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현장
② 『밝은 밤』의 캐릭터와 서사적 매혹

- 최은영 장편소설 『밝은 밤』

  • 문학현장
  • 2021년 겨울호 (통권 82호)
② 『밝은 밤』의 캐릭터와 서사적 매혹

- 최은영 장편소설 『밝은 밤』

『밝은 밤』을 세 번 읽었다. 독자로서 한 번, 심사위원으로서 한 번, 리뷰를 쓰기 위해 한 번.

인간의 본질을 다루는 서사가 최종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캐릭터, 인물의 본질적 특성이다.

『밝은 밤』을 처음 읽을 때 내 눈길을 사로잡았던 것도 삼천이(이정선)-박영옥-길미선-이지연으로 이어지는 네 명의 캐릭터였다. 여기에 자신을 홀로 두고 떠나는 삼천이의 손을 잡고 ‘내레 다음 생에선 네 딸로 태어날 테니, 그때 만나자’고 한 고조모까지 더하면 다섯 명의 여성, 어느 하나 만만한 인물이 없었다. 이들이 공유한 성격은 막강했다. 그렇다고 모두 같은 것만도 아니었다. 이들의 같으면서 다른 성격은 독자를 이 소설 속으로 깊숙하게 끌고 들어가는 힘이었다.

처음 가는 길을 갈 때는 안내자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지만 두 번째 갈 때는 그렇지 않다. 소설을 읽는 일도 그렇다. 두 번째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나는 나를 끌어당겼던 그 막강한 캐릭터들의 실체를 확인하고 싶었다. 한 인물의 본질적 특성은 그 인물이 직면한 상황에서 그 인물이 취한 태도에 의해서 드러난다. 같은 상황에서도 사람에 따라 취하는 태도는 모두 다르다. 어떤 상황에서 취한 그 사람의 태도가 무엇이었는가? 그가 취한 그 태도가 바로 그 사람이다.

하나하나의 순간에 보여준 태도와 행동만으로는 그 인물의 특성이 잘 보이지 않을지 모르지만, 그 순간과 순간을 모으고 연결해보면 한 인간의 전모가 고스란히 드러나기 마련이다. 장편소설은 한 인간이 선택했던 그 순간들을 모으고 연결해서 그 인간이 지닌 본질적 특성을 보여주는 서사예술이다.

네 명의 캐릭터가 지닌 같고 다른 점을 살펴보려면 비슷한 상황에서 그들이 한 선택과 행동을 확인하는 것이 가장 빠른 방법이다. 내가 메모하면서 살펴본 상황은 이들의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만남과 이별이었다. 『밝은 밤』은 네 여성이 겪은 만남과 이별의 서사이기 때문이다.

고조모 삼천이, 증조모 박영옥, 어머니 길미선, 나 이지연. 4대에 걸친 네 여성의 만남과 이별의 서사는 같은 듯 다르다.

역에서 옥수수를 팔았던 1대 여성 삼천이(이정선)는 개성으로 뻗은 기찻길 위에서 박희수를 만나 결혼했다. 그녀가 정신대로 끌려가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남편이 있어야 했고, 박희수는 그녀의 남편을 자청했다. 하지만 박희수는 백정의 딸인 삼천이에게 베푼 은혜의 무게를 스스로 감당하지 못한 채 끙끙대며 살다 비명횡사했다. 그가 죽었을 때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은 삼천이는 장례가 끝난 다음 주에야 성당에 가서 미사 지향에 ‘박희수’의 이름을 올렸다. 그것이 ‘세상 사람들은 하느님 아래에 모두 평등하며 어느 누구도 더 존귀하거나 비천하게 태어나지 않았다.’고 하고선 정작 자신을 평생토록 대등한 사람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던 박희수를 떠나보내는 삼천이의 이별법이었다. 이별 뒤에 삼천이에게 남은 것은 딸 박영옥이었다.

2대 여성 박영옥은 ‘좋아하는 마음이 조금도 없으면서 그저 노처녀가 되고 싶지 않아서, 남들이 보기에 정상적으로 살고 싶어서’ 아버지 박희수가 소개한 길남선과 혼인했다. 아버지가 박영옥에게 ‘차고 넘치는’ 신랑감이라고 했던 길남선은 박영옥이 딸 길미선을 낳은 다음 첫 번째 부인에게 떠났다. 길남선이 전쟁 전에 혼인한 아내가 있다는 것을 감추고 딸을 시집보낸 박희수는 ‘남자 마음 하나 잡지를 못해서’ 남편을 빼앗긴 박영옥을 탓한다. 박영옥은 남편이었던 길남선과 아버지 박희수를 한꺼번에 마음에서 떠나보낸다. 그들과 이별한 다음에 박영옥에게 남은 것은 딸 길미선이었다.

