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에세이 - 길을 묻다
인간의 조건

  • 인문에세이 - 길을 묻다
  • 2021년 가을호 (통권 81호)
인간의 조건

프랑스 언론사에서 통용되는 사전 부고(死前訃告)란 표현이 최근에 화제가 되었다. 유명 인사가 죽으면 속보를 내야 하는데 그의 생애를 쉽게 요약할 수 없기에 미리 준비해두는 모양이다. 일종의 형용 모순적 단어를 쓸 수밖에 없는 저간의 사정은 짐작할 수 있다. 저승사자는 불시에 방문하기에 마감 시간에 쫓기는 기자는 방대한 업적을 남긴 고인일 경우 그것을 정리할 만한 여유가 없고 자칫 중요한 대목을 빠트리거나 심오한 사상을 소략하게 처리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업적을 작성해두었다가 나중에 기일과 사인과 같은 사항만 덧붙이면 충실한 부음기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멀쩡히 살아있는 사람의 부음을 실수로 내보낸 바람에 사전 부고라는 관행이 독자들에게 알려졌다. 유정물은 모두 필멸인데 어느 사적 존재의 소멸이 공적 애도에 값하는 범주에 드는 것일까. 물론 대다수의 죽음(혹은 삶)은 거기에서 제외될 것이며 죽음마저도 대개 익명으로 끝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죽음도 고인이 생전에 사회적 영역에서 행사했던 영향력에 비례하여 그 가치가 저울질 되기 마련이다.

‘하나가 죽으면 비극이지만 백만이 죽으면 통계 숫자’라는 말은 스탈린의 입에서 나왔다고 전해진다. 스탈린을 히틀러로 바꾸어도 어색하지 않고 동종의 인물은 역사에 차고 넘친다. 또한 신문 방송에 차고 넘치는 재난 기사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가 과연 저들과 크게 다를지 의문이다. 천재지변으로 희생된 사망자의 숫자가 늘어날수록 우리의 뇌에서는 죽음의 구체성이 희석되고 종국엔 무색무취한 숫자로 처리된다. 비극과 통계 숫자의 중간쯤 어디에 위치할 법한 사안을 보탠다면 바스티유 사건을 들 수 있다. 1789년 7월 14일 하루 동안 파리의 바스티유에서 민간인 98명이 사망했다. 구체제에서 벗어나 혁명의 시대로 접어드는 역사의 변곡점이 된 이날은 프랑스공화국이 기리는 최대 국경일이지만 그날의 희생자 중 한두 명의 이름조차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과감한 비약이 허용된다면 개별성이 소각되는 정도에 따라 우리의 생사는 삼분(三分)되어 문학과 역사, 그리고 철학의 대상이 된다. 흔히 문사철로 요약되는 인문학의 영원한 주제는 인간이지만 문학은 집단적 가치나 보편적 진리보다도 유독 주인공이라 불리는 개별적 인물이 구체적 시공간의 조건 속에서 겪는 실존적 상황을 드러내어 우리의 실감과 공감에 호소한다.

