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①순간들

  • 단편소설
  • 2021년 겨울호 (통권 82호)
①순간들

모든 아이의 꿈. 그런데 잠깐, 모든 아이들의 꿈들이라고 해야 할까? 들. 서울들, 자카르타들, 서강대교들, 시애틀들. 그러나 산맥들, 호수들, 나무들은 가능한 표현이다. 들판들. 역시 가능한 표현이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자. 아이들이 저마다 꿈을 꾸고 있다. 아이들이 잠들어 있다. 아직 이후의 삶에 대해서는 생각해본 적 없는 아이들, 그러나 현실에 대한 감각만은 초식동물의 그것처럼 예리한 아이들. 아직 알지 못하는 지명들. 꿈속의 고유명사들. 하지만 이렇게 해보자. 초점을 좁혀 한 아이를 주목하자.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있다. 한 아이가 꿈을 꾸고 있다. 하나의 꿈. 비호되어야 할 꿈, 수호되어야 할 꿈. 부모가 죽기를 바라고, 동생이, 이복자매가, 선생이, 길에서 마주치는 낯설고 험상궂은 얼굴이 사라지기를 바라는 꿈을 아이가 길들이고 있다. 혹은 그 반대이거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깨어 있는 시간, 예컨대 점심식사가 끝나고 오후 첫 수업이 막 시작한 지금, 선생이 전자칠판 앞에서 목을 가다듬고, 마지막 소음이 초겨울 햇빛이 들어오는 유리창에 튕겨졌다가 사라지는 지금, 아이가 책상에 엎드린 채 잠들어 꿈을 꾸고 있다. 아이의 꿈을 관찰해보자. 아이가 들판을 걸어간다. 어느 방향으로? 그러나 꿈속에서는 아무도 방향을 알 수 없는 법이다. 하염없이 걷는 아이 앞에 커다란 돌무더기가 나타난다. 아이가 가까이 다가갈수록 흐릿해지기만 하다가 기어이 앞에 서자 놀라운 해상도로 드러나는 것은 돌무덤이다. 이제까지 실제로 본 적이 없음에도 아이는 그것이 돌무덤이라는 사실, 그래, 사실을 안다. 돌무덤을 바라보는 아이는 즉각적으로 그 안에 동생이 있다는 걸 알아차린다. 어떻게? 꿈이기 때문이다. 저기 동생이 묻혀 있어! 아이는 소리를 지르지만, 우리가 알다시피 꿈속에서 소리를 지르려면 때로 피라도 토할 정도로 모든 힘을 쥐어짜내야 한다. 아이는 무덤을 쌓은 돌들을 하나하나 볼 수 있다. 무덤을 쌓은 돌들이 몇 개인지도 안다. 그 돌들이 갑자기 몸집을 불리고, 어쩐지 무너지거나 폭발할 것처럼 보여서, 아이는 자신이 무엇이라도 해야 한다는 걸 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앞에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다면, 동생은 돌무덤에 깔려 죽어버릴 것이다. 그런데 참 이상하지, 아이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돌무덤이라는 단어 말이야. 돌무덤은 무덤이잖아. 무덤은 죽은 사람들이 매장되는 자리다. 그렇다면, 논리적으로…… 아이는 오랫동안 고민하지만, 실제로는 3, 4초 남짓한 시간이 지나갈 뿐이다. 소수 나눗셈의 어림값 구하기를 가르쳐야 할 교사가 교과서를 펼친다. 아이들의 필통들에서 숫자들이 떨어진다. 시곗바늘이 전진한다. 우리 학교에서 17킬로미터 떨어진 생태공원으로 소풍을 가게 되었습니다. 모두 자전거를 타고 가게 되었는데요, 오전 8시 40분에 출발해 1분에 450미터씩 달린다면 우리는 몇 시에 공원에 도착하게 될까요? 교사가 지문을 읽자 아이들은 고민에 빠진다. 아직 시계 보는 걸 어려워하는 아이도 있다. 자전거를 타고 17킬로미터나 달려야 한다는 사실, 당분간은 실현되지 않을 사실에 경악하는 아이도 있다. 잠든 아이는 여전히 잠들어 있다. 잠든 아이는 꿈속에서 이미 17킬로미터를 걸었는지도 모른다. 아이는 여전히 돌무덤 앞에 서서 꿈의 논리에 저항한다. 그러니까…… 논리적으로…… 동생은 이미 죽었으므로 다시 한 번 죽는다고 해서 나쁠 건 없잖아? 그래, 아이는 어렴풋이 안다. 이미 죽은 자는 안전하다. 죽은 자는 다시 죽지 않는다. 그럴 수가 없으니까…… 아이는 꿈의 논리는 일부 현실의 논리를 따른다는 것을 안다. 경험적으로. 그렇지 않겠는가? 아이는 자신이 만들어낸 꿈속에서 동생이 안장된 것이 확실한 돌무덤을 바라본다. 아이가 초침을 움직인다. 시간이 흘러간다. 돌무덤을 이룬 돌들이 자꾸만 커진다. 동생도 커졌을까, 아이는 생각한다. 나도 저 안에 들어갈까, 아이가 생각한다. 한 아이가 지우개를 떨어뜨린다. 그 소리는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는다. 연필을 들고 문제를 푸는 아이들을 바라보던 교사가 엎드려 잠든 아이를 발견하고 그쪽으로 다가간다.