3대 여성 길미선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와서 취직을 하고 ‘이서방’과 결혼했다. 그녀는 ‘이서방’과의 결혼으로 ‘평범한 가족을 꾸리게 되어서 좋았다.’ ‘다른 사람과 다르지 않은 삶, 그래서 어떤 이야깃거리도 되지 않고, 평가나 단죄를 받지 않고 따돌림을 당하지 않아도 되는 삶’을 살기 위해 그녀는 결혼했고, 그 어려운 ‘평범함’을 지키기 위해 가정을 유지하고, 자기 딸의 이혼을 반대하고, 딸의 이혼 사실을 감춘다. 그녀는 누구와도 이별하지 않았다.

4대 여성 이지연은 ‘가깝고 끈끈해서 속까지 다 보여주고 서로에게 치대는 사이’가 아니면서도 ‘내 편이 되어주는 사람이 하나만 있어도 좋겠다’는 기대로 ‘김서방’과 결혼했다. 그러나 그렇게 결혼한 김서방은 다른 여자를 만났다. 이지연은 그녀의 친구 지우가 ‘개새끼’로 규정한 김서방과 이혼했다. 그녀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네 명의 여성 중에서 이별을 선택하지도 경험하지도 않은 사람은 3대 길미선 한 명이다. 그냥 한 대 맞고 말 걸 맞서다 두 대, 세 대 맞을 필요가 없다고 믿으며 살아온 길미선이었다. 그래서, 길미선은 누구와도 이별하지 않은 대신 엄마 박영옥과 딸 이지연으로부터 멀어졌다. 그래서, 길미선은 『밝은 밤』에서 가장 문제적인 인물이다.

길미선이 이 소설에서 가장 문제적인 인물이라는 사실은 자기 딸의 만남과 이별을 대하는 태도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다.

증조모 삼천이는 남편 박희수가 ‘차고 넘친다’며 딸을 길남선이와 혼인시키려 했을 때, ‘아바이 말 신경쓰디 말라’했다. 길남선에게 배신당한 딸 박영옥에게 ‘남자 마음 하나 잡지를 못해서’ 남편을 빼앗겼다고 탓하는 박희수에게 삼천이는 이렇게 말했다.

‘한 번 더 그런 말 했다가는 당신 내 손에 죽습니다.’

조모 박영옥은 딸 길미선이 환영받지 못할 결혼을 하는 것을 눈치채고 반대했다. 박영옥은 딸 길미선이 손녀를 데리고 찾아왔을 때, ‘언제든 돌아와도 돼.’라고 말했다.

3대 여성 어머니 길미선만 1대 여성 증조모 삼천이와 2대 여성 조모 박영옥, 4대 여성 나와 달랐다. 길미선은 딸 이지연에게 ‘남자는 여자 때리지 않고 도박 안 하고 바람만 안 피워도 상급’이라고 사위를 옹호했다. 그 기준에마저도 미달하는 남편과 이혼하려는 딸을 나무란다.

이 문제적 캐릭터 길미선은 어떻게 탄생한 것일까?

『밝은 밤』은 그 대답을 찾아 조모와 증조모, 고조모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대의 이야기만으로 벅찰 터인데 작가는 어쩌자고 4대 100년의 서사를 들춰내려 들었을까. 하지만 최은영은 다 계획이 있었다. 허접하고 쓰라린 이별의 서사를 차근차근 이겨나가는 매혹적인 만남의 서사가 그것이다.

 

 

그 시작은 이렇다.

이혼을 하고 내려간 희령의 아파트에서 나는 한 할머니를 만난다. 은색 패딩을 입고 다니는 멋쟁이 할머니는 어느 날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라’며 쇼핑 바구니에서 사과 하나를 꺼내준다.

“아가씨, 내 손녀랑 닮았어. 그 애를 열 살 때 마지막으로 보고 못 봤어. 내 딸의 딸인데.”

할머니는 거기까지 말하고 나를 가만히 바라봤다.

“손녀 이름이 지연이에요. 이지연. 딸 이름은 길미선.”

나는 할머니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할머니는 나와 우리 엄마의 이름을 말하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 것 같은데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서울 사는 애가 여기에 내려올 일이 없잖우.”

할머니는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내려왔네요. 여기.”

내가 말했다.

 

이 만남은 고루한 시간여행을 강요할 것이라는 예상을 격파하는 첫 일격에 불과하다. 이 매혹적인 할머니를 통해 나는 일찍이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죄가 있다면 그건 여자로 태어나고, 여자로 산다는 것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던 증조모를 만난다. 그리고 그들이 불우한 운명에 희생당하지 않고 자신의 삶을 스스로 빛낼 수 있게 만들어준 사람들과의 만남을 하나씩 차례로 펼쳐 보인다. 삼천이의 친구 새비, 박영옥의 어린 친구 희자, 길미선의 친구 명희, 이지연의 친구 지우.

이미 원고지가 차고도 넘쳤다. 세 번째 읽으며 리뷰로 쓰려고 했던 이 소설의 아이러니에 대해서는 시작도 하지 못하고 말았다. 『밝은 밤』의 캐릭터와 서사적 매혹의 비밀은 아이러니인데, 비밀로 남겨두어야 할 것 같다.

방현석
소설가,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1961년생
장편소설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를 때』 『당신의 왼편』 『십년간』, 소설집 『내일을 여는 집』 『존재의 형식』 『새벽출정』 『세월』 『사파에서』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