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계절의 문학
노벨문학상 생각

  • 이 계절의 문학
  • 2021년 겨울호 (통권 82호)
노벨문학상 생각

해마다 노벨문학상 발표 시기가 되면 문학 담당 기자들은 긴장한다. 올해는 과연 누구의 이름이 불릴까, 제발 이름이라도 들어본 작가라면 좋겠는데, 혹시 무라카미 하루키가 받으면 기사를 얼마나 써야 하지, 만에 하나 고은 시인이 받는다면…… 수많은 가능성을 떠올리며 시나리오를 그려본다.

지난 10월 7일 올해 노벨문학상 발표일 아침에 내가 세운 기사 계획은 이렇다. 하루키가 받을 경우, 1면 스트레이트 기사(200자 원고지 5매)와 종합면에 한 페이지 분량(기사 2건·총 15매)으로. 하루키 외 다른 작가가 받을 경우 기사 한 건으로 처리하되 이름이 좀 알려진 작가는 8매, 모르는 이름이면 5〜6매 정도로.

저녁을 먹고 들어와 오후 7시부터 노벨위원회 홈페이지와 트위터를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그 전날부터 BBC, 가디언 등 유럽 쪽 언론과 하루키 수상을 목 빠지게 기다리는 일본의 야후재팬, 미국 뉴욕타임스 등을 들락거리며 분위기를 살폈다. 올해는 꼭 하루키가 받을 것이라거나 하루키가 올해는 절대 받을 수 없다는 얘기, 지난해 미국의 여성 시인이 받았으니 비유럽권 남성이 수상자가 되지 않을까 하는 전망, 매번 유력한 후보였던 앤 카슨(캐나다), 아니 에르노(프랑스), 응구기 와 시옹오(케냐), 마거릿 애트우드(캐나다) 등의 수상을 점치는 분석들이 오가고 있었다. 하지만 모두가 모르기는 마찬가지.

 

2021 노벨문학상 수상자 압둘라자크 구르나의 작품들    

 

오후 8시 드디어 수상자가 발표됐다. 홈페이지로 발표 장면을 지켜보면서도 수상자의 이름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잠시 후 트위터에 뜬 글을 보고서야 ‘Abdulrazak Gurnah’라는 이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름을 한글로 어떻게 적어야 할지도 모르는, 생전 처음 들어보는 작가였다. 비명 소리가 절로 나왔다.

하지만 무슨 수를 쓰든 기사를 써야 한다. 인물면 톱 기사 자리가 배당됐고 기사 분량은 6매로 결정됐다. 마감까지는 30여 분 정도가 남은 상황. 홈페이지 발표문을 바탕으로 기사를 만들어나가는 수밖에 없다. 전문가들한테 전화를 해서 멘트를 받을 시간도 없었다. 옆자리에서 함께 대기하던 부장과 야근 기자가 이런저런 국내외 기사를 검색하며 한두 문장씩 토스를 해줬다. 그렇게 세 명의 기자가 힘을 합쳐 겨우 기사를 만들어냈다.

“아프리카 탄자니아 출신 소설가 압둘라자크 구르나(73)가 올해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호명됐다”로 시작되는 이 기사는 그러나 6매에 도달하지 못했다. 5매에 그쳤다. 더 넣을 수 있는 내용을 확보할 수가 없었다. 구르나는 세계 문학계에서도 무명에 가까웠기 때문에 외국 자료도 거의 없었다. 원고가 빈 자리는 편집기자가 사진을 키워서 메꿨다. 이후 밤 11시에 마감되는 마지막 판에 기사를 보완해 겨우 6매를 채울 수 있었다.

기자 생활의 절반가량을 문화부에서 보내면서 본 노벨문학상 발표일 풍경은 매번 비슷했다. 문학 기자들은 혼이 나간 상태로 기사를 마감했고, 겨우 마감을 한 후에는 옆에서 도와준 기자들과 함께 술을 마시러 나갔다. 문화부의 연례 행사였다. 다만 올해는 내가 그 기사를 담당해야 한다는 점이 달랐을 뿐이다.

기사를 쓰고 나서 일주일쯤 지나고 칼럼 차례가 돌아와서 노벨문학상에 대한 얘기를 한 번 더 썼다. 기사만 가지고는 불충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발표 후 한 주가 지나는 동안 국내 언론들의 추가 기사는 거의 없었지만 외신들은 그래도 인터뷰도 하고 몇 가지 새로운 기사를 내놓았다. 그런 기사들을 보며 이 무명의 작가에 대해 조금 더 소개를 하면서 노벨문학상 문제를 함께 생각해보고 싶었다.

그렇게 쓴 칼럼이 ‘노벨문학상, 세계문학 만나는 통로’이다. 이 글에서 나는 스웨덴 한림원이 탄자니아 출신 난민 소설가를 수상자로 결정한 것이 스스로 강조해 온 ‘진정으로 탁월한 작가’ ‘탁월한 작품’이라는 방향성을 명확히 한 것이라는 분석에 동의했다. 또 작년 미국 시인 루이즈 글릭에 이어 올해 또다시 무명작가를 선택한 것은 비인기 작가들에 대한 지지로 해석될 수 있다고 봤다.

그러면서도 “노벨문학상이 세계 최고의 작가를 선출하는 건 아니다. 세계문학의 세계로 독자들을 이끈다는 점이야말로 노벨문학상의 의미가 될 수 있을 것이다”라고 얘기했다. “노벨문학상이 아니라면 우리가 어떻게 『파리대왕』(1983년 수상자 윌리엄 골딩의 소설)을 읽었을 것이며, 오에 겐자부로(일본 소설가, 1994년 수상자)나 비스와바 쉼보르스카(폴란드 시인, 1996년 수상자)를 알 수 있을까”라고 덧붙이면서.

올해도 노벨문학상 발표는 한바탕 소란을 일으키고 끝났다. 하지만 노벨문학상이 우리에게 소개해준 위대한 작가와의 만남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우선 구르나의 책부터 국내에 출간돼야 할 것이다. 난민 문제를 문학의 주제로 삼아온 구르나의 소설들이 번역돼 나오고 많이 읽히고 어느 날엔가 구르나가 한국을 방문할 수도 있기를 바란다.

수많은 한국 작가들이 수많은 이야기를 쓰고 있지만 세계적 이슈로 떠오른 난민에 대한 한국문학 작품은 만날 수 없다. 여기에 세계문학의 자리가 있는 게 아닐까. 세계문학은 우리가 세계를 만나는 또 하나의 방식이다.

김남중
국민일보 문화체육부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