 

초등학교 건너편 갓길에 자동차 한 대가 비상등을 켜고 정차해 있다. 이 차량에 주목하자. 르노삼성 2009년식 SM3 모델로 외관은 은색이며 주행거리는 7만 킬로미터 정도인 이 차에 지난 12년간 탑승했던 사람은 총 열여섯 명이다. 그러나 이런 사실……에 정말로 관심을 가져야 할까? 예컨대, 사이드미러가 총 아홉 번 부서진 전력이 있으며 5년 전 주유구 덮개가 열리지 않아 운전자가 곤란했던 일이 있었다는 점에. 하지만 때로는 이런 사실들이 트렁크에 시신 한 구가 들어있는 일보다 더 중요할지도 모른다. 운전자가 차창을 내리고 초겨울의 신선한 공기가 차 안으로 들어오게 한다. 이 운전자에게도 주목하자. 아이는 아니다. 서른다섯 살. 낮잠을 자다가(꿈을 꾸었을까?) 아이가 조퇴할 시간에 맞춰 데리러 나오느라 허둥지둥 차를 급히 몰고 나온 사람. 그런데 왜 아이가 조퇴해야만 하지? 몇 학년이지? 이름은? 지금 어림값을 구하느라 인상을 찌푸리고 있을까? 시간이 가고 있다. 그런데 어디로? 5분 전 학교 앞에 도착한 운전자가 시간을 확인한다. 약속한 시간보다 5분이 이르다. 운전자는 얼굴에 닿는 차가운 공기를 느끼며 학교 정문을 주시한다. 운동장. 모래. 모래들. 앙상한 나무들. 담벼락. 담벼락들. 담쟁이. 담쟁이들. 갑자기 주변이 어두워진다. 구름이 해를 가리며 지나간다. 해가 지려면 아직 서너 시간이 남아 있다. 오후 장사를 준비하던 분식점 주인이 가게 앞 입간판을 살피러 나왔다가 우리의 자동차에 주목한다. 비상등을 켜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다. 후면 유리창에 RH+O형 아이가 타고 있다는 문구가 적혀 있어서다. 아니다. 번호판 아래 범퍼가 찌그러진 형태가 어떤…… 불쾌한…… 불안한…… 그리고 희미한 기억을 불러냈기 때문이다. 분식점 주인은 이 차를 전에도 본 적이 있다. 당연하게도 놀라울 일이 아니다. 아이들을 태워오거나 태워가는 차들이 아침저녁으로 학교 앞을 지나가니까. 아니, 아니야…… 분식점 주인은 입간판 위치를 조정하고 잠시 은색 자동차를 바라본다. 한밤중이었어, 그는 생각한다. 분명히 그런 시간이었는데…… 하지만 이제 파를 썰어야 할 시간이다. 분식점 주인이 습관적으로 양손바닥을 앞치마에 문질러 닦고는 가게 안으로 들어간다. 한편 교실에서는 잠들었던 아이가 미터와 킬로미터 사이에서 헤매는 사이 다른 아이가 손을 들고 정답을 말한다. 450미터는 0.45킬로미터니까…… 교사는 벌써 소수점 아래 두 자리까지 계산할 수 있는 학생들이 있다는 것에 잠시 감격한다. 아래층 교실에서 연주하는 리코더 소리가 이 교실로도 들려온다. 서른 명가량이 한꺼번에 부는 리코더 소리는 위로도, 아래로도, 옆으로도, 사선으로도 퍼져 나가는데, 서투른 연주지만 운전자는 그 곡이 <작은 별>이라는 것을 안다. 운전자의 아이가 나타나려면 2분이 남아 있다. 운전자는 <작은 별>을 흥얼거리며 시동을 걸고 조수석 시트의 온열 기능을 켠다. 분식점 주인은 차에 대해서는 잊은 채로 어묵을 썰고 떡을 물에 담근다. 하나씩 불러볼까, 어묵들. 떡들. 물들. 차들. 자동차들. 언젠가 이 장소와 멀리 떨어지지 않은, 예컨대 300미터쯤 떨어진 골목길에서, 자정을 넘긴 시각, 한 주정뱅이가 부끄러움을 잊은 채로 온통 상아색으로 단장한 불 꺼진 카페 앞에서 바지를 내릴 때, 어느 은색 자동차가 어느 다세대주택으로 들어가는 계단 옆으로 나란히 놓인 화분들 중 하나를 후진하다 깨뜨린 적이 있었다. 플라스틱이 깨진다기보다는 쪼개진다는 것에 가까운 날카로운 소리를 냈고, 분식점 주인은 아마 그 소리를 들었거나, 그 현장을 보았을 것이다. 그 자동차는 빠르게 골목을 벗어났고, 일방통행로를 반대 방향으로 달려갔고, 화분의 주인이 조금 늦게 현장에 나타나 소리를 질러댔을 것이다. 화분 속 식물은, 글쎄, 어떤 식물로 할까? 동백나무? 남천? 사과나무? 율마? 떡갈나무? 그래, 자작나무라고 하자. 믿을 수 없게도 지름 40센티미터 파란색 플라스틱 화분에 심겨 있던 자작나무가 어둠 속에서 쓰러졌다. 자, 2분이 지났다. 아이가 운동장을 채운 모래들 위로 발자국들을 남기며 교문으로 다가오고 있다.

