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후기
세계와 타자를 향해 열려있는 시들

불역 한국 동시대시인 시선집
『지금은 세계가 확장되는 시간 - 우리 시대의 11인 한국시인』

  • 번역후기
  • 2021년 겨울호 (통권 82호)
세계와 타자를 향해 열려있는 시들

불역 한국 동시대시인 시선집
『지금은 세계가 확장되는 시간 - 우리 시대의 11인 한국시인』

 

올해 10월에 한국시인 시선집이 불역되어 브뤼노 두세(Bruno Doucey) 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 제목은 『지금은 세계가 확장되는 시간 - 우리 시대의 11인 한국시인 (C’est l’heure où le monde s’agrandit - Onze poètes coréens de notre temps)』으로 시인이며 출판사 대표인 브뤼노 두세가 안현미의 시 「사랑」에서 따왔다. 그간 코로나 팬데믹이 일 년 반이 넘도록 전 인류를 공황 상태로 몰고 온갖 제약조건으로 옭아매었다. 그러나 이제 우리가 서서히 봉쇄와 감금에서 벗어나 다시 활동의 자유와 안정을 되찾게 되는 이 시기에 부합하는 희망찬 표제로 다가온다. 우리시대 젊은 작가들의 시가 담긴 이 책은 밝고 부드러우면서도 힘찬 느낌을 주는 북커버로 되어있는데 출판사의 그래픽 디자이너가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 동이 틀 때의 색조와 이미지를 연상시키고자 했다고 한다.

한국시인선집을 내가 처음으로 구상해본 것은 2016년 파리 도서전을 앞두고서였다. 한국이 이 행사의 주빈국으로 선정되어 불어로 번역된 한국 문학작품이 여느 해보다 많이 기획되었고 출판되었다. 그러나 그때는 시일이 촉박하여 브뤼노 두세와 나는 진은영 시인의 개인 시선집 형식으로 『붉은 눈송이(Des flocons de neige rouge)』를 출간한 걸로 만족하였다. 그 후 좋은 한국시를 읽게 되면 그 작가들의 시들을 번역하여 프랑스 독자에게 알리고 싶다는 마음이 항상 절실하였다. 그러므로 이 시선집은 한 권의 책으로 여러 시인들을 알리고 싶은 나의 욕망에서 구상되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시인을 선정하는 데는 브뤼노 두세의 견해를 참작하였다. 너무 많은 시인을 택하여 지면 관계상 한 시인당 서너 편의 시만 소개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게 되면 자칫 산만해져서 수박 겉핥기식이 될 것 같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그리고 출판사의 독자층이 선호하는 경향의 시들을 고려하였다. 브뤼노 두세의 출판 이념에 따라 관대하고 열려있는 시, 서정성과 사회 연대의식이 담긴 시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하였다. 그 반면에 현대 시어의 모더니즘이 지나치게 표현된 실험적인 언어유희로 된 시나, 감동이 배제된 난해한 시들은 기피하였다.

처음에 시선집을 구상하여 시인을 선정할 때 무척 갈등이 많았다. 평소에 호감을 갖고 읽었던 시인들도 막상 시선집에 넣으려 하니 여러 가지 측면에서 고려해 볼 때 적합하지 않았다. 특히 여성 시인들의 경우 과거 서정시와의 단절이 더욱 심화된 경향이어서 시 쓰기에 있어서도 과감하고 혁신적인 문체와 작법이 남성 시인들보다 더욱 두드러져 보였다. 내가 개인적으로 갖는 시인에 대한 친밀감에도 불구하고 <누구라도 읽고 이해할 수 있는 시>를 선호하는 브뤼노 두세의 입장에 맞춰 아쉽게도 단념한 여성 시인들이 여럿 된다. 시 선정에 있어서는 오래전부터 시인들의 작품 세계를 대략 파악하고 있었고 나름대로 친숙했던 시들이라 이 작업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한 작가의 단행본이나 개인 선집을 번역하는 경우와는 달리 11인 시인의 각각의 목소리와 결이 제대로 전달되는 번역을 하는 작업에서는 각별한 열정과 지난한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내가 불역 시선집을 기획하고 있다는 걸 알리자 수십 권의 시집을 선뜻 소포로 부쳐준 이병률 시인에게 이 글을 통해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다. 막막한 모험을 시도하는 심경으로 있었을 때 얼마나 큰 격려가 되었는지 모른다. 실제로 번역 작업 중에도 시인들이 파일로 보내 준 텍스트에 미심쩍은 부분이 있을 때면 몇 번씩 이 시집들을 참조하곤 했다.

