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작 대 영화
이야기를 담는 그릇의 크기와 깊이부터 달랐으니

- 도나 타트의 장편소설 『황금방울새』와 영화 <더 골드핀치>

  • 원작 대 영화
  • 2021년 겨울호 (통권 82호)
이야기를 담는 그릇의 크기와 깊이부터 달랐으니

- 도나 타트의 장편소설 『황금방울새』와 영화 <더 골드핀치>

 

미술관에서 원인을 알 수 없는 폭발 테러가 발생한다. 그 사고로 13세 소년이 엄마를 잃는다. 사고 현장에 함께 있던 소년이 의문의 노인으로부터 아무도 모르게 건네받은 1654년 네덜란드 황금시대의 화가 카렐 파브리티우스의 명작 ‘황금방울새’를 건네받는다. 그 때문에 소년은 운명적으로 골동품 가구 수리 전문가를 만난다. 소년은 마약과 좀도둑질을 일삼는 친구와 친하게 지냈지만 배신을 당한다. 소년은 많은 주변 인물과 얽히고 그들 모두는 파란만장한 삶과 가정사를 겪는다.

단순한 추리물이나 스릴러 소설로도 충분히 재미있을 법한 인물과 소재이다. 그러나 ‘천재 작가’라고 불리는 미국의 도나 타트는 이를 극단적 상황, 위기와 갈등으로 긴장감을 증폭시켜 흥미진진하지만 여운이 없는 대중소설로 쓰는 존 그리샴이나 로빈 쿡이 되지 않았다. 11년이란 긴 집필 시간을 가지고 플롯과 인물의 관계를 복잡하고 깊이 있게 가져가면서 이야기를 확장했다.

그렇다고 장편소설 『황금방울새』를 두고 상상력이 넘치거나 소재가 기발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사실 줄거리는 축약하면 한 줄이다. ‘미술관 폭발사고에서 살아남은 소년이 우연히 손에 쥔 명작 한 점을 우여곡절 끝에 세상에 다시 돌려준다’는 것, 그래서 줄거리를 미리 알고 읽으면 조급하고, 모르고 읽으면 지루하다.

도나 타트는 서두르지 않았다. 여성작가 특유의 끈기 있고 세밀한 묘사와 서술로 천 쪽이 넘는 큰 스케일의 이야기로 키웠다. 때문에 『황금방울새』는 그릇이 크고 깊을 수밖에 없다. 시간과 사건도 때론 반복적으로, 때론 복제하듯이 느릿느릿 섞인다.

소설은 과거와 현재를 넘나든다. 구성과 설정은 때론 작위적이라고 느낄 만큼 연상적이고 우연적이다. 화약 폭발사고로 카렐 파브리티우스가 죽으면서 남긴 그림이 ‘황금방울새’이고, 미술관 폭발에서 살아남은 그림 또한 그것이다. 인물관계를 통한 사실적 심리묘사는 인간의 선과 악, 상처와 치유, 상실과 집착, 선택과 운명의 관계를 들여다본다. 이야기의 중심축인 ‘황금방울새’와 골동품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사건은 단순한 추리나 긴장감을 넘어 예술과 시간, 삶의 본질을 날카롭게 통찰한다. 이런 것들이 없었다면 『황금방울새』가 퓰리처상(2014년)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줄거리에 붙인 살이 워낙 많아 모두 이야기하는 것은 소설만큼이나 긴 시간이 필요하다. 그 자체가 무의미할지도 모른다. 그보다는 이 소설에서 읽어야 할 것들은 상반되거나 비슷한 캐릭터를 가진 인물들의 심리, 그들의 관계에 대한 서로 다른 시선, 같은 사건이 인물 각각에 미치는 결과들을 통해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들이다.

주인공 시오의 친구로 역시 암으로 엄마를 잃은 보리스. 학교에서 같이 왕따를 당하지만 대응 방식이 또 다른 친구 앤디. 폭발사고 현장에 노인과 함께 있다 시오처럼 구사일생한 소녀 파피. 주인공 시오를 받아들인 골동품 가구 수리 전문가인 호비와 그림을 좋아하는 앤디의 엄마 바버. 이들을 포함해 많은 죽음, 상처, 트라우마, 갈등, 불안, 죄의식을 겪고 있는 많은 주변 인물들. 『황금방울새』는 이들을 말과 행동, 심리를 통해 인간과 예술과 삶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았다.

시오 몰래 그림을 훔쳐 마약거래의 담보로 제공했다가 우여곡절 끝에 세상의 빛으로 다시 돌려보낸 보리스는 여전히 후회와 자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친구(시오)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다. 우리의 악함과 실수가 우리 운명을 결정하고 우리가 선에 다가가게 만든다면? 만약에 어떤 사람들은 그런 길을 통해서만 그곳에 도달할 수 있다면? 가끔은 틀린 길이 바른 길이 아닐까? 우리가 잘못된 길을 선택해도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는 게 아닐까?

