학과를 나온 엘리트로 소위 S대 출신이 아니면 취급도 하지 않는 고집불통이라고 수군거렸다.

 

3대째 가업을 이어 온 사장님(오른쪽)과 필자

 

여러 언론 및 방송에 소개 된 용금옥 

 

왜인지 나는 그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기로 했다. 본사 복귀와 증시 시황 외엔 관심이 없어 보이는 관리부장에게 첫 사업연도를 맞는 재단의 사업계획과 방향, 실행계획, 한국문학 발전을 위한 방안을 담은 많은 보고서들을 지속적으로 아니 무리스러울 정도로 드밀면서 상임이사에게 결정을 받아달라고 채근했다. 도무지 관심을 보이지 않던 관리부장은 몇 번의 승강이 끝에 정 그러면 자신을 거치지 말고 곧바로 상임이사에게 문서를 올리라고 했다. 절차가 맞지 않았지만 나는 그렇게 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난 토요일 오전 상임이사실로 들어오라는 전화를 받았다. 처음 마주한 자리,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흐른 다음 그가 문장, 단어, 토씨 하나까지 꼼꼼히 검토하고 연필로 표시한 문서를 내밀며 입을 열었다.

“당신이 올린 보고서를 비롯한 여러 문서 잘 봤소. 젊은 사람이 한자도 제법 알고 문장도 꽤 정확한 게 인상적이오.”

“감사합니다.”

“그런데 말이오, 당신 이력서를 봤는데 그 정도 실력에 학교는 왜 그 정도밖에 못나왔소?"

“네에? ……”

“아아, 농담이오. 아니 칭찬이오, 칭찬. 오늘 토요일인데 일과 파하고 약속 있소? 없으면 나하고 점심이나 합시다.”

 

여러 언론인, 정치인의 발길이 자주 닿았던 식당 내부

 

야무진 잰걸음으로 앞장선 그를 따라 간 곳은 동아일보 앞을 지나 아직 고가도로가 남아있던 청계천을 건너 무교동 골목 깊숙이 있는 오래된 한옥이었다. 가정집을 개조한 입구에 ‘추탕’이라고 쓴 간판과 용금옥(湧金屋), 즉 ‘금(돈)이 솟아오른다’는 뜻의 낯선 옥호가 인상적이었다. 그는 모듬전 한 접시와 막걸리 두 병, 그리고 추탕 한 그릇씩을 주문했다. 걸쭉한 전라도식 추어탕과는 달리 곱창으로 우린 육수에 미꾸라지와 느타리버섯 그리고 유부를 넣고 끓인 다음 고춧가루로 빨갛게 국물을 낸 맑고 얼큰하고 개운한 추탕 국물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며 막걸리를 불렀다. 몇 병의 막걸리를 더 비우기까지 그와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젊은 나는 술기운을 못 이겨 혹은 술기운을 핑계 삼아 마음의 문을 열며 몸가짐을 느슨히 했고 그는 흐트러짐 없는 몸가짐은 변함없었지만 한층 다정한 목소리와 온화한 웃음을 머금은 표정으로 화답했다.

그는 1925년 전라북도 익산 솜리 시장 모자집 아들이라고 했다. 소학교를 마치고 경기중학교에 시험 치러 처음 서울에 올라와서 자신보다 더 무뚝뚝한 아버지와 같이 간 설렁탕집 이문옥(1904년 문을 연 최장수 식당)에 대한 기억을 잊을 수 없어 지금도 가끔 찾는다고 했다. 잊을 수 없는 것이 처음 가본 이문옥인지, 무뚝뚝한 아버지인지 아니면 무뚝뚝한 아버지와 같이 간 이문옥인지 나는 묻지 않았다. 그 모두일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경성제대를 졸업하고 신민당 정일형 박사 비서 시절과 4.19혁명 때 종종 찾은 밥집이, 그리고 오랜 언론계 생활을 하며 막역한 지기였던 천관우 선생과 가장 많이 술잔을 기울인 식당이 용금옥이라고 했다. 1980년 ‘서울의 봄’ 때 권력을 장악한 신군부의 언론인 대량 해직 때 해직을 통보받고 울분에 차 밤늦게까지 통음하고 귀가한 다음 아침에 습관처럼 일어나 옷을 입고 나왔는데 갈 곳이 없어 시내 이곳저곳을 서성이다 쓰린 속을 달랜 집도 용금옥이라고 말하는 대목에서 그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래서 토요일이면 일을 마치고 이 집에 들러 막걸리 두 병과 추탕 한 그릇 비우고 들어가는 것이 중요한 일상이 되었다고 했다. 처음에는 이 집이 지금 코오롱 빌딩자리에 한옥이었다고, 주인 할머니가 고관들에게는 입바른 소리를 서슴지 않는 욕쟁이 할머니였지만 주머니 가벼운 손님들을 세심하게 챙기는 마음씨는 여전했다고, 지금은 할머니는 가고 며느리가 이어받았다고 했다,

 

전라북도 부안산 미꾸라지를 사용한 미꾸라지 튀김과 추탕   

 

그날 이후 나는 아니 우리는 특별한 일이 없으면 토요일 일과를 마치고 용금옥을 찾았다. 치기 어린 문학에 대한 열정과 거침없이 일을 밀어붙이던 그래서 주위 사람들이 어려워하고 불편해했을 나를 그는 늘 너그럽게 품어주었다. 주머니 속에 넣어두고 싶은데 자꾸 튀어나오는 ‘낭중추(囊中錐)’같은 존재라고 호방하게 웃으며 나를 다독이던 그는 어느 날 막걸리 잔을 기울이다 내가 막내아들 같다고 아니 나를 막내아들처럼 생각한다고 했다. 그 순간 일찍 아버지를 여윈 그래서 오랫동안 아버지라는 말을 애써 잊고 산 나에게 ‘아버지’라는 단어가 새롭고 무겁게 다가섰다.

이제 그가 세상을 떠난 지도 10년이 훨씬 더 지났지만 나는 문득 누군가 그리울 때면 아니 아버지가 생각날 때면 용금옥에 간다. 지금은 중년이 된 손자가 운영하는 용금옥 추탕 맛은 여전하고 줄지어 순서를 기다리는 손님들은 부쩍 늘었지만 막걸리 한 병에 추탕 한 그릇 후루룩 비우고 일어나면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허기가 조금은 덜어지는 것 같다.

곽효환
시인, 한국문학번역원장, 1967년생
시집 『인디오 여인』 『지도에 없는 집』 『슬픔의 뼈대』 『너는』, 저서 『한국 근대시의 북방의식』 『너는 내게 너무 깊이 들어왔다』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