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초대석
도저한 자유-지성의 부드러운 성찰

- 김병익 선생과의 대화

  • 대산초대석
  • 2021년 가을호 (통권 81호)
도저한 자유-지성의 부드러운 성찰

- 김병익 선생과의 대화

 

 

김병익


비평가, 1938년생
저서 『상황과 상상력』 『지성과 문학』 『들린 시대의 문학』 『전망을 위한 성찰』 『열림과 일굼』 『숨은 진실과 문학』 『새로운 글쓰기와 문학의 진정성』 『21세기를 받아들이기 위하여』 『그래도 문학이 있어야 할 이유』 『기억의 타작』 등



반세기 넘게 한국문학의 현장에서 비평의 역사를 끊임없이 새로 써 온 비평가 김병익 선생을, 7월 6일 오후 2시 서교동 문학과지성사 회의실에서 만났다. 깊은 기억을 돌아보고 현재 상황을 톺아보며 보이지 않은 미래를 내다보는 성찰의 말씀을, 시종 부드러운 어조로 전해 주셨다. 한국 문학사의 지성적 전통을 발견하고 지성과 문학적 품격을 접목하여 한국문학의 지성적 위의를 두드러지게 한 비평가, 4·19정신의 바탕 위에서 순 한글세대 이후 새로운 감수성의 근원과 맥락을 탐사하면서 한국문학 장을 새롭게 열어온 평론가, 현실의 고통을 부드럽게 껴안으면서 깊이 있는 성찰을 통해 자신의 읽기-쓰기의 모든 순간이 새로운 한국 문화 형성의 궤적이 되기를 꿈꾸었고 결과적으로 시대정신의 심연에서 지성의 탈주선을 그렸던 문학가……

그런 김병익 선생은 최근에 ‘만년의 양식을 찾아서’ 시리즈에 무척 공들이셨다. 『시선의 저편』(2016)에 이은 『생각의 저편』(2021)이 바로 그것. 선생은 『조용한 걸음으로』(2013)를 펴낼 때, “자유로운 읽기-쓰기” 혹은 “인문학적 읽기-쓰기”의 즐거움을 논하면서, “‘만년의 양식’으로 얻은 자연의 선물”이라고 하셨다. 그 선물을 함께 나눠주신 데 경의를 표하면서 이 ‘만년의 양식’ 이야기로 대화를 시작했다.

만년의 양식, 돌아보기, 내다보기


김병익 만년의 양식이라는 말, 참 멋있지요? 어려서는 그리움과 소망, 젊어서는 열정과 욕망, 중년이면 사유와 이해, 늙으면 예의와 관용, 이런 변화를 거쳐 다다르는 것이 ‘만년의 양식’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 말은 오에 겐자부로가 에드워드 사이드에게 보낸 서신에서 발견한 것인데요. 이 세계에 대해 조용히 사유하면서 약간 파세틱(pathetic)한 표정을 짓는 노인의 모습을 그리고 있어요. 밀려나거나 물러난 노년의 존재와 의식에 관한 여러 생각을 하게 하는 장면이었어요. 시간에 대한 예의랄까 삶에 대한 경의랄까, 그런 것도 떠오릅니다. 저 자신이 소망하는 모습이기도 해서 얻어다 쓴 것입니다. 저는 신문사 문화부 기자, 동인지 편집자, 출판사 발행인-편집자, 저자, 역자, 비평가, 독자 등 줄곧 책과 인연을 맺으며 살아왔는데, 여전히 책과 더불어 만년의 양식을 일굴 수 있다는 게 감사할 따름입니다.

우찬제 그윽하면서도 파세틱한 표정이 떠오르네요. 『생각의 저편』에 덧붙인 글 「‘늙은’ 칼럼리스트의 심사」의 끝부분에서 “젊었을 때의 나는 거창하게 ‘문명비평가’일 수 있기를 꿈꾸었다.”라는 문장의 서술자도 그런 모습 아닐까요? 엘리아스 카네티의 『군중과 권력』 같은 책을 읽을 때, 저는 자연스럽게 김 선생님을 떠올린 적이 있었는데요. 젊었을 때 문명비평가의 꿈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그리고 “한갓 소망으로 그치고 만 것이 분명하지만” 같은 구절을 고쳐 쓰실 마음은 없으신지요?

