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버지
아버지의 집을 허물다

- 나의 아버지 피연찬

  • 나의 아버지
  • 2021년 가을호 (통권 81호)
아버지의 집을 허물다

- 나의 아버지 피연찬

1992년 아버지와 딸, 돌잔치에서  

 

오늘, 부모님이 살던 집을 허물었다.

엄마가 죽은 지 1년 2개월이 지났다. 아버지가 죽은 지는 만 4년이 되었다. 굴착기의 길고 우악스러운 손에 흙집은 쉽게 무너졌고 전쟁의 잔해 같은 철골, 나무, 스티로폼, 보일러 배관 파이프 등등이 분리되어 차례차례 폐기물처리장으로 떠났다.

1년 전에는 엄마를, 4년 전에는 아버지를 이 집에서 실어내어 병원을 거쳐 화장장으로 실어가던 내가, 이제는 전쟁에서 살아남은 공병대처럼 치열했던 전장을 수습한 것이다.

상실과 소멸은 이 세상을 살아내는 내내 나에게 몇 번의 눈물을 요구했고, 나는 때로 눈물을 참는 억지스러움으로 대항하곤 했다.

오늘은 그냥 울었다.

집 앞 감나무며 밤나무는 집이 뜯겨나가는 순간에도 열매를 달고 지난한 여름을 통과하고 있었다.

내가 스물다섯, 어린 나이에 결혼을 하고 첫 딸을 낳았을 때 아버지는 소작하던 밭에 딸린 집에서 이 집으로 이사를 했다. 내가 열 살 무렵, 빚에 쪼들려 고향집을 버리고 트럭 짐칸에 실려 이 고장으로 도주해 온 이래 아버지는 처음으로 아버지 명의의 집을 갖게 된 것이다. 여전히 얼마간의 빚은 갚지 못한 채였지만 복 많은 며느리를 얻어서 살림이 폈다고 좋아하셨다.

아버지는 낡은 흙집이나마 이 집을 사랑했으리라. 뒤란에 감나무를 심고 거름 옆에는 어울리지도 않는 목련을 심었다. 귀신 막아준다는 엄나무를 심고 집에 딸린 밭에는 배나무를 심었다.

나무를 심는 것만큼 설레는 일이 또 있을까.

나무는 콩이나 들깨와는 다르다. 나무를 심는 것은 배추씨를 뿌리거나 옥수수를 심는 일과는 다르다. 나무를 심는 것은 오래 네 곁에 있겠다는 약속이며 나무가 만든 그늘에 내놓을 들마루의 설계도를 머릿속에 그리는 일이다.

언제 옮겨 앉을지도 모르는 소작 밭에 딸린 집에, 바람이 숭숭 새는 벽도, 깨어진 처마도 거들떠보지 않던 아버지가 기우뚱한 흙벽을 지지대를 세워 떠받치고 거적을 달아내어 여름이고 겨울이고 가족들이 모이면 편하게 나앉을 수 있도록 알루미늄 덧문 공사를 했다.

아버지는 이 집에서 23년을 사셨다. 아주 잠깐의 시기 동안 아버지는 행복을 받아들이는 듯했으나 어느 날 아직 다 자라지도 않은 목련을 베면서 다시 우울과 화(禍)의 모드로 돌아갔다.

아버지가 죽고 내가 제일 먼저 한 일은 무성해진 감나무를 베는 일이었다.

오기 싫은 집에 와서 하룻밤을 자면, 나는 오줌 마려운 개처럼 하룻밤에도 열댓 번씩 그 감나무 아래로 가 담배를 피우고 실제로 오줌도 누곤 했다. 그해 겨울, 내가 제일 먼저 감나무를 벤 것은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말소하려는 나 나름의 방법이기도 했고, 혼자 남은 엄마의 노동을 줄이려는 술책이기도 했다.