매일 고정 기사로 보도되는 확진자와 사망자는 스탈린의 표현에 기댄다면 비극이 아니라 막대그래프와 숫자로 치환된다. 우리의 삶은 막연히 생로병사라는 네 글자로 요약되지만 그 자명한 진리도 따지고 보면 오로지 인간이 겪는 생물학적 현상을 지칭한 따름이고 거기에는 그 어떤 희로애락과 실존적 결단도 포함되지 않는다. 해를 넘기며 반복되는 통계 숫자에 익숙해진 나머지 우리 모두가 부지불식간에 비정한 전체주의자, 과학적 숙명론자를 닮아가는 것은 아닐지 모르겠다. 생물학적 죽음은 누구에게나 평등할지 몰라도 익명화되고 추상화된 기호로 계량되는 사회적 죽음은 삶 못지않게 불평등하다. 역병으로 목숨을 잃은 사람이 이미 세계대전의 희생자 숫자를 넘어섰다는 보도는 우리가 지금 기묘한 전쟁을 겪는 느낌마저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그 전쟁 양상은 눈에 보이지 않는 적을 피하려고 바닥에 잔뜩 몸을 웅크리고 숨어있는 참호전을 연상시킨다. 탄도를 알 수 없는 유탄 때문에 누구나 불안에 떨고 밀집 대형에 떨어진 폭탄 하나가 단시간에 큰 희생자를 낳기도 한다. 전쟁 통에는 개별적 이별의 의식은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리적 애도 작업은 생략될 수 없으니 언제일지 모르나 인류는 반드시 전후에 기나긴 집단적 애도 기간을 거쳐야만 할 것이다. 목전에서 저승사자가 험악한 표정을 짓는 상황에서는 오로지 생존본능이 앞서서 미처 삶과 죽음, 상실과 이별의 의미를 헤아릴 겨를이 없다. 어느 나라에서나 거의 독립적 문학 장르로 취급되는 전후문학은 전쟁이 끝나고 일정 기간이 지나야 비로소 제대로 내용과 품격을 갖추게 된다. 일종의 지체 효과라 불리는 시간이 지나야 불행의 크기와 의미를 실감하고 나아가 사적 개인의 구체적 비극이 형상화된다. 이름 없이 죽어간 전몰 무명용사의 추모비도 그즈음에서야 여기저기 세워지게 마련이다.

백신 분배를 둘러싸고 내세우는 논리도 인력과 자원이 제한된 조건 속에서 치료의 우선순위를 정하는 야전병원을 떠오르게 한다. 한 달이면 끝나리라 장담했던 1차 대전이 기나긴 소모전에 돌입하자 들것에 실려 온 부상자는 응급처치 후 즉시 전선에 재투입될 수 있는 경우, 치료하면 생명은 구할 수 있으나 전투에는 부적합하여 후송되는 경우, 그리고 아무리 치료해도 결국 사망할 경우로 분류되어 치료의 우선순위가 결정되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역병과의 전쟁에서 오늘날 치료의 우선순위는 오로지 개개인의 생명 그 자체의 존귀함으로 결정된다. 거기에는 사전 부고의 평가 기준이 끼어들 수 없다. 백신을 둘러싸고 자국 우선주의는 작동하지만 한 국가에서 공적 영역의 영향력이 잣대로 개입하지 않고 오로지 개개인의 생명이 평등하다는 합의가 보편화된 것은 다행스러운 현상이다. 침몰하는 배에서 노약자에게 구명보트를 양보하는 것이 문명의 소산이고 선장이 가장 먼저 속옷 바람으로 구명정에 오르는 것은 동물의 왕국이다. 

 

 

