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현장
②죽음을 선취한 자의 목소리

- 최돈미 영역 『Autobiography of Death (죽음의 자서전)』

  • 문학현장
  • 2021년 겨울호 (통권 82호)
②죽음을 선취한 자의 목소리

- 최돈미 영역 『Autobiography of Death (죽음의 자서전)』

아직 죽지 않아서 부끄럽지 않냐고 매년 매달 저 무덤들에서 저 저잣거리에서 질문이 솟아오르는 나라에서, 이토록 억울한 죽음이 수많은 나라에서 시를 쓴다는 것은 죽음을 선취한 자의 목소리일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 김혜순, 「시인의 말」, 『죽음의 자서전』

Which individual narrates my death? Can I call my death “I”? As I began to speak through my death, my death became “you.” My death made the “I” into “not I.”
- Kim Hyesoon, “An Interview: December 5, 2017, Seoul”

김혜순의 『죽음의 자서전』 영역자는 시인 최돈미다. 『The Morning News Is Exciting』(2010) 『Petite Manifesto』(2014) 『Hardly War』(2016) 『DMZ Colony』(2020) 등의 영문시집을 출간했으며 이중 『DMZ Colony』는 올해 미국 국립도서재단의 시 부문 수상작(National Book Award for Poetry)이다. 김혜순 시인과는 인연이 깊다. 『Mommy Must Be a Fountain of Feathers』(2005)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영어로 옮긴 김혜순 시인의 책이 다섯 권째다. 『Autobiography of Death』는 이 중 최근작이다. 일전에 이 책이 2019년 그리핀 시문학상(Griffin Poetry Prize, 국제부문)을 받았다는 소식을 접한 적이 있으나, 위의 사실은 이 책이 올해의 대산문학상 수상작으로 결정된 이후에 따로 찾아보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고백하건대, 심사를 위해 『죽음의 자서전』과 『Autobiography of Death』를 같이 읽는 시간은 힘들었다. 『죽음의 자서전』의 마지막 시 「마요 -마흔아흐레」 뒤에 수록된 「시인의 말」에서 김혜순 시인은 ‘죽음의 세계를 떠도는 몸’이 되어본 경험을 언급하면서 지하철 ‘승강장에서 쓰러진’ ‘나를 내려다본’ 이후 ‘죽음 다음의 시간들을 적었다’고 말한다. ‘죽음 다음의 시간’은 ‘나’가 더 이상 한 개인으로 존재하지 않는 시간, ‘나’는 없어졌지만 수많은 ‘너’의 목소리, ‘죽음 다음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시간이다. 읽는 동안 몸도 마음도 편치 않았다.

마흔아홉 편의 시로 구성된 김혜순의 시집은 수많은 ‘너’의 넋을 기리는 사십구재를 떠올리게 한다. 장례 절차에 한국의 문화가 응집되어 있듯, 마찬가지 의미에서 김혜순의 시는 ‘한국적’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김혜순의 시집을 영어로 읽는 것이 전통 제사를 영어로 지내는 것처럼 어색하지 않을까 내심 우려했었다. 한국인들이 ‘죽음 다음’에 내는 한탄과 비명, 애처로운 울음을 과연 영어로 번역할 수 있을까? 가령, 「간 다음에 -엿새」의 첫 연 ‘간 다음에 가지 마 하지 마 / 온 다음에 오지 마 하지 마’를 어떻게 영어로 번역할 수 있단 말인가? 「아님 -서른엿새」는 또 어떠한가? ‘아님께서 아님을 아니하시고 아님에 아니하고 아니하시니 아님이 아니하온지라 / 아님을 아니하고 아니하여 아니하대 / 아님이 아닌 아님은 아님이 아니나니 아님이 아님의 아님이요’ 같은 구절을 다른 언어로 옮길 수 있기나 할까? 김혜순을 번역한다는 건 이렇듯 지난한 작업이다. 번역 가능성의 한계 지점까지 다다른 듯한 이 시들의 어떤 면모에 이끌려 역자는 김혜순의 시를 무려 다섯 권이나 번역했을까. 역자 본인이 시인이 아니었다면 시도조차 하기 어려운 작업이 아니었을까 싶다.