 

조수석에 앉은 아이가 따스하게 닿는 시트의 온기에 만족스러운 얼굴을 한다. 운전자가 비상등을 끈다. 차가 출발한다. 어느 쪽으로? 일방통행로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가야 할 쪽으로. 가늘고 차가운 바람이 불고, 우리는 다음 인물을 찾아 아직 조용한 길을 두리번거린다. 세면대들과 변기들과 여러 타일들을 진열한 인테리어 가게, 문구점, 카페, 발레학원, 무인 아이스크림 가게, 변색된 사진들을 내건 사진관이 있다. 길 위에 뒹굴던 전단지 한 장이 뒤집히고, 우리는 거기 적힌 글자들을 읽을 수 있다. 채무상환. 숫자들. 맞은편에서 달려오던 자전거와 오토바이가 충돌할 것처럼 아슬아슬하게 서로에게서 벗어나고, 잠깐, 아니다. 우리가 모르는 얼굴들이다. 그러니 그들이 페이지에서 사라지게 놔두자. 그리고 마침내 다음 인물이 나타난다. 일흔 살에 접어든 여성이다. 그의 이름은 베로니카로, 세례명이다. 본인이 딱히 본명을 밝히고 싶어 하지 않으므로 우리는 그를 계속해서 베로니카로 부르기로 한다. 베로니카는 전철역으로 가는 중이다. 그는 장성한 손녀가 자신의 뒤를 밟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베로니카는 두툼한 플리스 점퍼를 입었고, 지퍼로 여닫는 나일론 가방을 왼쪽 어깨에 메고 있다. 베로니카의 걸음걸이는 느리지만 당당하다. 내 나이에는 무엇보다도 낙상을 조심해야 하는데…… 밤에 눈이 오겠어…… 베로니카는 어디로 가고 있을까? 그것은 우리가 손녀를 대신해 할 수 있는 질문이다. 대학생인 손녀는 할머니가 평일 오후 두 시마다 꼬박꼬박 외출한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처음에는 몰랐을 것이다. 그러니까, 할머니는 예순여섯 살, 손녀는 스무 살로 갓 대학에 입학했을 때는. 손녀가 오후 두 시에 집에 있는 경우는 많지 않다. 하지만 휴학하고 온라인으로 중국어 강의를 듣는 둥 마는 둥 하면서 빈둥거리며 보낸 몇 달 동안 손녀는 할머니가 늘 일정한 시각에, 그러니까 오후 두 시에 집을 나선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물어볼 수도 있잖아? 그러니까, 어딜 다녀오시는 건지. 손녀의 할머니 베로니카는 역시 늘 일정한 시각에, 그러니까 오후 여섯 시 반에 집으로 돌아왔다. 한 번은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로 할머니가 돌아왔다는 것을 알아차린 손녀가 문을 열어주려고 현관으로 가다가 베로니카가 큰 소리로 도어록 비밀번호를 읊으면서 키패드를 누르는 습관이 있다는 걸 알았다.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그래? 손녀가 책망했다. 하지만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해서, 당연하게도, 베로니카의 규칙적인 외출에 대해 손녀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는 데에는 미심쩍은 구석이 있다. 어쩌면 두 사람은 혈연관계가 아닐지도 모른다. 아니다. 손녀가 과묵한 성격일 수도 있다. 그럴지도 모른다. 손녀는 여간해서는 먼저 말해주기 전에 묻지 않는 사람일 수도 있다. 아니다. 언젠가 손녀가 질문했고, 베로니카가 엉뚱한 말을 하며 이해되지 않는 답변을 했을지도 모른다. 가을에 쑥을 캐러 산에 다녀왔다거나, 나일론 가방에는 지갑과 조그만 성경 한 권이 들어있을 뿐인데도 수영을 배우러 다닌다고 했다거나. 손녀는 이 일에 대해 친구에게 의견을 물었다. 타인의 삶에 대해 평균(그러나 누가 평균을 정하지?) 이상의 관심을 가진 적이 없지만 첩보물을 좋아하는 손녀의 친구는(그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가 뭐지?) 카카오톡 대화창에 이렇게 썼다. 너희 할머니 국정원 직원이신 거 아니야? 그래서 스물다섯 살의 손녀는 작정하고 일흔한 살이 된 베로니카의 뒤를 밟는 중이다. 그래서…… 베로니카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이제 우리가 답할 차례다. 하지만 굳이 그러지 않아도 좋다. 베로니카가 실제로 국가정보원 소속으로…… 뭐랄까, 권총이라도 분해했다 다시 조립하는 일을 하고 있다면, 혹은…… 난수로 이루어진 암호를 푸는 중이라면…… 어떨까? 베로니카에게 직접 물어본다면, 혹시 당신이 다시 태어난다면 국정원이나 여러 드라마와 영화에서 단골 배경을 맡는 기관에서 상당히 중요한 임무를 맡겠느냐고 묻는다면 그는 아마도 고개를 끄덕일지도 모르니까.