프랑스에 이제까지 출판된 한국 시선집이나 시문예지를 살펴보면, 대부분의 경우 한국시인을 총망라하여, 일제강점기에 태어난 시인부터 한국동란을 겪고 독재 정권에 맞서 민주화 투쟁에 헌신한 시인들, 그리고 한국 전통 서정시와 또 실험적 글쓰기를 하는 젊은 시인들을 한 책에 같이 넣는 방식이 일반적이었다. 나는 이 시선집에 포함된 시인들을 선정하기에 앞서서 동시대성으로 일관된 세대적 구분을 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1964년과 1983년 사이에 태어났으며, 70년대 출생 시인들이 중심을 이루는 이 시선집에 들어간 11인 시인들은 다음과 같다. 정끝별 이영광 곽효환 이병률 김선우 심보선 진은영 문태준 안현미 유희경 박준. 이 책의 표지에 실린 브뤼노 두세의 말을 인용해 보자. “이들은 모두 경제적 기적과 고도 경쟁 사회의 동시대인들이다. 또한 그로 인해 이들은 살고 있는 세계의 의미를 여지없이 상실하게 되어버렸다. 이들은 모두 놀라운 창조적 에너지를 지녔다. 그러나 공통점은 이 정도인 반면에 이 책에서 들리는 그들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각양각색이다. 이 목소리들은 세계를 해독하기보다는 우리가 그곳에서 더 살기 좋게 세계를 확장하고자 한다.” 한편 서문을 쓴 이자벨 라캉(Ysabelle Lacamp)은 이 시선집에 대해 ‘한국적 영혼의 진정한 여행’으로서 험난했던 한국 역사에 배어있는 ‘집단적 감수성’인 ‘은밀한 멜랑콜리-한(恨)’이 이 시들에도 스며있지만 사실상 희망을 부르며 우리의 개인적 의식을 신뢰한다고 보았다.

이 책을 내는 과정에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저작권의 문제였다. 수년 이래로 한국문학의 위상이 세계적으로 높아졌고 베스트셀러 소설가들의 경우에는 해외 출판 시 상당한 인세를 받기도 한다. 문학 에이전시도 무려 500여 개나 된다고 한다. 그러나 시 출판을 전문적으로 맡아 하는 에이전시는 전혀 없다. 번역자가 저작권과 계약 조건 등 프랑스 출판사와 한국 출판사 사이에서 중개자 역할을 해야만 한다. 나는 작년에 한국문학번역원에서 주최한 번역가 레지던시에 참가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했을 때, 이 시선집과 관련된 한국의 여섯 출판사들과 저작권 문제를 원활하게 해결할 수 있었다. 한국의 대형 출판사들과는 달리 프랑스의 시 전문 출판사는 주로 독립 출판사로서 혼자 내지 소수가 운영하는 매우 영세한 규모로 상업적 이윤 창출엔 열악한 수준이다. 더구나 2020년엔 코로나 사태로 서점들이 몇 달간 영업 중지되었고 모든 낭독회며 <시의 시장(Marché de la poésie)> 및 시 페스티벌 행사가 무산되었다. 그 여파로 시집을 출판하는 많은 독립 출판사들이 파산을 하게 되었다. 브뤼노 두세 출판사는 매년 <시인들의 봄(Printemps des Poètes)> 행사 때마다 그 테마에 맞춰 앤솔로지를 내는 프랑스의 유수한 시 전문 출판사이다. 그러나 수많은 낭독회를 통해 시집을 판매해오고 있던 출판사에게 코로나로 인한 봉쇄 조치는 큰 시련이었다. 나는 브뤼노 두세 출판사의 각별히 어려운 상황을 감안하고 한국시를 프랑스에 소개하는 취지에서 저작권료를 원칙대로 요구하지 않고 출판 동의를 우호적으로 해결해 주신다면 무척 고맙겠다는 내용의 메일을 관련된 한국 출판사들에게 보냈다. 그리고 나희덕, 정끝별, 이병률 시인도 발 벗고 나서서 여러 출판사에 협조를 구하며 적극 도와주었다. 이 지면을 통해 다시금 한국의 출판사들과 다정한 시인들에게 감사드린다.

시선집 출판 보도가 나오자 파리에서 가장 오래된 동양 문학 서점 <패닉스(Le Phénix)>에서 관심을 보이며 한국시 낭독회와 독자와의 만남을 제안하였다. 내년 3월 <시인들의 봄> 행사가 프랑스 전국에서 열릴 때 코로나 시국도 더욱 진정되어 이 시선집에 등재되어 있는 시인들이 한국에서 서너 분이라도 올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기대해 본다.

※ 불역 한국 동시대시인 시선집 『지금은 세계가 확장되는 시간 - 우리 시대의 11인 한국시인 (C’est l’heure où le monde s’agrandit - Onze poètes coréens de notre temps)』은 재단의 한국문학 번역·연구·출판지원을 받아 필자의 번역으로 프랑스 브뤼노 두세 출판사에서 2021년 출간되었다.

김현자
번역가, 1957년생
역서 『사랑의 뿌리』 『바다의 아코디언』 『찬밥을 먹던 사람』 『꿈꾸는 사람』 『붉은 눈송이』 『검은 점이 있는 누에』 『15도 북서풍』 『포에지』(공역)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