한 인간의 정체성을 혈통이나 계급. 혹은 빈부로 환원하지 않는 정신은 근대의 산물이다. 만인이 법 앞에 평등하며 어떤 경우라도 양도할 수 없는 자유를 누린다는 상식은 적어도 바스티유 사건 이전에는 누구나 공감하는 보편적 상식이 아니었고 『인권의 발명』의 저자 린 헌트에 따르면 프랑스에서 1789년 8월 27일 “잠정 체결”된 “인권과 시민의 권리 선언”은 40명의 위원이 급조한 조악한 문장에 불과했다. 그것은 13년 전인 1776년 6월 토머스 제퍼슨이 작성한 “미국 독립선언문”을 참고하여 윤문한 것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린 헌트의 주장에서 흥미로운 대목은 인간의 평등과 자유의 토대가 된 인권 개념은 합리적 추론뿐 아니라 당시 널리 퍼진 정서적 공감대에 기반했으며 그 정서의 확산에 문학이 크게 기여했다는 점이다. 문학 중에서도 고전적 장르인 서사시와 연극이 아니라 당시에는 주류 장르가 아닌 소설이었다는 점이 흥미롭다. 그는 18세기 계몽주의 시대에 싹튼 신생 장르인 소설 중에서도 서간체 소설이 평범한 개인의 주관적 영역을 앞세워 개인주의의 소중한 덕목을 독자에게 의식화한 장르였다고 주장했다. 국가의 존망이나 가문의 명예와 같은 공적 가치를 추구하는 고전적 주인공과 달리 근대 소설에서는 주로 관습과 제도를 외면하고 오로지 주관적 감정의 소산인 사랑으로 고뇌하는 인간이 전면에 등장했다. 한 남자의 불륜이 트로이 전쟁을 일으켜 서구 최초의 문학이 되었다면 장 자크 루소의 『신 엘로이즈』에 등장하는 고독한 개인의 사랑은 어떤 집단적 반향도 일으키지 않는 사적 영역에 속한다. 그 감정을 표현하는 데 적합한 형식인 편지나 일기는 당사자 외에는 아예 훔쳐보는 것이 공적으로 금지된 내밀한 글이다. 린 헌트는 “18세기 소설 독자들은 공감대를 확장하는 법을 배웠다. (…) 이러한 배움의 과정이 없었다면 평등은 깊은 의미를, 특히 정치적 성과를 얻지 못했을 것이다. (…) 사람들은 사회적 경계를 넘어 동일시하는 능력을 획득했을 것이다. 소설 읽기만이 유일한 방식은 아니었으나 소설 읽기는 특별히 시의적절했다. 그 이유는 부분적으로, 특정 소설–서한 소설-의 전성시대가 인권의 탄생 시기와 일치하기 때문이다. (…) 소설이 상승세를 탄 이유가 무엇이든, 나는 그 심리적 효과가 그것이 인권의 등장과 연관되는 방식에 관심이 있다.” (같은 책, 48~49쪽)고 주장했다. 한 번의 선언으로 인간사가 바뀔 수 없으니 프랑스 혁명이 인종과 성별, 그리고 신분의 평등을 온전히 실현하지 못한 반쪽의 개혁이었지만 타인에 대한 공감 능력의 확장은 비록 시간은 걸렸지만 노예제나 고문제도와 같은 제도적 폭력의 제거에 공감대를 이루는 데 기여했다. 한 인간이 혈통이나 집단의 관습과 규칙에 따라 정체성이 좌우되는 구성요소에서 벗어난 자신만의 고유한 사적 영역을 확보하는 것은 거창한 철학이 아니라 사소한 일상에서도 나타난다. 한 그릇에 공동의 음식을 모아놓고 제각기 자신의 몫을 떼어가던 식탁 풍습에 슬그머니 개인용 식기 일체가 도입되면서 식탁에 개인 영역이 생기고 자신만의 몫이 확보되는 것은 집단과 구별되는 신체를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래서 린 헌트는 “고문에 대한 비평 또한 서한 소설 읽기가 물리적 결과, 즉 뇌의 변화로 전이되고 사회적 정치적 삶을 조직에 관한 새로운 개념들로 재귀하는 발상에 근거를 두고 있다. 새로운 독서는 새로운 개인적 경험(공감)을 창출했고 그것은 다시 새로운 사회적, 정치적 관념(인권)을 낳았다”고 주장한 것이다. 린 헌트가 서간체 소설이 당대 독자들에게 고독한 개인의 가치를 고양하여 인권을 발명에 기여한 점을 주목했다면 미셀 콩데는 일인칭 화자의 소설과 개인주의의 관련성에 주목했다. 그는 계몽주의적 이성에 토대한 18세기 소설과 그다음 세기에 본격적으로 주류 장르로 부상한 낭만주의 계열의 소설을 비교하며 지난 세기의 서간체 소설과의 차이점을 분석했다. 낭만주의 소설의 주인공은 개인의 주체성과 감정을 더욱 강조한 나머지 세계 질서에 편입되지 못한 채 외부 세계와 담을 쌓고 자신만의 유일성을 천착한 특징을 보인다는 것이 미셀 콩트의 주장이다. 예컨대 루소의 주인공은 비록 사회적 규범과 가치를 거스르는 사유와 행동을 저지른 후 개인과 사회 간의 균형추를 잡으려는 의지를 버리지 않는 고백과 회한이 따랐지만 『적과 흑』의 주인공을 심판하는 판사와 비록 미수로 끝났지만 살인을 시도한 주인공 사이에서 화자 스탕달이 취한 입장은 중립적이거나 모호했다. 소설가는 등장인물의 행동에 대한 판단을 유보하고 그저 묘사하는 데에 그침으로써 독자에게 그 해석의 권한을 넘겼다고 볼 수 있다. 소설의 의미를 둘러싼 “해석 전쟁”은 의견의 다양성을 전제해야만 가능하다. 우리의 삶은 일목요연하게 파악될 수 없고 인간으로서 통제할 수 없는 우연과 모순이 혼재하고 그 다양하고 예외적, 개별적 사안을 획일적 기준으로 심판할 수 없다. 사회를 구성하는 최소 단위인 개인은 유니크하며 그 특성을 이해하고 인정하는 태도는 소설 읽기로 함양된다. 이 대목이 린 헌트와 미셀 콩데가 만나는 지점이다. 인간의 사적 영역과 가치관의 다양성을 전제해야만 가능한 장르인 소설이 전 세계 그 다른 어느 곳도 아니라 유럽의 특정 시기에 발흥했다는 것은 밀란 쿤데라가 줄곧 견지해왔던 태도이기도 하다. 어릴 적부터 음악을 전공하다가, 서정시를 발표하고 대학에서 영화를 가르치던 그는 마침내 오로지 소설만이 자신의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장르임을 깨닫는다. 소설은 그 어떤 전통적 규칙도 없고 소설 속에 철학적 사유와 범부의 치졸한 생각과 불륜, 시대정신 등을 그 어떤 형식에도 구속되지 않고 섞어서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장르란 것이 쿤데라의 생각이다. 소설의 내용이 평등과 다양성을 담는다면 그 형식은 가장 자유로운 무정형이란 점은 비단 그만의 발견이 아니다. 고전 연극은 율격을 지키는 대사와 무대라는 공간적 제약을 견디어야 하며 흔히 말하는 시공간과 사건의 일치를 지켜야 했으며 시는 자연스러운 감정의 발로를 엄격한 율격의 틀에 맞춰 정해진 어휘로 표현해야 하는 제약이 따른다. 반면 처음부터 산문형식으로 시작된 소설은 소재 선택에서 표현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작가의 자유의지에 달려있다. 굳이 따라야 하는 규칙을 꼽는다면 “개연성”이 소설의 진실성을 보장하는 유일한 항목이지만 그 규칙마저도 유연하게 변주가 가능한 조건이다. 전통적 문학 장르 중에서 소설만이 가장 유연하게 진화를 거듭하며 세기가 바뀌어도 여전히 생존하는 이유 중 하나가 내용과 형식이 누리는 자유에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소설 읽기가 과연 인권과 민주주의, 공동체의 제도변혁에 직접적 원동력이 되었는지는 사실 아직도 논의의 여지가 남았다.