김병익 방금 말씀드린 것처럼 저는 책을 매개로 한 지적 세계를 자유 지식인으로 살아왔습니다. 어떤 특정 분야에 매달리기보다 전체를 통찰할 수 있는 종합적인 시선, 포괄적 이해를 통한 역사적 전망을 지향하는 자유 지식인이고 싶었지요. 그런데 현실과 세계의 변화는 그 전체적 통찰의 너머로 늘 달아나는 느낌이었어요. 지난 몇 십 년 동안 우리는 그야말로 대단한 인류사적 전환의 시기를 살아왔으니까요. 아날로그 체계에서 디지털적인 인식 체계로 바꾸었다는 것, 지구적 차원에서 우주적 시야로 확장했다는 것, 실제 세계에서 가상의 세계로 들어가기 시작했다는 것, 이제껏 인간사/인류사 중심이었던 역사도 선사나 미래사까지 확대되고 있다는 것, 더 나아가 인간이 다른 행성에 가서 살게 되는 미래사가 열릴 수 있다는 것, 또 인간의 개념도 태생적 인간에서 DNA 조작으로 인한 디자인된 인간으로 바뀔 수 있는 단계에 와 있다는 것…… 이런 변화를 제 생애 안에 압축적으로 경험했지요. 대체로 밀레니엄 시기 이후 최근 몇 십 년 사이에 일어난 일입니다. 유발 하라리 등이 보고하는 자료에 따르면 태초에 사피엔스가 말을 만들기 시작한 시기가 약 7만 년 전이고, 원시적 채취 사회에서 농업 사회로 전환하면서 공동 사회를 형성한 게 만 년에서 5천 년 전, 문자를 만든 것이 5천 년 전, 구텐베르크가 인쇄 기술을 개발하여 지식 보급을 가능케 한 것이 700년 전쯤 된다고 하지요. 이런 인류사의 긴 시간대를 생각해 보면 정말 짧은 시간 안에 많은 변화가 있었던 셈입니다. 나라 안으로 국한해 보더라도 가장 후진적인 농촌 사회에서 선진적인 문명사회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운 경험을 제 생애 안에서 다 하게 되네요. 그 변화를 어떻게 관찰하고 내다보느냐가 중요할 텐데, 저는 그냥 문명비평의 초보적인 단계에서 머문 정도일 것 같습니다.

 

김병익 비평가(왼쪽)와 우찬제 비평가(오른쪽)  

 

‘out of order’의 부끄러움과 미덕으로서의 부끄러움

선생은 언제나처럼 겸허하게 목소리를 낮추신다. 넓게 조망하고 깊이 성찰하지만 자신을 드러내는 일에는 어려워하신다. 결코 소란스럽거나 번쩍거리지 않지만, 선생의 말씀은 사태의 진상과 진실의 벼리 가까운 곳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하고 보니 선생의 책을 읽으면서 밑줄을 긋고 형광펜으로 돋을새김을 하고 포스트잇을 붙이는 자리가 많아지는 것은 무척 자연스럽다. 가령 「2020년, 그 설운 설에 ‘다시’」를 읽으며 이런 대목에 밑줄을 친다. “잘 살게 되었는데 잘 살기의 경쟁이 사회적 갈등을 심화했고 자기 성장을 위해 출산도 결혼도 단념함으로써 삶의 자연적인 단계들을 포기하고 오히려 혼자-살기, 홀로-죽기 판으로 졸아들고 있다”(pp. 149~150). 또 이런 대목에 형광펜으로 하이라이트를 하고 포스트잇을 붙인다. “내가 정녕 부정하기 어려운 것은 성장이 반드시 발전이 아니며 풍부가 풍요를 뜻하는 것이 아니고 그 발전과 풍요가 인간 행복의 지표가 되지 않는다는 것, 편리가 반드시 즐거움이 아니고 빠름은 오히려 두려움일 수 있고 개혁이 개선과 같지 않다는 것, 신념은 부끄러움을 모르고 권력은 정의를 버리며 문명이 공정함과 관계없고 진보가 평화를 괴롭힐 수 있다는 등의 것들이다. 그래서 희망은 실망을 불러오고 기대는 회의를 안고 있는 것이리라.”(p. 150). 이렇게 상황이나 사태를 전면적으로 성찰할 때 부끄러움이 앞서고 희망적인 낙관은 뒷걸음질한다. 그도 그럴 것이 도처에서 여러 ‘out of~’의 상태를 관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생각의 저편』에서 선생은 ‘out of order’, ‘out of system’, ‘out of being’이란 표현을 조금 다르게 풀어 쓰며 그 용처가 참으로 많음을 시사하셨다. 도대체 이 ‘out of~’의 상태를 어찌할 것인가?