그리고 그는 ‘선한 행동이 항상 선을 낳는 건 아니고, 악한 행동이 항상 악에서 나오는 건 아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행동하면서 내가 아는 최선을 다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이를 우리는 그의 악행(그림 도둑질)에 대한 궤변, 변명으로만 치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골동품 가구를 복원하면서도 한 번도 그것을 진품이라고 속여서 판 적이 없는 호비는 낡은 옛 물건에서 생명과 미의 철학을 터득한다. 나무를 노화시키는 것은 주인이 좋아하는 것들이다. 따뜻한 것, 차가운 것, 난로의 검댕이, 수많은 고양이 등. 우연이란 신이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방법일 뿐이다. 어떤 물건을 좋아하면 그 물건은 생명을 갖게 되며 우리로 하여금 더욱 큰 아름다움을 알게 해준다.

스포츠 도박에 빠져 시오가 어릴 때 집을 나가 다른 여자와 살다 음주운전 사고로 죽은 아버지에게도 나름의 철학이 있다. ‘모든 일에는 항상 더 많은 것이, 숨겨진 차원이 있다. 그리고 세상에는 어떤 패턴이 있고 우리는 그 일부다.’

여기에 주인공 시오와 저자의 예술(‘황금방울새’)에 스며있는 삶에 대한 성찰이 더해진다. ‘위대한 그림은 모두 사실은 자화상’이며 ‘이 충실한 초상화에서, 이 방울새 안에서 존엄하지만 연약한 인간, 다른 포로를 바라보는 또 하나의 포로’이다. 때문에 ‘그림은 그림이면서 깃털과 뼈이기도 한 일종의 실체 변화이며, 이상이 현실을 물리치는 곳이자 모든 관념과 그 반대가 똑같이 진실이 되는 마법의 지점’이다.

그 그림이 우리가 시간을 초월하여 대화를 나눌 수 있음을 가르쳐 준다. 시오가, 아니 작가가 이 긴 이야기의 대미를 장식하면서 우리에게 하고 싶은 말이기도 하다. ‘삶은 짧다는 것. 운명은 잔인하지만 제멋대로는 아니라는 것.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항상 기쁘지만은 않다고 할지라도, 어쨌든 삶에 몰두하는 것, 눈과 마음을 열고서 세상을, 이 개똥밭을 똑바로 헤쳐 나가는 것이 과제라는 것’이다.

소설이 이쯤이면 어떤 영화가 나올지 충분히 예상 가능하다. 제작비가 얼마든, 누가 만들든, 누가 나오든 영화가 소설의 크기와 깊이를 결코 따를 수 없다는 것을. 그래서 제작비 4,000만 달러(약 500억 원), 존 크로울리 감독에 핀 울프하드와 니콜 키드먼 주연의 영화 <더 골드 핀치(The Goldfinch)>는 혹평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아무리 영화의 그릇을 크게 해도 소설처럼 10년이 넘는 시간과 그 속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현재와 과거로 교차시켜 가면서 다양한 인물들의 삶과 선택을 영상언어로 설득력 있게 묘사하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149분은 결코 짧지 않다. 그러나 아무리 시간을 더 길게 하더라도 복잡하게 얽힌 플롯과 사건과 인물을 매끄럽게 이어가면서 추리, 범죄, 스릴러, 심리, 가족, 멜로가 뒤섞인 복합장르의 드라마에 공감과 설득력, 재미를 불어넣기란 쉽지 않다. 소설과 달리 영화에서 인물들의 심리묘사는 감상주의에 빠져들고, 아무런 설명 없이 자주 시간을 건너뛰어 사건의 실마리는 물론 캐릭터의 발전과 그들의 행동과 관계 변화를 제대로 보여주지 못했다.

그래놓고는 소설이 만들어 놓은 길을 바쁘게 따라가면서 주제를 단편적인 대사 몇 마디로 얼버무린 영화. 결국 우왕좌왕하다가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잡지 못하고 끝나버리고 말았다. 편집의 묘미로 그 한계를 만회하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영화가 할 수 있는 압축, 생략, 변주 어느 하나도 제대로 용기 있게 시도하지 못한 결과이다.

차라리 “원작 훼손”이란 비난을 감수했더라면. 과감히 길고 세세한 인물과 심리묘사를 버리고 사건 중심의 추리와 스릴러만으로 영화를 만들었다면. 주인공 시오가 ‘농담이 진지해지고 진지한 것이 농담이 되는 곳’이라고 말했듯이 영화도 그렇게 될 수 있지 않았을까. 물론 여기에는 시오와 보리스가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그림을 되찾는 과정을 치밀하고 긴장감 있게 보여준다는 전제가 있어야 한다. 소설에서 가장 어설프고 엉성한 부분이니까.

이대현
언론인, 영화평론가, 1959년생
저서 『영화로 소통하기, 영화처럼 글쓰기』 『소설 속 영화, 영화 속 소설』 『내가 문화다』 『유아 낫 언론』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