최근 프랑스에서는 방역이 개인의 자유를 훼손하며 사생활을 침해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거리로 몰려나와 집단적 행동을 이어가고 있다. 백신을 접종하지 않는 사람은 공간적 자유를 제한하자, 가슴에 노란 표식을 달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노란 표식은 유럽인의 원죄의식을 자극하는 유대인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타인의 생명에 위협을 가하는 개인의 자유를 주장하는 것은 무책임하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지만 평등과 자유, 공정성과 같은 항목은 그 어떤 희생을 치루더라도 양보할 수 없는 가치라는 목소리도 공감을 얻고 있다. 이성적, 법리적 판단은 접어두고 그 사회에 숨 쉬는 공기처럼 자연스럽게 넓고 깊게 퍼진 이념과 정서를 제한하는 것에 대한 반발이 다른 어느 나라보다도 거세고 질기다. 전염병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이견과 저항은 인간의 인간다움을 결정짓는 경계선을 재설정하는 데로 이어지고 있다. 포화 속에서 가족의 시체 곁에 앉아 밥을 먹어야 했던 전쟁 상황이 종료되면 인간의 조건을 되묻는 작업이 뒤따를 것이다.

이재룡
숭실대학교 불어불문학과 교수, 1956년생
저서 『꿀벌의 언어』 『소설, 때때로 맑음 1,2,3』 , 불역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욕조』 『W 또는 유년의 기억』 『모더니티의 다섯 개 역설』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