김병익 정상에서 벗어난, 양식에서 엇나간, 체통으로부터 어긋난, 원래의 중심기둥에서 훌쩍 벗어난, 그런 상태를 바로 봐야 한다는 거지요. 다 아는 얘기지만 절차나 형식, 양식 같은 것은 민주주의의 기본 프로그램으로, 우리가 존중하고 수행해야 하는 기본 틀 같은 것이지요. 그런데 그런 중심기둥으로부터 벗어나면 어찌 되나요? 만약 왜곡된 정치적 현실, 일그러진 사회적 풍향 이런 것들이 주류를 관통하면 그건 너무 절망적이겠지요. 하지만 누구나 그런 상태에 처할 수 있기에 부끄러움의 정조나 윤리가 매우 중요합니다. 어쨌든 잘못되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당자들에게 부끄러움을 야기하는 것이니까요. 그 중심기둥으로부터 벗어나 혼자 있을 때 원초적인 정조가 부

끄러움이고, 그것을 반성적으로 의식화하면 윤리적인 죄의식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저는 윤동주에게서 참 아름다운 부끄러움, 미덕으로서의 부끄러움을 보게 됩니다. 돌이켜보니 1970년대 유신 시절 글을 쓰면서 부끄러움이라는 말을 참 많이 썼데요. 내가 다 책임질 수 없지만, 그럼에도 그 사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죄스러움이나 유감, 이런 심정을 부끄러움이란 말로 쓴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듭니다.


청소년기 한때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인 적이 있고 실존주의에 심취한 적이 있는 선생은 우선 부끄러움의 담론을 펼친다. 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한 선생이 보시기에 특히 작금의 ‘정치적 인간’의 현주소는 무척 유감스럽다.

김병익 큰 눈으로 볼 때 우리 사회는 그동안 대단히 발전했어요. 경제적으로나 과학 기술 그리고 문화적으로나 정말 비약적으로 좋아졌지요. 그런 여러 변화와 발전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인간은 그다지 발전적으로 변화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우리뿐만 아니라 외국도 사정은 비슷한 것 같아요. 가령 미국도 최근 도널드 트럼프 시절 가중된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 문제가 진지하게 논의되고 있던데요. 『불만 시대의 자본주의』에서 조지프 스티글리츠도 매우 혹독하게 비판하고 있더군요. 물론 공공 영역에 대한 사유나 인권, 여성, 소수자 문제 등 여러 제도적, 문화적, 인식적인 측면에서 성장한 부문도 많이 있지만, 여전히 ‘정치적 인간’, 좁혀 말해서 정치인들의 품격은 별로 성장하지 못한 것 같아, 정치학을 전공한 저로서는 억울하고 안타깝습니다.

에고센트릭(egocentric)을 넘어 큰 눈, 먼눈으로 역지사지(易地思之)

우찬제 정말 정치적 인간의 ‘실격’ 문제는 중요한 것 같아요. 정치적 인간의 문제를 포함한 공공 영역 전반의 공진화가 매우 요긴한데요. 그래서 선생님께서는 이해와 성찰을 위해서는 “세계를 큰 눈으로 보고 먼눈으로 받아들”(p. 163)여야 한다고 줄곧 강조해오신 게 아닐까 싶고요. 그런데 그게 참 쉽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면 “바로 보되, 약자와 패자의 아픔을 부드럽게 싸안으며 옳음을 추키되 고집 센 미움을 풀어”줄 수 있는 경지에 이를 수 있을까요?

김병익 무엇보다 자기의 자리 안을 고집하고, 실리적인 관계에 휩쓸리는 영토화된 사고로부터 벗어나는 게 좋을 것으로 보여요. 그야말로 멀리, 크게 바라보고 수용하기 위해서는 에고센트릭의 시점을 버려야 합니다. 영토 바깥, 금 밖의 시선으로 접근할 때 진실한 이해의 지평에 가까이 접근할 수 있을 테니까요.

우찬제 언제나 자신의 가장 큰 적은 자기 안에 갇히는 것이지 싶습니다. 선생님께서 관찰하신 “out of~”의 상태에 빠지는 원인 중의 하나도 그럴 것입니다. 그런데 선생님, 그 “out of~”의 상태를 넘어서기 위해서, 우리는 여기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기본적으로는 선생님께서 강조하시는 “인문적 덕성과 윤리적 관용”, 그리고 “공감의 진화”, 이런 쪽에서 시작해야겠지요?

