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그림 산책
무수히 많은 점으로 그려진 금강산의 장관

- 정선의 《신묘년풍악도첩》과 <금강전도>

  • 우리 그림 산책
  • 2021년 겨울호 (통권 82호)
무수히 많은 점으로 그려진 금강산의 장관

- 정선의 《신묘년풍악도첩》과 <금강전도>

 그림 1. 정선, <단발령망금강산>, 《신묘년풍악도첩》, 1711년, 비단에 엷은 색, 34.4 x 39.0cm, 국립중앙박물관     

 

정선(鄭敾, 1676-1759) 이전에 우리나라 산수화의 주류는 중국의 화풍에 기반하여 이상(理想)적인, 가상의 풍경을 그린 그림이었다. 안견(安堅, 15세기 중‧후반에 활동)의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1447년, 일본 텐리[天理]대학 중앙도서관 소장)를 보면 정선 이전의 한국 그림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쉽게 알 수 있다. 안견은 안평대군(安平大君) 이용(李瑢, 1418-1453)이 소장하고 있었던 중국 그림들, 이 중에서도 북송시대를 대표하는 화가인 곽희(郭熙, 1001년경-1090년경)의 그림들을 공부하여 자신의 화풍을 형성해 나갔다. <몽유도원도>의 원류는 곽희의 <조춘도(早春圖)>(1072년, 타이베이 국립고궁박물원 소장)와 같은 그림에서 찾을 수 있다. 환상적인 산의 모습,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구름처럼 생긴 바위들은 곽희 화풍의 핵심이다. 한편 안견과 그를 추종했던 화가들이 그린 그림들은 실재하는 경치가 아니라 이들이 상상을 발휘해 그린 관념적이고 이상적인 산수화였다. 안견의 화풍을 대신해 조선 중기에는 절파(浙派) 화풍이 유행하였다. 명나라 때 절강성(浙江省) 항주(杭州) 출신의 화가인 대진(戴進, 1388-1462)을 시조로 그를 추종했던 다양한 직업화가들의 화풍을 절파 화풍이라고 한다. 1500년 이후 1730년 정도까지 절파 화풍은 조선에서 크게 인기를 끌었다. 이 시기에 살았던 대부분의 조선의 화가들은 절파 화풍으로 그림을 그렸다. 절파 화풍의 전형적인 특징은 바위와 산 표현에 나타난 강한 흑백 대조, 기울어진 산, 평면적인 화면, 공간적 깊이감의 부재(不在), 화면(畵面) 전경(前景)에 위치한 큰 나무, 이 나무 밑에 배치된 인물 등이다.

그런데 1711년에 조선시대 회화에 혁명적인 일대 사건이 일어났는데 이것이 바로 정선의 금강산 여행이다. 현재 서울의 북쪽에 있는 청운동 일대에서 태어난 정선은 가난한 몰락 양반 집안의 아들이었다. 그는 열네 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와 남동생, 여동생을 먹여 살려야 하는 소년 가장이 되었다. 결국 생활고 때문에 정선은 남동생을 집안의 친척에게 양자로 보냈다. 그는 인생의 기로에서 고민에 빠졌다. 어려운 가정 형편 속에서도 과거시험을 열심히 준비해 관료가 될 것인가 아니면 화가로서 성공해 돈을 벌 것인가를 두고 그는 번민했다. 그는 화가가 되는 길을 선택했다. 그러나 그의 화가로서의 성공은 매우 늦게 이루어졌다. 정선은 41세가 되어서야 주위의 추천을 받아 낮은 직급의 관료로 생활하게 되었으며 아울러 그림을 그려 생계를 이어갔다. 41세 이전에 그는 북악산 아래에 있는 장동(壯洞)에서 활동했던 동네 화가였으며 인근의 양반들에게 그림을 그려주면서 생계를 꾸렸다. 그가 서른여섯이 되던 해인 1711년에 같은 동네 사람인 신태동(辛泰東, 1659-1729)의 도움으로 정선은 금강산을 가게 되었다. 이때 비로소 정선은 우리나라 산천의 진면목(眞面目)을 발견하게 되었으며 금강산의 절경을 화폭에 담게 되었다. 그 결과 중 일부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신묘년풍악도첩(辛卯年楓岳圖帖)》이다. 이 화첩에 들어있는 그림들은 조선 초기 이래 중국 그림을 모방 또는 추종하던 단계에서 완전히 벗어나 우리나라의 자연 경치가 본격적으로 그림의 주제가 된 역사적인 순간을 보여준다. 그다음 해인 1712년 8월에 정선은 다시 금강산을 여행하였다. 이번에는 금강산 근처에 있는 고을이었던 김화(金化)에서 현감으로 재직하고 있었던 절친한 친구인 이병연(李秉淵, 1671-1751)의 초청으로 정선은 금강산에 다시 가게 되었다. 이병연은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저명한 시인이다. 정선은 이병연의 아버지, 동생, 그리고 시인이었던 장응두(張應斗, 1670-1729)와 함께 금강산을 여행하고 이때 명품으로 회자되던 《해악전신첩(海嶽傳神帖》을 제작하였다. 그러나 아쉽게도 《해악전신첩》은 현재 전하지 않는다.