 

또 하나의 꿈. 전진하던 시간이 잠시 후퇴한다. 엉클어진 궤적들, 단속적인 선들. 도주로들. 발레학원에서 나오던 사람 앞으로 봉고차 한 대가 지나간다. 그 뒤를 택배 트럭이 따르고 있다. 비보호 좌회전을 하려고 대기 중인 자동차들. 시속 30킬로미터 이하로 서행하라는 표지판이 붉은빛을 깜박거린다. 어묵을 꼬치에 꿰던 분식점 주인이 유리문 밖을 내다보며 해가 지면 눈이 내릴 거라고 예상한다. 언젠가부터 리코더 소리가 멎었고, 아직 학교에 갈 나이가 되지 않은 아이들이 비눗방울을 불며 안전보행로라 이름 붙은 보도블록 길을 달려간다. 그중 가장 멀리까지 달려간 아이가 걸음이 느린 베로니카를 따라잡고, 둘은 잠시 같은 시공간을 공유한다. 손녀는 이미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다. 왜? 할머니가 옛 동네 친구들과 화투를 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해독에 반년이 소요되리라 예상되는 암호를 풀러 외출하는 것이라고 믿는 편이 그럴듯하기 때문에. 아이가 숨을 고르며 뒤를 돌아본다. 다른 아이들이 일제히 비눗방울을 불며 달리고 있다. 어느 방향으로? 비눗방울들이 날아가는 방향으로. 사람과 함께 시장에 다녀오던 개가 비눗방울에 주목한다. 개가 목줄에도 아랑곳없이 외부 세계와 아슬아슬한 경계를 형성하는 비눗방울 하나를 향해 튀어 오르고, 목줄을 쥐고 있던 이는 반사적으로, 그러나 익숙하다는 듯, 그 방향으로 끌려간다. 아직 저녁을 먹을 시간이 되지 않았다. 초등학교 고학년 아이들이 교실에서 풀려나려면 삼십 분쯤 남았을까? 십 분이 남았다고 하자. 누군가의 꿈속에서 잠시 뒤로 물러났던 시간이 단숨에 이십 분을 건너뛴다. 십 분 뒤에, 아니, 가방을 챙겨 교문으로 걸어 나오려면 오 분쯤 걸리니까 대략 십오 분 뒤에 비눗방울을 불던 아이 중 하나는 제 언니와 만나게 될 것이다. 하얀 개가 체념한 표정으로 터덜터덜 걸음을 옮기고, 사거리 신호등에 녹색불이 들어오고, 보호받지 못한 차량 세 대가 좌회전을 감행한다. 상자 두 개를 실은 가정용 카트를 끌고 자전거들을 피해 인도를 걸어 우체국으로 가는 중인 사람이 횡단보도 앞에서 무심코 횡단보도의 철자를 궁금해 한다. 그러니까…… 휭단보도인가? 아니야, 횡단보도가 맞아. 혹시…… 휑단보도는 아닐까? 휭단도보는 물론 아니고…… 그가 횡단보도를 이루는 선들과 원을 이리저리 재배치해보는 사이, 횡단보도라는 단어는 잠시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 것처럼 여겨진다. 그저 선과 원이 여기저기 놓여 있는 것에 불과한데…… 그는 다른 단어들을 발음해본다. 예컨대 희곡전집, 산책, 지푸라기, 공화당, 뿌리, 전자레인지. 그런데 이상하기도 하지, 그가 같은 단어를 여러 번 발음해볼수록 단어가 본래 지니고 있다고 생각되던 의미들이 자꾸만, 자꾸만 여러 방향으로 흩어진다. 지푸라기가 하수구로 빨려 들어가고, 희곡전집이 희곡과 전, 그리고 집으로 분리된다. 뿌리는 뿌예지고, 공화당은 기역과 이응들만 남게 된다. 손녀가 기역 옆을 지나간다. 횡단보도에 녹색불이 들어오고, 카트를 끄는 사람이 끙, 소리를 내며 발을 내딛는다. 우체국 방향으로. 기역을 지나 운동화 밑창에 이응 하나를 붙인 채로 역시 횡단보도를 건너던 손녀는 문득 자신의 할머니가 젊었던 시절에, 그러니까 스물다섯쯤 되었을 때, 우정국 직원으로 근무했다던 얘기를 떠올린다. 그게 뭐야? 우정을 관리하는 사람이었다는 거야? 손녀의 동생이 물었을 것이다. 두 자매의 아버지는 고개를 저으며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아니, 지금의 우체국을 말하는 거야. 그러나 손녀는 다음 걸음에서 그날의 기억을 잊어버린다. 가로수들. 은행나무들. 사라지는 중인 낙엽들. 가로수 보호철망 틈새에 제비꽃이 피어 있다. 손녀는 홀린 듯 허리를 숙여 꽃으로 다가간다. 그것은 어느 아이가 몇 달 전 흘리고 간 플라스틱 머리끈 장식이다. 그러나 제비꽃이 피어있다고 하자. 겨울이지만, 한겨울은 아니니까. 초겨울이니까. 말도 안 되는 말이지만 때로는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하니까. 태연하게. 그럴듯하게.

