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데뷔작
불과 녹과 나이트 사커

- 데뷔작 『나이트 사커』

  • 나의 데뷔작
  • 2021년 가을호 (통권 81호)
불과 녹과 나이트 사커

- 데뷔작 『나이트 사커』

불타는 거랑 녹스는 건 사실 같은 화학 반응이야. 속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야.

 

화학을 전공한 친구가 통화 중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를 들려주었을 때, 그 내용의 아름다움에 누운 채로 정신이 아득해졌던 기억이 난다. 눈앞의 흰 천장에서는 새빨갛게 타오르는 불의 형상과 붉게 삭아가는 쇠의 형상이 뒤섞이고 있었다. 머릿속 영상은 곧이어 불타는 숲의 입구에 세워진 녹슨 자전거의 모습으로 바뀌어 상영되었다.

왜 나는 저 짧은 문장에 그토록 매혹되었을까? 불타는 이미지와 녹스는 이미지의 어떠한 속성이 나를 사로잡았던 것일까. 그 둘이 실은 같은 현상이라는 사실이, 그러한 다름이 단지 시차에 의해 발생하는 것이라는 단순한 사실이 왜 이렇게까지 아름답게 느껴졌을까. 친구의 말은 나의 첫 시집 『나이트 사커』에 부록으로 수록된 산문 「비주류 천사들」의 첫 문장이 되었다.

시집이 출간되기 몇 달 전까지 내심 ‘불과 녹’을 시집 제목으로 정해두고 있었다. 우연이었는지, 혹은 미감이란 애당초 내재되어 있는 것이므로 위의 이야기에 매혹된 것이 오히려 사후적인 일이었는지 모르겠으나, 오래전 써둔 ‘녹’이라는 제목의 시와 불이 중심 소재로 활용된 ‘위증’이라는 시가 마침 시집에 수록될 예정이기도 했다. 주변의 반대로 제목을 변경하였지만 나의 마음은 아직도 첫 시집의 이름을 약 30퍼센트 정도 ‘불과 녹’으로 여기고 있다.

시집 『나이트 사커』 

매혹이란 무엇일까. 알다시피 그것은 불능의 상태가 되는 것이다. 존재의 자율을 상실하고, 마음의 근육이 녹아내리고, 액체에 가까운 모습이 되어 보이지 않는 물길 따라 한없이 흘러가 버리게 되는 것. 그리고 그 이전으로는 다시 돌아갈 수 없게 되는 것. 한강의 소설 『희랍어 시간』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넌 철학을 하기엔 너무 문학적이야.” 주인공은 선생이 “앞으로 내 머리는 하얗게 셀 겁니다. 그러나 그것은 지금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죠. 지금 눈이 내리고 있지 않지만, 겨울이 되면 적어도 한 번 눈이 올 것입니다.”라고 말했을 때, 오직 젊은 우리의 머리칼이 서리처럼 희어지며 눈발이 흩날리던 순간의 환상, 그 중첩된 이미지의 아름다움에만 감동했을 뿐이라고 말한다. 입증할 수 없는 아름다움에의 매혹 앞에 자꾸 무릎 꿇게 되는 것. 아름다움의 권능에 복종하여 논리와 체계 앞에서 눈을 감는 일. 시와 철학이 사이가 좋지 않은 이유는 어쩌면 각자 다른 신에게 복종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돌이켜보면 시집에 수록된 시의 대부분은 매혹의 기록이기도 했다. 사람에의, 혹은 사물에의 매혹, 장면에의, 언어에의, 감정에의 매혹, 나 자신에 너무 속해 있는 것에 대한 매혹, 혹은 나 자신을 완전히 배제해버린 것에 대한 매혹. 매혹의 경험은 이미지로 귀결되거나 언어적 운동으로 화하거나 문장에서 말해지지 않는 여백의 순간으로 남기도 했다. 이를테면 이차 대전 이후 급하게 건축된 조악한 도시에서 지내는 동안 보았던 장면들이나, 수족관에서 촬영한 필름 사진을 인화하였는데 새파랗게 나올 줄 알았던 장면들이 모두 흑백으로 찍혀 있던 순간, 조립되고 해체되며 부지를 옮겨 다니는 놀이공원에 놀러 갔던 기억 같은 것들.

몸이 겪은 매혹은 문장과 이미지로 배열되면서 확장되고 또 소멸하면서 한 권의 시집 속에서 일관성과 불균형을 동시에 발생시켰다. 매혹되었다는 사실은 확실하나, 매혹됨의 원인은 발견할 수 없는. 흔들림은 분명하게 인지할 수 있으나, 이 지진의 진원지를 찾을 수 없는. 사실, 굳이 설명하고자 한다면 어렵지 않게 해낼 수도 있을지도 모른다. 시의 형식을 어찌어찌 분석하거나 동시대 화두 내에 배치하거나 유서 깊은 비평적 용어를 활용하는 일도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실재했던 매혹에 대해 발설하는 동안 유실되는 것들을, 나는 그저 침묵 속에 놓아두고 싶기도 하다. 사실은 그 모든 발생이 단지 속도의 차이에 의한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

김선오
시인, 1992년생
시집 『나이트 사커』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