 

그림 2. 정선, <장안사>, 《신묘년풍악도첩》, 1711년, 비단에 엷은 색, 35.7 x 36.6cm  

 

1711년에 정선이 조선시대 산수화에 어떤 혁명적인 변화를 이룩했는지는 《신묘년풍악도첩》에 잘 나타나 있다. 이 화첩의 한 장면인 <단발령망금강산(斷髮嶺望金剛山)>(그림 1)을 살펴보자. 여행객이 한양에서 금강산을 가기 위해서는 김화를 거쳐 금성(金城)을 통과한 후 단발령을 넘어야 한다. 단발령은 금강산으로 들어가는 입구라고 할 수 있다. 이 그림은 정선이 단발령에서 바라본 금강산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화면의 오른쪽 중간에는 갓을 쓴 5명의 양반이 단발령에서 금강산을 바라보며 대화를 나누고 있는 장면이 나타나 있다. 그림 왼쪽의 윗부분에는 구름 위로 우뚝 솟은 금강산의 모습이 나타나 있다. 정선은 암산인 금강산과 흙산인 단발령을 극적으로 대비시켜 묘사하였다. 금강산의 각종 봉우리는 흰색으로 처리되어 암산의 느낌이 잘 나타나 있다. 한편 단발령은 옆으로 찍은 무수한 점들로 표현되어 있다. 이 점들은 미점(米點)으로 불린다. 미점은 북송시대의 사대부 화가였던 미불(米芾, 1051-1107)과 그의 아들인 미우인(米友仁, 1074–1151)이 창시한 그림 기법이다. 이들은 구름과 안개가 낀 산을 표현하기 위해 옆으로 찍은 점인 미점을 고안해 냈다. 이들이 미점을 사용해 그린 그림을 미법(米法) 산수화라고 한다. <단발령망금강산>에서 볼 수 있듯이 정선의 금강산 그림에는 미점이 적극적으로 활용되었다. 《신묘년풍악도첩》에 들어있는 <장안사(長安寺)>(그림 2)를 보면 앞산과 뒷산에 많은 미점이 찍혀있다. 아울러 장안사 및 그 건너편 계곡 주위에 있는 나무들의 잎은 옆으로 길게 찍은 점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와 같이 나뭇잎을 묘사하는 데 사용된 옆으로 긴 점 역시 미점의 변형이다.
<단발령망금강산>과 <장안사>에서 볼 수 있듯이 정선은 오랫동안 조선 화단(畵壇)을 지배했던 중국식 화풍에서 완전히 벗어나 한국의 산천과 인물을 생생하게 그려냈다. 더 이상 상상 속의 경치가 아닌 우리나라에 실재하는 산, 언덕, 바위, 나무, 건물과 한국 사람들의 모습이 그림의 본격적인 소재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정선이 한국의 명산인 금강산을 그린 것도 중요하지만 금강산을 미점을 써서 그렸다는 것 또한 매우 중요하다. <단발령망금강산>에 잘 나타나 있듯이 정선은 미점을 써서 단발령을 묘사하였다. 단발령은 모두 점으로 표현되어 있다. 즉 정선은 점만을 써서 단발령을 그렸던 것이다. 정선 그림의 핵심은 금강산을 그렸다는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금강산을 점으로 그렸다는 것이다. 이는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점을 찍어 금강산을 그렸다. 바로 정선 그림의 경이로움은 미점을 효과적으로 능수능란하게 사용했던 사실에 있다. 정선의 그림은 한마디로 ‘점의 그림’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는 ‘점의 대가’였다.