 

표면적으로는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 것 같다. 우리는 그렇다고 믿을 수 있다.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이 돌아가고, 이응들이 흩어져 있기는 하지만, 신호등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점멸하고, 간판들이 떨어지지 않고 굳건히 매달려 있으며, 비계에서 추락하는 물품도 없고, 필요한 사람들은 다들 안전모를 쓰고 있고, 시간이 흘러가고, 누군가가 책을 펼치고, 누군가가 맑은 목소리로 핸드폰 너머 상대방에게 인사를 전하고, 오후 세 시, 꼼지락거리던 아이들이 교실에서 풀려나고, 몇몇 아이들은 성공적으로 어림값을 구했으며, 또 어떤 아이는 소수점아래 세 자리에 대해 이해하고, 누군가가 마을버스에서 몸을 일으키고, 넘어지지 않고, 킥보드와 보행자가 충돌하지 않고, 필요한 사람들은 다들 헬멧을 썼고, 개들이 짖고, 개들이 할 일을 하고, 편의점에서 과자들과 담배들을 사서 나오던 사람이 곧장 길을 건너려다 말고 주위를 살피고, 벌어질 일은 모두 벌어졌으며, 육아와 가사노동으로 학업을 중단했던 한 천재가 스타트업 사무실로 위장한 햇살 환한, 그러나 곧 눈이 내릴 것이기에 시나브로 어둠이 스며들기 시작한 방에서 난수 암호를 푸는 일에 골몰하고, 공을 쫓는 아이들이 있고, 나무들이 뿌리를 뻗고, 그 위를 보행자들이 밟고, 다져지고, 아빠, 올 때 아이스크림 열 개, 한 아이가 제 아버지의 어머니 말투를 흉내 내어 말하고, 핸드폰 너머에서 아이의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이고, 이렇게 어떤 장면들이 연결되고, 우리의 인물들은 잠시 등장했다가 사라졌다가 다시 등장하기를 반복한다. 상아색 페인트로 도장하고 파란색 글씨로 이름을 적은 카페 주인이 인터넷 쇼핑몰에서 CCTV를 주문하고 있다. 추우니까 안에서 먹고 가자, 헐렁한 청바지 위로 각각 남색과 베이지색 플리스 재킷을 입은 여자애들이, 어려운 일도 아닌데 이들에게 이름을 붙여볼까, 하나와 정원이 소프트아이스크림콘을 핥으며 카페 유리창 밖을 내다본다. 카페 안에는 라디오가 내보내는 음악이 흐르고, 하나와 정원의 엄지와 검지 사이로 아이스크림이 녹아 흐르고, 둘 중 하나가 그것을 날렵하게 혀로 핥고, 괜찮다, 아이스크림콘은 으레 핥아서 먹는 거니까. 하나와 정원의 운동화가, 각각 왼쪽과 오른쪽이 테이블 아래에서 부딪히고, 창가 자리에 나란히 앉은 그 애들은 갑자기 웃음을 터뜨린다. 전봇대를 다 없애버려야 해, 하나와 정원 앞을 이런 생각을 하며 지나가는 이가 있다. 방금 전 파리바게트에서 산 롤케이크 봉투를 들고, 전선들, 그 수많은 전선들을 지하에 매립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지나가는 이가 있다. 그가 그대로 지나가게 놔두자. 이미 카페 안이 달콤한 냄새로 가득하니까. 설탕들. 알갱이들. 신발들. 눈빛들. 웃음들. 아직은 이것들을 사라지게 하지 말자. 고양이들이 담장을 넘어 지붕 위로 사라지고, 누군가가 흥정에 성공한다. 두부 세 모에 도토리묵 하나. 동전들이 잘그락거리고, 여전히 어떤 이들은 동전을 주고받는다는 일에 놀라는 사람이 있다. 다이소에서 방충 스티커와 쌍꺼풀 테이프를 사서 나오는 사람, 그 앞에 쌓인 물품들 중에서 과탄산소다와 구연산을 비교하는 사람, 신문지로 머그컵을 싸던 이가 손님에게 포인트 카드가 있는지 묻는다.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다. 포인트들. 우리가 살아가면서 쌓는 점수들. 유모차에 탄 개가 잠들어 있고, 유모차를 잠시 세워둔 이가 닭강정 2인분을 포장해달라고 요청한다. 줄지어 선 사람들. 대부분 계절에 맞는 옷차림을 하고 있고, 저녁 예배를 준비하는 교회들, 바닥에 물이 고인 데가 있고, 많은 사람들이 딱히 해롭지 않은 물웅덩이를 피해 목적하는 곳으로 향한다. 전구들이 빛나고, 빛, 빛들이 있다. 아직 해가 지려면 두세 시간 남아 있지만, 사람들이 많이 찾는 장소들은 언제나 많은 빛들을 밝히고 있기 마련이다. 그림자가 짙어진다. 리어카를 끌고 시장 초입을 지나가던 이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허리를 숙여 길바닥에서 무언가를 집는다. 전단지는 아니다. 낙엽도 아니다. 철 지난 은행열매도 아니다. 누군가의 증명사진이다. 우리는 모르는 얼굴이다.

