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가장 맛있을 때, 분꽃

  • 2021년 겨울호 (통권 82호)
①가장 맛있을 때, 분꽃

에바 슈트리트마터의 시 「전설」을 옮겨본다.
어디에선가 나는 읽은 적이 있지, 어떤 도시에 아주 낡은 나무집이 헐렸다는 걸. 오래된 나무로 사람들은 바이올린을 만들었네, 그 악기들은 특별한 소리를 낸다고 하네. 틀림없이 화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겠지. 하지만 나는 생각한다네, 그들은 나무 속으로 들어온, 오래전 지나간 삶을 노래한다네. 기록될 수 없는 흔들거림과 함께 오늘까지 울려오네. 바이올린이 울리면 사람들은 악보에 들어있지 않은 음을 듣네. 마치 침묵하는 사람들이 웅얼거리며 지나가는 듯한 소리. 이건 아주 아름다운 전설. 그리고 나는 내 시속에서 꿈을 꾸네, 내 시 속에는 언제나 목소리 없는 것들이 말하는 소리가 함께 울려 나기를.

가장 맛있을 때

꽃게는 모란이 피었다 질 무렵
웅어는 보리가 팰 무렵
도다리는 새 쑥이 나올 무렵
주꾸미는 냉이, 두릅 순이 나올 무렵
황복은 진달래 지고
철쭉이 필 무렵
호래기, 멸치는 해당화 필 무렵
민어는 애호박에 단맛이 들 무렵
전어는 집 나간 며느리가 돌아올 무렵
꼬막은 첫눈이 올 무렵

내 첫사랑은
아나벨 수국이 필 무렵


분꽃

마당에 햇살 가득합니다
마당을 지나 그림자가 그림자를 끌고 갑니다
두 그림자 중 하나는 눈이 멀었습니다
누가 어미고 누가 딸인지
알 수 없습니다

단지 나는 어떤 이유가 생겼습니다
꽃 진 자리마다 눈(目)처럼 까만
열매가 달려 있습니다
여름내 꽃으로 지켜본 것을
그 안 쟁여 두었습니다
깨무니 흰 가루가 나옵니다
손등에 바르고 혀끝에 대봅니다
하지만 꽃의 여름을 알 길이 없습니다

그 새 여윈 그림자가 마당을 지나
입 좁은 식초 항아리 속으로 들어갑니다
둘 중 하나는 어미고 둘 중 하나는 딸이고
둘 중 하나는 눈이
멀었습니다

고영민
시인, 1968년생
시집 『악어』 『공손한 손』 『사슴공원에서』 『구구』 『봄의 정치』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