김병익 잘못, 부정, 부도덕에 대해 반성하고 새로운 삶의 지평을 열기 위한 노력은 다각적으로 전개되는 게 좋을 것입니다. 그동안 저도 이런저런 얘기를 했지만 결국 긍정과 부정의 변증법적 관계에 대한 인식의 폭이 확대되고 심화해야 하지 않을까 싶네요. 좋은 것이 있으면 그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것, 어려운 것이 있으면 그 성취 과정에서의 노고를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부정과 긍정 양면을 동시에 성찰할 수 있는 인식의 태도를 먼저 정립하면 좋겠어요. 요컨대 자기중심적인 에고센트릭의 틀을 벗어나야 합니다. 예전부터 역지사지(易地思之)를 강조했잖아요. 비록 오래된 낡은 말이지만 생각할수록 의미심장하게 다가와요. 세계나 인간이나 사태에 대해서 우리가 이해하고 접근할 수 있는 가장 정당한 태도는 거기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닐까 짐작합니다. 자기 허물을 겸손하게 인정하고 타인의 덕성이나 성취를 존중하고 공정하게 평가할 수 있는 예지도 거기서 비롯될 것입니다. 그런 바탕 위에서 고장 나고 탈 난 삶의 지형을 웰빙의 지평으로 전환해 나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허망하기에 희망한다!?

그런 긍정적 전환과 질적 변환에 대한 선생의 소망은 도저하다. 아주 짧은 시간 동안 경제와 문화, 지식 등 여러 면에서 이른바 “압축 성장”을 해온 분단국가에 살면서 선생은 늘 문제 상황에 대면하여 다채로운 지성의 성찰을 종합하기 위한 모색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신문사 기자로 출발한 선생이 만년에 칼럼 작업에 공들인 것도 이런 사정과 관련되리라. 실제로 선생의 ‘만년의 양식을 찾아서’ 시리즈를 읽다 보면, 선생께서 관찰하고 발견한 문제들, 그리고 그 문제의 강을 건너기 위한 지혜의 향방에 대한 부드러운 안내를 따라가면서, 새 출발의 가능성을 가늠하게 된다. 때때로 선생의 문장은 뮤즈의 축복 속에서 비범한 아우라를 형성하기도 한다. 가령 「고흐의 증례」에서 오랜 문우인 마종기 시인에게 보낸 메일의 한 대목을 인용하고 있는데, 무척 감동적으로 다가온다. “이 세계가 허망하기에 신뢰를 지켜야 한다는 것, 이 시대가 죄스럽기에 존중할 것이 있어야 한다는 것, 이 사회가 위선이기에 관용이 필요하다는 것, 인간들이 포악한 존재이기에 선의가 피어나야 한다는 것, 삶이 고통스럽기에 유머가 허용되어야 한다는 것”(p. 73). 이런 인문적이고 윤리적인 마음의 무늬 위에서라면 다시 희망을 노래할 수 있지 않을까?


김병익 8주에 한 번씩 쓴 글들입니다. 7주 동안 생각하고 궁리하고 탐문하다가 한 주 동안 썼는데, 때때로 시적 영감처럼 예기치 않은 표현들이 떠오를 때가 있어요. 마종기 시인에게 보낸 메일도 그런 경우였지요. 많은 분이 그 대목을 말씀하시던데, 어쩌면 절망스러운 현실일지라도 결코 절망하지 말고 정녕 진정한 삶의 희망을 좇아야 한다는 생각은 우리 4·19세대의 집단무의식의 하나가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내면의 깊이나 정서적 각성, 윤리적 덕성 같은 것은 개인의 존재를 값지게 하는 상징적 자산입니다. 교육이나 사회적 계도, 경제 사회적 복지 같은 것으로 도움을 줄 수는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개인에서 출발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긍정적인 측면에서의 옛 선비 문화가 그랬듯이, 경제적으로는 가난하더라도 개인의 덕성이나 각성으로 분출되거나 전파된 내면의 무늬들이 문화를 고양하고 삶의 양식을 진화의 방향으로 이끄는 데 도움이 되는 분위기가 형성되기를 바랍니다. 예컨대 제가 여러 책에서 발견하여 나름대로 강조한 ‘검소한 풍요’나 ‘성장 없는 발전’, ‘경쟁하는 공존’, 이런 것들도 대개 개인의 덕성과 각성, 그리고 그것들의 회통과 교감 없이는 성찰하기 어려운 것들이지요.

