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문학의 순간들
《현대시학》과 《현대시》와 미당과의 만남

  • 우리 문학의 순간들
  • 2021년 겨울호 (통권 82호)
《현대시학》과 《현대시》와 미당과의 만남

- 원래 《현대시학》은 내가 맡기로 되어 있었어.

시인 원구식의 주장이었다. 1991년에 내가 《현대시》를 찾아가 발행인이면서 편집인을 겸하고 있는 그에게 청탁 받은 원고를 건네준 후 인근의 주점에서 술 한 잔 나누다가 전해 들은 뜻밖의, 그리고 당혹스럽기도 한 발언이었다. 원구식의 주장이 당혹스러웠던 까닭은 그 당시에 내가 《현대시학》에 글을 자주 발표하며 주간을 맡고 있는 정진규 시인과 가깝게 지내고 있기 때문이었다.

 

1969년도 《현대시학》 창간호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원자료 소장 : 국립중앙도서관)    

1990년도 《현대시》 창간호(현대시 제공)    

 

내가 대학 진학에 실패하고 재수하던 1974년 가을에 인사동의 삼육학원이라는 곳에서 처음으로 마주친 국어선생이 정진규 시인이었다. 소월과 미당의 시를 오페라 아리아처럼 극적이면서 리드미컬하게 암송하던 그에게 나는 이내 매혹되었고, 대체로 오후 시간에 진행되었던 국어 수업에 낮술을 즐긴 탓인지 은은한 주향을 풍기는 그의 체취도 낭송 효과를 드높여서 인상적이었다. 그 후로 정진규 시인은 내가 등단하던 1988년에 전봉건 시인이 수십 년 동안 발간해오던 《현대시학》의 주간 자리를 계승하였으며, 삼육학원이 자리를 잡았던 바로 그 건물이 관훈미술관으로 환골탈태를 하게 된 곳 2층에 세를 얻어 유서 깊은 시 전문 월간지를 펴내게 되었다. 입시학원의 국어선생으로 맺은 나와의 인연을 어색해하면서도 정진규 시인이 나에게 격려와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시절이기도 해서 나와 동갑내기로 금세 허물을 털어버린 원구식의 돌연한 주장은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시인 원구식은 1979년에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하면서 시 부문 심사위원이었던 전봉건 시인과의 첫 인연을 마련했던 듯하다. 그 인연이 보다 현실적인 관계로 전개될 기반을 1980년대 후반부터 한국 사회에 불어닥친 퍼스널 컴퓨터 교육열풍이 마련해 주었다. 전국에 우후죽순으로 컴퓨터학원이 문을 열던 시절에 원구식은 일찍 눈이 뜬 컴퓨터 지식을 밑천으로 삼아서 컴퓨터 교재를 만들어 학원에 납품을 했는데, 그것이 소위 밀리언셀러를 기록하는 대박을 터뜨렸던 것이다. 그리고 그 무렵부터 전봉건 시인의 건강이 나빠지기 시작했으며 《현대시학》이 발간되는 형편도 여유롭지 못했던 듯하다. 원구식은 문단 스승의 형편을 돌아볼 경제적 여유를 마련한 탓에 이런저런 도움을 제공하면서 전봉건으로부터 《현대시학》을 물려받을 언질을 확보했을 것이다. 그런데 1988년 여름에 전봉건은 세상을 떠나고 《현대시학》은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정진규의 손으로 넘어가버렸다. 원구식은 그런 결과에 아쉬움을 넘어서 분노에 가까운 심정을 품게 되었고 그런 심정은 다른 출발을 마련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하였다.
1990년 1월에 《현대시》가 창간된 배경에는 그런 심정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제호(題號)가 《현대시》이며 《현대시학》과 똑같이 월간 시전문지를 창간하게 된 까닭에는 분단 이후 전개된 한국 시문학사의 영향이 작용했던 점도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본래 《현대시》가 본격적으로 문예지의 제호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957년이었다. 한국시인협회가 1957년에 발족하자 그 기관지로 창간이 되었던 셈이다. 하지만 《현대시》는 문예지 발간의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지 못하고 겨우 2호만 발간한 채 폐간되어버리고 만다. 《현대시》라는 제호의 문예지가 다시 출간되는 보람은 1961년에 한국시인협회 회원들의 중지를 모으면서 마련되었다. 이때부터 출간되었던 《현대시》는 문예지와 함께 동인지의 성격을 갖게 되었으며 1969년까지 20호를 발간하는 성과를 누렸다.
