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현장
②서정성과 메타성의 결속과 분기

- 김언 시집 『백지에게』

  • 문학현장
  • 2021년 겨울호 (통권 82호)
②서정성과 메타성의 결속과 분기

- 김언 시집 『백지에게』

 

김언의 『백지에게』(민음사, 2021)는 김언만의 작법과 목소리의 일관성이 느껴지는 김언 브랜드의 시집이다. 이제 김언은 자신만의 스타일과 구문과 방언과 술어적 동일성을 고유하게 가지게 된 것 같다. 말의 꼬리를 물면서 연쇄적으로 펼쳐져가는 언어적 운동이 여전히 매혹적이다. 하지만 지난 시집들이 가졌던 부분적인 기괴성이나 서사성은 현저하게 몸을 숨기고 퍽 담백해진 서정적 묘미까지 느끼게 해주는 새로움도 눈에 띈다. ‘쓰다’라는 확연한 자의식 아래 슬픔과 죽음을 넘어서는 아스라한 목소리를 들려준 시집이라고 생각된다. 이러한 결과는 그동안 지속해온 김언의 노력이 자신만의 스타일과 전언을 온전하게 정착시키고 확장해갔다는 것을 함의한다.

한국 시를 충실하게 읽어온 독자라면 최근의 김언이 꽤 다작의 양상을 보여주었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그 시편들에 어떤 문제의식의 낙차가 현저하게 개입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는 균질적 수준을 꾸준히 유지하면서, 태작을 남기지 않는 지속성으로, 자신을 존재 증명해갈 뿐이다. 물론 김언의 시는 여전히 의미론적 환원을 한사코 거절하는 난해성을 함축하고 있다. 이 의도된 난해성은 그의 시가 반영론과 표현론 바깥에서 발화되는 것임을 적극적으로 알려준다. 그럼에도 그는 단단하게 짜인 구문과 스타일을 통해 독자의 사유를 다성적으로 번져가게 하는 특유의 에너지를 품고 있다. 이번 시집은 김언이 그러한 사유와 방법을 견고하게 유지하고 확산해가는 시인임을 새삼 확인시켜주는 결실이기도 하다.

김언은 근대적 자기표현 양식이라고 인지되어온 ‘시’가 일정하게 그 동일성을 소진한 후, 자신이 그 ‘바깥의 언어’를 꿈꾸는 사제임을 언표하고 있다. ‘시’가 확연한 동일성을 가지고 유통되는 초역사적 실체가 아니라 ‘시라고 불리는 것들’의 역사적 구성물임을 뼛속 깊이 의식한 결과일 것이다. 그 점에서 김언의 시는, 일정하게 ‘시란 무엇인가’에 대한 메타적 응답을 수행하고 있다. 말하자면 시로 씌어진 시론, 문장으로 말하는 문장론이기도 한 셈이다. 물론 이번 시집에는 “가장 바쁘게 울음을 울고” 살아가는 시인의 일상과 소소한 내면 고백이 점증하여 그것들이 서정적 순간성을 여러 군데서 비쳐준다. 그 점에서 김언 시의 분기점을 보여주는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시집에서도 그가 좇고 지우고 잡아내고 풀어주는 ‘말’들은 여러 양상으로 번져간다. 그냥 새나가는 말과 끝내 나가지 못하는 말, 기억을 담는 말과 훌쩍 넘어서는 말이 공존하면서 갈등하고, 서로가 서로를 품고 확산해간다. 자연스럽게 그 ‘말’들은 ‘시’ 혹은 ‘문장’으로 변형되어 가는데, 안이한 양식적 완결성을 거부하고 끊임없이 변형되는 ‘시(문장, 말)’에 대한 깊은 자의식은 일관된 언어 생성의 원리로 그를 데려가고 있다. “의미는 뒤통수”에다 둔 채 그의 시는 “백지에서 나오는 말들. 백지에서 나와 백지로 돌아가기를 거부하는 말들. 도무지 백지가 될 수 없는 말들”을 하염없이 새겨간다. 정말 하염없다. 이 또한 그의 시가 함축성 같은 구심적 원리나 해체성 같은 원심적 양상을 해명하는 데 바쳐지는 근대 시학의 산물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 그 ‘바깥’을 상상하고 어쩌면 정말 바깥까지 가보고야 말겠다는 의지의 산물임을 다시 한 번 말해주는 비근한 미학적 사례일 것이다. 그렇게 이번 시집은 서정성과 메타성의 결속과 분기를 보여주는 김언 시학의 새로운 가능성으로 다가온다.

유성호
평론가, 한양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1964년생
평론집 『근대의 심층과 한국 시의 미학』 『단정한 기억』 『서정의 건축술』 『정격과 역진의 정형 미학』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