빛나되 번쩍이지 않는[光而不輝] 덕성과 부드러운 성찰

우찬제 『시선의 저편』에서 두 번에 걸쳐 “빛나되 번쩍이지 않는[光而不輝]” 경지를 강조하신 바 있습니다. 방금 말씀하신 개인의 덕성과 관련하여 매우 중요할 것 같습니다만……

김병익 정민 교수의 책을 읽다가 개인적인 덕성을 생각하며 쓴 말인데 문화나 국가 차원에 적용해도 되겠네요. 1980년대 중국의 덩샤오핑이 강조한 도광양회(韜光養晦)를 겹쳐서 생각해 봐도 좋겠습니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때를 기다리며 실력을 기른다는 이 말은 당시 중국의 대외 정책의 기조였어요. 오늘날 중국이 G2로 도약하게 된 먼 원인 중의 하나가 아닐까 짐작하는데요. 나한테 빛나는 장점이 있더라도 번쩍거릴 정도로 요란하게 드러내지 않고 안으로 숨기고 말을 줄이며 내적 성찰을 거듭하며 겸손한 자부심을 키우다 보면 개인의 덕성이나 조직의 덕성도 자연스레 함양될 것으로 봅니다. 이런 ‘광이불휘’나 ‘도광양회’에 터를 두고 성찰하노라면 상반되어 충돌하고 소용돌이치는 것들을 한꺼번에 싸안으며 종합적으로 진실을 발견해 나갈 수 있을 것으로 믿어요. 발전보다는 인간의 행복을 추구하는 부탄의 경우, ‘경쟁 없는 공존’, ‘성장 없는 발전’ 같이 모순된 것들을 종합적으로 성찰할 수 있는 국민적 덕성을 지닌 대표적인 사례로 봐도 좋지 않을까요?

며칠 전 세계무역기구에서 우리나라를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으로 격상시켰다네요. 세계 첫 사례라던데, 그것을 당당하게 받아들일 정도로 단기간에 압축 성장해 왔지요. 그 때문에 지나치게 번쩍이는 측면도 보게 됩니다. 지닌 것을 너무 자랑하거나 드러내려 하다가 자기 함정에 빠지지 않을까, 그런 우려도 있지요. 다만 식민지와 분단, 전쟁과 군사독재 등을 겪으면서 반성도 많이 하고 극복하려고 싸웠던 경험이 여전히 긍정적인 DNA로 작용할 수 있지 않을까 짐작합니다. 국가 지향에 대한 엄정한 반성과 진지한 성찰을 통해, 개인적 덕성과 국가적 국민적 덕성이 공진화하면 좋겠습니다.


우찬제 지금까지의 말씀 중에서 드러나기도 한 것 같습니다만, 선생님 인생과 비평의 열쇠말 10개를 골라주시지요. 그리고 그 열쇠말을 가로지르며 선생님의 중핵적인 ‘인생 질문’을 제시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김병익 글쎄요. 어쩌면 그랬다기보다 그러고 싶었던 것일 수 있겠는데요. 우선 ‘삶’이라는 말을 많이 썼는데 존재 자체에 대한 탐문을 위해서 불가피한 것이었겠지요. 비평을 하면서 ‘진실’, ‘이해’, ‘성찰’을 자주 강조했습니다. 실존주의 의식 속에서 ‘절망’이란 단어를 많이 썼고, 긍정과 부정 그 양면을 한꺼번에 포괄할 수 있는 ‘역설’이라는 말도 참 많이 썼더군요. 이런 명사들을 형용하는 말들이 따라옵니다. ‘부드러움’, ‘조용함’, ‘따뜻함’, ‘순결’, 이런 것들은 저한테 모자란 것이기에 관심을 보태고 추구하려 했던 것이지요. 그 열 마디를 모아서 본다면 ‘삶을 향한 부드러운 성찰’이라고 종합할 수 있을까요? ‘삶’은 대상(對象)이고 ‘부드러움’은 양상(樣相), ‘성찰’은 행한다는 행상(行狀)이겠는데요. 그저 그러고 싶었다는 겁니다.

당신의 육체적 쇠락을 말씀하시면서 선생은 새로운 세대에 대한 부드러운 기대의 정념을 보인다. 새로운 미래 세대를 적극 성원하는 선생은 그러면서도 여전히 새 세대와 대화하면서 역동적으로 읽고, 돌아보고, 내다보고, 쓰는 자유로운 지성(선생은 자유-지식인이라고 말씀하셨지만 나는 슬그머니 자유-지성으로 바꾸어 쓰고 싶어진다)으로 지혜를 계속 나누어주실 것으로 믿는다. 이 도저한 자유-지성의 부드러운 성찰은 더욱 깊어질 것이다.

우찬제
비평가, 1962년생
저서 『욕망의 시학』 『상처와 상징』 『타자의 목소리』 『고독한 공생』 『프로테우스의 탈주』 『애도의 심연』 『텍스트의 수사학』 『불안의 수사학』 『나무의 수사학』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