 

아이들이 걸어간다. 저마다의 방향으로. 둘, 셋, 하나. 아름답게 여무는 머리통들. 아직 아무 일도 없다. 앞으로도 그러하기를. 누군가가 다급하게 사진관 문을 열어젖힌다. 줄곧 비아냥대는 말투로 정부의 보건의료정책을 비판하던 화면 속 아나운서에게 집중하고 있던 사진사가 막 들어온 손님……을 돌아본다. 사진, 사진들. 빛바랜 픽셀들. 해상도. 흑백. 색이름들. 그러나 무엇보다도 풍경들, 얼굴들. 카운터 뒤에 걸린 사진들 중에는 1992년 대청호 공원에서 찍은 것이 있다. 1992년 5월 5일. 디지털을 가장한 숫자들. 선들. 사진 속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화창하며, 두 줄로 늘어선 사람들은 모두 밝게 웃고 있다. 그중 누군가가 스케치북에 매직으로 대충 갈겨쓴 글자들을 내보이고 있다. 어린이날 기념. 다급하게 들어온 손님(그가 손님이라는 것이 확실해진다)이 여권용 사진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의 말과 표정과 몸짓으로 우리는 몇 가지를 유추해볼 수 있다. 그는 해외 출국을 앞두고 있다. 그런데 여권을 분실했다. 그의 여권은 지난달 인도네시아 출장에서 돌아온 그가 인천공항 출국장 3번 게이트 근처 흡연구역에서 담배를 피우는 사이에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의 여권은 그 후로 스스로 출국한 적이 없지만, 그의 눈에 띄지 않는다는 건 분명하다. 이번에는 베트남으로 출장을 가게 된 그는 급하게 여권을 찾아보지만, 보이지 않는다. 그는 급히, 급하게 인터넷 검색으로 긴급 여권을 발급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래서 그는 구청 업무가 종료되기 전 여권용 증명사진을 찍고 손에 넣고 규격에 맞게 자른 다음(그가 직접 자르지 않아도 되겠지만) 다시 구청으로 달려가 근무시간 5분 전에 찾아온 민원인 앞에서 떨떠름한 표정을 숨기지 않는 직원에게 각종 서류와 함께 제출해야 하는 것이다. 사진사가 그를 거울 앞으로 인도한다. 그는 머리를 손으로 대충 빗어 넘긴 뒤 준비된 자리에 앉는다. 하나, 둘, 셋. 플래시가 터진다. 그는 간신히 눈을 감지 않을 수 있다. 다시 한 번, 하나, 둘, 셋. 다시 한 번 플래시가 터진다. 그는 이번에도 눈을 감지 않는다. 여권을 재발급한다는 사소하다면 사소하고, 중차대하다면 중차대한 일이 성공하리라는 예감이 든다. 그는 분연히 자리에서 일어나 값을 치르고, 한 시간 뒤에 돌아오라는 말을 듣고, 여유로운 태도로 사진관을 나간다. 아이들이 걸어간다. 아이들이 여전히 걷고 있는 까닭은 그들이 수백 명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차례대로 저마다 목적하는 곳으로 향한다. 어떤 아이는 저녁 메뉴로 피자를 원하고, 또 어떤 아이는 어머니가 곤히 잠든 때를 틈타 어머니의 지문으로 어머니의 휴대전화를 잠금 해제할 계획을 세우고, 또 어떤 아이는 아프고, 또 어떤 아이는 다음 달 있을 태권도 승단심사에 대해 생각한다. 막 증명사진을 찍고 나온 손님이 주위를 둘러보다 조금 전까지 하나와 정원이 있던 카페에 들어간다. 방금 방범용 CCTV를 주문한 카페 주인이 밝은 얼굴을 가장하며 인사를 건넨다. 어서 오세요. 조그만 블루투스 스피커가 노래를 내보내고 있다. 라디오들. 주파수들. 전파들. 목소리들. 우리는 노래에 귀를 기울인다. 우리가 아는 노래다. 그렇다고 하자. 노래의 제목은…… 시옷으로 시작하거나…… 미음으로 시작하는데…… 사진관 손님에서 카페 손님이 된 이가 아메리카노를 주문한다. 온통 상아색인 카페 벽에 걸린 그림 두 점. 복제화들. 앙리 마티스의 이카루스. 조르주 쇠라의 그랑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 일요일들. 모레가 일요일이다. 아흐레 뒤 역시 일요일이다. 일요일. 아무리 여러 번 발음해도 괜찮은 낱말. 의미가 휘발되지 않는 낱말. 회문. 명화와 겨울이 걸어가고, 진명과 성아가 걸어간다. 유정과 희택이 걸어가고, 은성과 정은이 걸어간다. 횡단보도를 건너던 미국인이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이의 점퍼 앞판에 적힌 글자들을 보고 고개를 갸웃한다. Ça va? 그리고는 고개를 끄덕인다. Yes. 때로 한 줄의 우연한 문구는 단서가 된다. 지금 이 거리를 지나는 모든 보행자들이 별다른 의도 없이, 그러나 대단히 당당하게, 넘어지지 않고, 걷고 있다. 그래야 한다.