『Autobiography of Death』에 수록된 역자와의 대담에서 김혜순은 죽음 이후에 ‘나’라는 주어가 없어진다고 말한다. 그의 시는 주어가 쉽게 생략되는 한국어의 특성을 십분 활용하여 죽음을 통해 ‘나’와 ‘너’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과정을 섬뜩하게 보여준다. 반대로 좀처럼 주어를 지워버리기 어려운 영어의 조건이 역자 최돈미 시인에게 큰 도전이 되었으리라 추측한다. 두 언어의 차이를 잘 보여주는 작품으로 세월호 사건을 묘사한 「물에 기대요 -나흘」을 들 수 있다.


너는 전신을 기울여 매달려요 Lean your body on the water and cling to it

감당 못 하겠어요 몸을 비틀어 Can’t bear it any longer. I twist my body
몸의 손가락을 붙잡고 holding on to the fingers of water and

물의 머리칼로 짠 외투를 입어요 wear a coat woven with water’s hair
꿇어앉아 얼굴을 덮어요 I crouch and cover my face

기울어 있는 세월호에 ‘기울여 매달’린 ‘너’를 호명하는, 또한 ‘너’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이 시에서, 우리에게조차 낯설게 느껴지는 ‘너는……매달려요’라는 구문의 ‘너는’을 최돈미는 형용사 ‘your’로 처리하고 두 번째 연에 ‘I’를 삽입하는 전략을 택하였음을 볼 수 있다. 원작에서 모호하게 처리된 부분을 번역에서는 문법의 차이 때문에 분명하게 해석하여 번역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잘 보여주는 예다. 이처럼 시를 번역할 때는 역자로서 수많은 개입을 할 수밖에 없어서 원작을 잘 이해하는 역자일수록 번역이 어렵고 힘들다. 이 번역에서 가장 큰 어려움은 주어의 위치다. 부재하는 주어를 주어 생략/삽입을 포함한 여러 가지 방식으로 번역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최돈미 번역의 가장 큰 장점은 원작과 깊게 공명한다는 점, 번역된 시들이 영시와 같이 읽히고 뛰어난 작품성을 자체적으로 가지고 있다는 점, 그렇지만 번역의 어려움을 숨기지 않는다는 점, 그리고 가장 어려운 번역이 요구될 때 번뜩이는 창의성을 드러낸다는 점이다.

특히 내가 탄복을 금할 수 없었던 사례 중 하나는 ‘아님’을 ‘Lord No’로 번역한 대목이다. ‘Lord No does not Lord No and none and not at Lord No thus Lord No does not / Not none never Lord No nevertheless / Lord No who is not Lord No is never Lord No thus Lord No is Lord No of Lord No’는 분명 ‘아님께서 아님을 아니하시고 아님에 아니하고 아니하시니 아님이 아니하온지라 / 아님을 아니하고 아니하여 아니하대 / 아님이 아닌 아님은 아님이 아니나니 아님이 아님의 아님이요’와 같지는 않다. 그러나 ‘님’이 가지는 존칭으로서의 의미를 살려 ‘Lord’로 옮긴 결정은 놀라우며 ‘Lord’와 ‘No’에서 반복되는 ‘오’ 소리는 그 자체로 커다란 울림을 가지고 있다. 원문에서 반복되는 ‘아’와는 다른 ‘오’ 소리지만 번역가가 소리에 대해 깊이 고민하였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김혜순 시인이 ‘아님’에서 ‘님’을 발견하여 우리에게 새로운 존재를 보여주었듯 최돈미 시인 역시 ‘Lord No’라는 새로운 존재를 탄생시켰다고 말할 수 있다.

수상작 선정 후 최돈미 시인의 작업을 좀 더 알아가면서 대산문학상이 주인을 잘 찾아갔다는 생각이 들었다. 본 상을 계기로 김혜순 시인의 경이로운 시집이 원문으로든 번역으로든 더 많은 독자에게 읽히기를 고대한다.

민은경
서울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교수, 1967년생
저서 『China and the Writing of English Literary Modernity, 1690-1770』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