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문학의 공간
주어진 앞

  • 내 문학의 공간
  • 2021년 겨울호 (통권 82호)
주어진 앞

 

이 세상에 존재하는 한 앞은 주어진다. 뒤돌아보지 말고. 정신 똑바로 차리라는 듯이. 앞은 주어진다. 나아가야 할 앞이 막혀 있으면 돌아가야 할 앞이 주어진다. 뒤는 없다. 뒤는 내가 똑바로 볼 수 없는 것. 뒤가 있다는 믿음을 품을 때 비로소 뒤는 태어나는 것.

나는 지금 처절한 앞을 보고 있다. 결코 물러서지 말아야 할 앞이 내겐 있다. 최대한 여유로운 표정을 지으며 시간을 능숙하게 다루는 척한다. 실은 벌벌 떨고 있다. 도저히 용기를 가지기 힘든 앞이다. 이 앞의 끝을 잘 알고 있다. 아무도 그 끝에 도달했을 때 어떤 기분인지, 이 세상을 떠나 어디로 가게 되는지, 거기서 또 누구를 만나게 되었는지 알려주지 않았지만.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앞은 분명하다. 앞은 예쁘게 뻗어 있다. 앞은 나를 속이고 있다. 가로의 형상만이 앞이 아니다. 앞은 세로일 수 있다. 앞은 새로울 수 있다. 하늘이 내게 주어진 앞이다. 땅이 내게 주어진 앞이다.

뒤에 누군가 있다. 기척이 느껴진다. 누군가가 내 뒤에 있다는 충분한 증거들.

그것들을 토대로 나는 생각한다. 지금 뒤를 돌아보면 누군가와 마주친다. 선택하자.

뒤를 돌아볼 것인가, 말 것인가.

돌아보자.

그대로 뒤를 돌아보면 뒤는 사라진다. 뒤는 관념이다.

그러나 누군가는 실재해야 하지 않는가. 아무도 없다. 왜? 증거들은 분명했는데.

어째서.

앞이 떤다.

 

우리집 앞을 가장 좋아한다. 동네 친구 얼굴을 잠깐 보려고 할 때도 친구는 말한다. 너희 집 앞으로 갈게. 그러면 우리는 우리집 앞에서 만난다. 우리집 앞에는 벤치가 많다. 하나 골라 앉는다. 찬 공기 속에서 우리가 주고받는 대화는 자주 따뜻하다. 가끔 차가움에 차가움을 더하기도 하지만 춥지 않다. 우리집 앞은 그런 일로 추워지지 않는다. 온도에 영향을 받지 않는 곳. 말들이 숨 쉴 수 있는 곳. 말하지 않아도 침묵으로서 존재할 수 있는 곳. 나보다 먼저 죽은 자들을 홀로 떠올릴 수 있는 곳.

이곳은 여름에 참 예쁘기도 하다. 특별히 조경이 아름다운 곳은 아니지만 아파트 벽에 군데군데 박히는 햇빛 알갱이들을 보면 여름은 조각 단위로 이루어진 것이 아닌가 싶다. 우리집 앞은 내가 자주 가는 앞. 내가 여기에 살지 않았으면 알지도 못했을 앞. 앞이 아니라 못 보고 스쳐 지나갔을 수도 있을 옆. 혹은 곁. 나는 우리집 앞이 참 좋다. 나와 우리집 앞은 재회를 약속하지 않는다. 언제든 만날 수 있고, 언제든 헤어질 수 있다.

 

 

앞이 어둡다. 찬바람이 분다. 오들오들 몸이 떨리지만 외투를 가지러 다시 집에 들어가진 않는다. 그냥 잠깐 벤치에 앉아 노래나 듣고 싶어서 나온 것뿐이니까. 앞은 오래 머물 만한 곳이 아니다. 앞을 지우는 방식으로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뒤돌아본다고 소금기둥이 되진 않으니 안심하여도 좋다. 나는 잘 살고 있다. 잘 살고 있는 자들에게 앞이 주어진다. 우리집 앞이 텅 비어 있다. 담배를 피우러 나온 사람들조차 없다. 너무 늦었나? 하지만 무엇으로부터? 다음 날로부터? 당신에게로부터? 질문을 바꿔본다. 너무 깊었나? 하지만 어디가? 하늘이? 땅이? 앞이? 앞은 어느 방향이지? 앞은 내가 보고 있는 방향으로 뻗은 게 앞이겠지. 단순해. 재미없어. 여름이 다 갔고 가을이다. 겨울도 곧 오겠지. 여름의 앞이 가을인가. 가을의 앞이 겨울인가. 확신이 들지 않는다. 순리대로 살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우리집 앞은 참 조용해. 기분 좋은 시간이야. 바람이 더 불었으면. 노래를 더 키워볼까. 옆에서 들리는 노래를. 미래에 만들어질 노래를 미리 들을 순 없으니. 자꾸 과거로부터 찾게 되는 슬픔을.

나는 벤치에 앉아 나무가 흔들리는 모습을 본다. 아직 잎이 남아 있다.

누군가 내 뒤에 있다. 기척이 느껴져. 뒤가 떨린다. 분명해.

나는 당신의 앞이다. 당신 앞엔 내가 있다. 노래를 듣는 나의 뒷모습이 보이는가.

힘차게 뒤돌아본다.

당신은 없다.

앞은 외투를 입고 나올걸, 하며 후회한다. 

춥다.

이기리
시인, 1994년생
시집 『그 웃음을 나도 좋아해』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