 

한동안 떠들썩했던 골목이 조용해지고 있다. 세 시 반. 마지막 떡꼬치 조각을 입안으로 밀어 넣던 아이가 문득 발레교습소 창문을 바라보다 말한다. 플리에. 뭐라고? 아이의 친구이자 역시 아이인 아이가 묻는다. 아니야. 갑자기 이상한 말이 생각났어. 아이가 대답한다. 두 아이는 남은 간식들에 열중한다. 다홍색 소스 한 점이 바닥에 떨어진다. 얼룩. 이 아이들에게는 말해지지 않은 이야기들이 있다. 이 이야기들은 페이지 밖에서 말해지게 될 것이다. 대신 아이들은 법사와 광역기에 대해, 딜과 파밍에 대해, 탱커와 원픽러에 대해 말한다. 아이들의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건성으로 듣고 있던 분식점 주인이 냉장고로 향한다. 가게 바닥에 떨어져 있는 무해한 설탕 알갱이들. 누군가가 가게 앞을 지나가며 달고 매운 냄새에 침을 삼키고, 집으로 돌아가던 아이가 점퍼 앞주머니에 아무렇게나 꽂아둔 리코더를 꺼내 주둥이 냄새를 맡아본다. 깨어난 꿈들. 깨고 싶지 않은 꿈들. 꿈을 깨다니, 애초에 깨다라는 동사를 꿈과 연결한 사람은 누구였을까? 추어탕 집과 면한 백반집에서 늦은 점심상에 맥주를 곁들여 마시고 있던 이가, 그를 케일라라고 부르자, 케일라가 조그만 굴비의 살점을 바르다 휑한 흰색 페인트 벽에 걸린 조그만 텔레비전 화면에 주목한다. 태안 앞바다에서 보물선이 인양될 가능성…… 전기 사용료 누진세 감면안 추진…… 케일라가 멍한 표정으로 생선의 살을 씹고 있다. 그의 식탁을 살펴보자. 식은 부추전 조각 세 개, 오이소박이, 진미채볶음, 어묵볶음. 먼지 한 점. 미세플라스틱. 머리카락 한 올. 고춧가루 한 점. 물방울 두 개. 뉴스가 끝나고 광고가 이어지는 동안 추어탕집 주인이 성난 얼굴로 가게 문을 열고 거리로 나온다. 흰색 소나타 한 대가 가게 앞에 막 주차를 마쳤다. 추어탕집 주인의 사정을 모르는 운전자가 무표정한 얼굴로 차에서 내린다. 추어탕집 주인이 그에게로 다가간다. 아니, 여기다 맨날 이렇게 주차를 하면…… 그러나 운전자는 그 말의 방향을 인지하지 못한다. 바쁜 것이다.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다소 소심한 성격의 추어탕집 주인은 분연히 출입문을 열고 대차게 거리에 나섰음에도 불구하고, 낯선, 게다가 표정이 없기까지 한 이에게 선뜻 대거리를 하지 못한다. 운전자는 잠시 양옆을 살피는가 싶더니 날랜 동작으로 4차선 도로를 무단으로 횡단한다. 17번 마을버스는 아직 전전 정거장에 머물러 있고, 어쩐 일인지 킥보드도 자전거도 오토바이도 지나가지 않으며, 콜을 기다리는 택시 한 대는 정차 중이고, 오로지 추어탕집 주인만이, 일주일에 세 번 이상 자신의 가게 앞에 불법으로 주차하는 흰색 소나타를 씩씩거리며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우리의 운전자는 어디로 사라졌지? 치과라면 어떨까. 충치를 제대로 치료하려면 때로는 몇 주일이 걸리기도 하니까. 혹은 치주염이라면. 아니면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주에 세 번 침을 맞으러 다니는 사람일 수도 있다. 가능한 얘기다. 파리바게트에서 마지막 롤케이크를 사서 나온 이가 우리의 운전자와 비껴 지나간다. 그의 손에 소중하게 들린 롤케이크가 누군가에게는 소중한 먹거리이기를. 영상 7도, 초겨울치고 포근한 날씨이지만, 곧 눈이 내릴 것이기에, 무엇보다도 케이크가 얼지 않기를. 우리의 운전자는 언젠가 영하 14도였던 겨울날 튤립 꽃다발을 들고 누군가의 공연장을 찾아간 적이 있었다. 흰색 튤립들은 꽃집에서 나오자마자 허옇게 얼었다. 얼음이 된 꽃들을 본 누군가들이 웃었고, 아름다움, 부서짐, 추위, 얼음, 그날 그들은 차가운 담벼락 앞에서 입김으로 말풍선을 만들며 대화를 주고받았다. 그런 날이 또 찾아올까? 우리의 운전자는 5층짜리 빌라 계단을 한꺼번에 두 칸씩 오르며 생각한다. 그러다 내려오는 거주자와 마주치기도 하지만, 시선을 살짝 돌릴 뿐, 발걸음은 거침없다. 차라리 연인이 우리의 운전자를 기다리고 있기를. 그것이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최선이므로.