평생을 무력하게, 그래서 무능하게 살다가 간 아버지, 무능하다는 엄마의 지청구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아프다, 힘들다, 죽고 싶다는 말을 아들에게 서슴지 않던 이해하기 힘든 아버지, 나는 그 기억을 빨리 소멸시켜야 내가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직감으로 알았고 한 치의 망설임 없이 감나무를 베 장작 크기로 분해하고 불 아궁이에 처넣어 버렸다. 그리고 원망할 대상이 사라져버린 엄마가 그 집에서 3년을 채 못 살고 죽자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집을 허물고 흔적 하나 남기지 않고 뜯어버린 것이다. 진즉에 부동산에 매물로 내놓았지만 낡은 촌집은 팔리지 않았고 나는 일단 급한 대로 지우개로 집을 지운 것이다.

마지막 폐기물을 실은 차가 골목을 빠져나갔을 때 눈물이 났다. 빈 땅, 빈 하늘, 빈 가슴, 텅 비어버린 내 존재의 한구석을 바닥에 내려놓고 울었다.

나는 아버지의 마지막 병실을 지키며 아버지가 내게 했던 이해하지 못했던 말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한두 시간 후면 당신이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안 순간에도 아버지는 나에게 유언 따위나 미안하다는 말 따위를 하지 않았다. 유일하게 아버지가 내게 한 말은 “다 귀찮다”였다. 그때 나는, 아프다 힘들다 죽고 싶다던 아버지의 말이 그냥 해본 푸념이 아니라 진심이었다는 것을 알아챘다.

얼마나 불쌍한 일생인가. 81년의 긴 여행이 그토록 고통스러웠다니……

실제로 나는 아버지가 웃는 모습을 많이 못 봤다. 내가 기억하는 아버지의 가장 기뻐하던 모습은 손녀의 돌잔치에서 치명적인 재롱을 선보이던 딸 다은이를 안으면서 보였던 모습 정도가 잔상으로 남아있을 뿐이다.

아버지의 임종을 통해서 내가 아버지의 말을 이해했다고 해서 아버지를 추모하거나 기억하고 싶어진 것은 아니다. 나는 부모님의 유골을 산천에 뿌리는 의식으로 그분들과 결별하고자 했다. 제사상을 차리고 가족들이 모여 아버지와 엄마를 추억하는 일은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뜨거운 물에 빠져 살갗이 벗겨지는 여섯 살 아들을 야단치며 업지도 않고 걸려서 병원으로 몰고 가던 아버지를, 학교 보낼 돈은 없으니 네가 알아서 살라던 아버지를, 빚 얘기와 허구한 날 아픈 얘기만 하던 아버지를 정기적으로 만나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런 아버지를 욕하고 죽어버리라고 저주하던 엄마를 산소와 제사를 통해 추억하는 고통 또한 선택할 수 있다면 당연히 피하고 싶은 일이었고, 나는 기꺼이 불효의 멍에를 쓸 수 있었다.

아버지에 관한 글을 써 달라는 청탁을 받으리라는 생각은 못 했다. 그것도 시가 아닌 산문을. 마감이 다가오는 어느 날인 오늘, 나는 아버지의 집을 부수는 일로 하루를 보내며 힘들었다. 인간의 기억은 편집될 수 있지만 통째로 들어내지는 못하는 것이어서, 어쩌면 이렇게 지우려고 하는 것이 더더욱 나에게 형벌로 다가올 수 있다는 생각도 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종묘상에 가서 상추, 시금치, 얼갈이배추 같은 여름 채소 씨앗을 여럿 샀다. 해가 긴 여름날, 마당 텃밭에 억세진 상추를 뽑아내고 새 씨앗을 심었다. 흙을 다독이고 물을 뿌리면서 그냥 이렇게 시간을 흘려보내자 생각했다. 때로는 시간만이 해결할 수 있는 일들이 있다는 것 정도는 아는 나이니까.

곧 여름휴가를 받아 딸이 온다. 나는 딸에게 결혼 준비는 잘하고 있는지 물어보고, 아빠가 뭘 도와줄까? 라고도 하고, 맛있는 고기도 사주고, 밤에는 와인 한잔 하자 해서 ‘나는 건재하니 너나 잘해라’ 큰 소리 뻥뻥 치면서 하하 호호 활짝 웃을 것이다. ‘아빠가 뭘 잘못 먹었나?’ 딸이 갸우뚱해지도록. 

아버지를 잊는 일은 당분간 미뤄두자.

피재현
시인, 1967년생
시집 『우는 시간』 『원더우먼 윤채선』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