두 차례의 《현대시》 발간 역사에서 주목할 사항은 잡지 편집의 실무를 1957년에 발간되었을 경우에는 전봉건이 맡았으며, 1961년에는 김광림이 맡았다는 사실이었다. 이런 두 시인의 편집 실무 경험을 바탕으로 1960년대 후반에 2종의 시 전문 문예지가 창간되었는데 그 제호가 모두 《현대시학》이라는 점도 이채로워 보인다. 1966년 2월에 김광림이 먼저 주간을 맡으면서 창간한 《현대시학》은 월간 시전문지로 10월까지 통권 8호를 출간하고 폐간되었으나 1969년 4월부터 전봉건이 주간을 맡고 펴낸 《현대시학》은 오늘날까지도 지속적으로 발간되고 있다.
시인 원구식이 1990년에 《현대시》를 창간하면서 비상임 주간으로 김광림을 초대한 까닭도 한국 시문학사에서 《현대시》와 《현대시학》이 발간되며 시문학 발전에 기여한 족적을 계승하는 취지를 인정받으려는 데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나는 1991년부터 발행인인 원구식의 동의 아래 기획실장이라는 직함을 달고 《현대시》 지면을 쇄신하는 작업을 감행하기 위하여 《현대시》 사무실을 찾을 때마다 자주 김광림 시인을 만날 수가 있었다. 그는 해방 이후인 1948년에 등단하였으며 1957년에 김종삼, 전봉건과 함께 3인 시집인 『전쟁과 음악과 희망과』 등을 펴내며 1950년대 후반기부터 주목받기 시작한 원로 시인이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김광림이 연륜으로나 문단 등단 시기로나 《현대시학》을 맡은 정진규보다 십여 년 선배인데도 정진규와 고려대학교 국문과 입학 동기였다는 점이다. 따라서 두 명의 입학 동기가 1991년에 라이벌 관계인 문예지의 주간을 맡고 있는 기묘한 상황이 펼쳐지던 시기에 나는 정진규 시인으로부터 배신자라는 소리를 들을 각오를 하고 용산구 삼각지에 자리 잡은 《현대시》사옥을 거의 3년 동안 일주일에 두 차례씩 꼬박꼬박 찾아가며 잊을 수 없는 문단의 인물과 사건들을 접하게 되었다.
그 만남들 중에서 1992년의 새해 첫날에 사당동 예술인마을에 거주하던 서정주 시인을 찾아뵌 기억이 새삼스럽다. 원구식 시인을 따라서 신년인사를 드리기 위하여 ‘봉산산방’이라는 별호가 붙은 2층 벽돌집을 찾았을 때, 예상했던 대로 현관에는 수많은 문객들의 신발이 어지럽게 놓여 있었다. 그런데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아래 지친 행색으로 앉아있는 노파의 모습이 내 시선을 끌었는데 나중에야 그곳에 그분이 그렇게 앉아계신 까닭을 알아차릴 수가 있었다. 미당의 서재로 들어가 세배를 올리고 선생이 자리한 앉은뱅이책상 주변의 많은 방문객들 틈을 비집고 앉으니 미당은 대뜸 책상 위에 놓여있던 손잡이가 달린 종을 흔들기 시작했다. 그러자 잠시 후에 아까 보았던 노파가 캔맥주가 담긴 쟁반을 들고 서재로 들어섰다. 바로 그 노파가 서정주 시인의 사모님이었으며 두 분은 그렇게 종소리로 의사소통을 한다는 것이었다. 미당의 주된 칩거 공간인 2층과 미당 아내의 활동 공간인 1층을 잇는 연락병이 목소리도 초인종도 아닌 종소리라는 사실이 한편으로는 기발하면서도 쓸쓸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그 무렵 미당과 관련해서 화제가 되었던 일화는 바로 전 해에 펴냈던 시집 『산시』가 치매를 예방하기 위하여 아침마다 세계의 산 이름들을 암송하던 습관의 결실이라는 사실이었다. 치기가 많은 후배 시인이 미당에게 인사를 드리려고 찾은 자리에서 시범 삼아 직접 암송을 해주십사고 청을 넣었다가 치도곤을 맞았다는 소문이 나중에 떠돌기도 했었다. 미당은 사당동 예술인마을에서의 종소리 일상을 8년 동안 더 누리다가 2000년도 가을에 아내를 먼저 이승으로 보내고 그 해 크리스마스이브에 85세로 생을 마감했다. 아내를 먼저 저승으로 떠나보내고 홀로 남은 이승에서의 2개월 동안 거의 곡기를 끊은 채 통음으로 저승에서의 재회를 기약한 미당의 마지막 모습에서 종소리 소통 방식이 정겨움의 표현이었다는 사실을 읽어낼 수가 있었다.

이경호
평론가, 1955년생
저서 『문학과 현실의 원근법』 『문학의 현기증』 『상처학교의 시인』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