 

하나와 정원이 하나의 정원이 된다. 우리가 이름들로 말놀이를 할 수 있는 건 이 페이지 안에서 여기까지다. 하나, 좋은 이름이다. 유일한 것. 일본어로는 꽃을 의미함. 수를 세지 않아도 좋은 것. 정원. 많은 것들을 품을 수 있는 이름. 이들은 이미 페이지 밖으로 사라졌다. 사라졌다기보다는 다른 세계로 넘어갔다고 표현하는 쪽이 정확하다. 쪽. 방향. 쪽. 페이지. 쪽. 입맞춤할 때 나는 소리의 일종. 아름다움은 여전히 아름답고, 눈이 내리려면 두어 시간, 혹은 반나절가량이 남아 있다. 오후 네 시 일 분. 존재하는 것들이 여전히 그대로 존재하는 시각. 세탁소에서 거두어 먹이는 개가 왼쪽 앞발에 괴었던 턱을 오른쪽 앞발로 옮긴다. 다리미가 지나갈 때 김이 피어오르고, 온기, 컴퓨터 세탁이라고 적었던 필름지가 낡아 언뜻 보면 커뮤터 세다라고 읽히기도 한다. 사라진 자음들. 우리가 날마다 부지불식간에 밟고 지나가는, 한때 글자였던 것들. 올리브영에서 새치염색약과 치간칫솔을 사들고 나오던 누군가가 다른 누군가의 그림자를 잠시 밟고 생각한다. 약국에 들러 식염수를 사야 해. 재활용 쓰레기봉투를 들고 나온 부동산 중개인이 산책 중이던 개를 보고 감탄한다. 아주 당당한 꼬리야.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을 번갈아 들여다보던 이가 커피 잔을 물리고 자리에서 일어선다. 사진을 찾으러 갈 시간이다. 늘…… 어떤 시간이다…… 늘…… 어떤 일이 벌어져도 놀랍지 않은 시간이다…… 우리가 미처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 사위가 어두워지고, 조금씩, 조금씩, 예컨대 안단테의 속도로, 그리고 사람들의 발걸음이 빨라진다. 사물들이 한 칸씩 어두워질 때마다 온도가 내려가기 때문이다. 장희네, 라는 간판을 내건 옷가게 주인이 마네킹의 옷을 갈아입힌다. 블라우스 대신 스웨터를. 청바지는 기모 안감을 덧댄 것으로. 사흘째 손님이 전혀 없어 전전긍긍하는 인테리어 업자가 굳은 결심을 하고서 변기를 진열장에서 치운다. 어쨌거나 겨울은 이 업계에서 비수기인 것이다…… 이는 사실……이 아닐지도 모른다…… 간신히 하수구에 빨려들지 않고 낙엽을 붙든 히읗이 저 자신의 행운을 믿을 수 없다는 듯 하하하, 웃음을 터뜨린다. 왼쪽과 오른쪽, 어느 한 쪽만 남은 블루투스 이어폰들과 함께 하마터면 이응이 될 뻔했지 뭐야. 그러나 히읗의 말을 들을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다. (우리를 제외하자.) 베로니카는 가야 할 때와 멈춰야 할 때를 안다. 손녀가 이에 대해 알 수 있으려면 시간이 좀 더 지나야 한다. 하지만 괜찮아, 시간은 지날 수밖에 없으니까. 시간이 지나가니까. 우리의 현실에서, 혹은 허구에서, 시간이 앞으로, 앞으로만 전진한다는 사실 외에 또 다른 사실이 있을까? 베로니카가 나일론 가방에 동전을, 동전들을 감춘다. 어떤 사물들이 가산명사라는 사실……이 때로 얼마나 다행인가. 꿈속의 사물들은 대부분 불가산명사라는 사실……도. 오후 네 시 사십 분. 짤막한 낮잠을 자고 일어난 생선구이가게 주인의 딸이 가게 밖에 설치된 화덕을 살핀다. 연기. 연기들. 고양이들이 매캐한 냄새를 피해 은신처로 달려간다. 낙엽들이 바스러진다. 해가 빠르게 사위어간다. 파드되. 누군가가 낯선 단어를 발음한다. 우리의 착각으로 낯선 이름을 지니게 된 누군가가 마지막 물 한 모금으로 콩나물무침의 매운 감각을 씻어내고 음식값을 치른다. 네 시 사십오 분 뉴스는 세 시 사십오 분 뉴스와 동일한 화면을 내보낸다.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일어나야 할 일들이 모두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잠시 우리의 인물들을, 우리를 마음 놓게 하자. 기만적이더라도. 위선적일지라도. 어느 지명들, 어느 꿈들, 지켜야 할 꿈들. 사랑해, 누군가가 말하고, 누군가는 그 말의 진위를 의심하면서도 품속을 파고드는 온기를 받아들인다. 오후 네 시 오십오 분. 곧 눈이 내릴 것이다. 흰 눈이 우리를 잠시 설레게 하고, 기만할 것이다. 괜찮아, 잠시 속아도 좋다. 이제 우리가 사라질 시간이다. 눈송이 사이로, 하나의 눈송이를 가장해서. 이렇게 우리는 여기서 잠시 흩어지지만, 알아둘 것, 이미 알겠지만, 우리는 언제고 다시 만나게 된다. 그렇게 될 것이다.

한유주
소설가, 1982년생
장편소설 『불가능한 동화』, 소설집 『숨』 『연대기』 『나의 왼손은 왕, 오른손은 왕의 필경사』 『달로』 『얼음의 책』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