 

그림 3. 정선, <금강전도>, 1734년경, 종이에 엷은 색, 130.7 x 94.1cm, 삼성미술관 리움    

 

중국에서 미법 그림은 사실 산수화의 주류가 아니었다. 미우인 이후 미점은 주로 구름과 안개가 낀 산을 표현하는 데 사용되었다. 명청(明淸)시대에 미법 산수화는 지나치게 추상화되어 현실감이 떨어진 그림이 되었다. 그런데 구름과 안개가 낀 산의 분위기를 표현하기 위해 고안된 미점을 정선은 산의 실재감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하였다. 이러한 정선의 미점 사용은 미점 본래의 성격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미점이 개발된 이래 정선은 사실상 미점을 가장 잘 쓴 동아시아 화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선이 평생 그린 그림 중 대부분에 미점이 등장한다. 정선을 동아시아 최고의 미법 산수화가라고 평가할 수 있는 근거는 그가 1734년경에 그린 <금강전도(金剛全圖)>(그림 3)이다. 이 그림은 정선이 그린 금강산 그림 중 최고의 명작이며 현존하는 그의 금강산 그림 중 가장 크기가 큰 거작(巨作)이다. <금강전도>는 마치 하늘 위에서 찍은 항공사진과 같은 느낌을 준다. 정선은 한 폭의 화면에 금강산 전체의 풍경을 집약적으로 묘사하였다. 왼쪽에는 둥글고 부드러운 흙산이 보이며 오른쪽에는 깎아지른 듯 솟아오른 수많은 화강암 봉우리가 나타나 있다. 정선은 높은 시점에서 금강산 전체를 조망하여 한 화폭에 담았는데 금강산의 기세와 장관이 화면을 압도하고 있다. 정선은 먹으로 그린 금강산 위에 푸른색 물감을 둘러 화면 위에 맑고 상쾌한 분위기를 만들어 내었다. <금강전도>는 멀리서 보면 금강산 일만이천봉의 위용이 눈앞에 성큼 다가오는 느낌을 받는다. 그런데 가까이 다가가 이 그림을 자세하게 살펴보면 곳곳에 무수한 점이 찍혀있다(그림 4). 흙산과 바위 봉우리의 아랫부분은 온통 점으로 가득 차 있다. 정선은 작은 미점과 나무를 표현하기 위해 고안한 미점의 변형인 옆으로 긴 점을 활용하여 흙산과 화강암 봉우리 사이에 형성된 계곡의 모습을 생생하게 표현하였다. <금강전도>는 ‘점의 바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그림은 화강암 봉우리를 묘사하는 데 사용된 강한 필선을 제외하고는 모두 점으로 그려진 작품이다. 결국 정선은 점만으로 금강산의 장관을 생생하게 묘사한 것이다. 정선은 구름과 안개가 자욱한 풍경의 분위기를 표현하기 위해 개발된 미점을 본래의 목적과는 달리 실재하는 경치를 그리는 핵심 기법으로 변화시켰다. 동아시아의 어떤 화가도 정선과 같이 미점을 실경 산수를 그리는 데 이와 같이 효과적으로 활용하지는 못했다. 그는 미법 산수화의 최고 대가였다.

 

그림 4. 그림 3의 세부   

장진성
서울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 교수, 1966년생
공저서 『Landscapes Clear and Radiant: The Art of Wang Hui, 1632-1717』, 저서 『단원 김홍도: 대중적 오해와 역사적 진실』, 역서 『화가의 일상: 전통시대 중국의 예술가들은 어떻게 생활하고 작업했는가』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