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후기
마음을 쓰고 있습니다

- 소설집 『사진을 남기는 사람』

  • 창작후기
  • 2021년 겨울호 (통권 82호)
마음을 쓰고 있습니다

- 소설집 『사진을 남기는 사람』

 

첫 소설집을 내고 한 달 후 이사를 했다. 전에 살던 아파트는 남서향으로 해가 질 무렵이 가장 눈이 부신 집이었다. 이사한 집은 석양을 볼 수 없지만, 모락산과 바라산 사이 위로 솟아나는 해를 볼 수 있다. 남동향으로 난 창가에 정돈되지 않은 책상을 놓고 이따금 창밖을 바라보며 글을 쓴다. 낯선 자리와 새로 난 눈길이다. 앉은 자리에 따라 쓰는 글의 성격과 결이 다름을 알고 있는 나는 글 첫머리부터 조바심을 내며 쓰기 시작했다.

『사진을 남기는 사람』 소설집 출간으로 안부 인사와 축하의 글과 여러 질문을 받는 시기였다. 소설집이 왜 이제야 나온 거야? 친구들이 묻는다. 차마 묻지 못하다가 책이 나오니 스스럼없이 하는 질문일 게다. 누군가는 좀 더 익살맞게 물었다. 지금까지 어떻게 참았어? 질문에 호의가 느껴졌다. 참은 것이 아니라 참지 못하고 책을 낸 것이라고 고백하려다 말았다. 그리고 그렇게 물어준 친구에게 고마움 가득 품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소설 쓰면서 참았지.

그날 집에 들어가자마자 소설을 썼다. 한 장의 나무 사진을 보고 쓴 「사진을 남기는 사람」과 한 줄의 문장을 쓰기 위해 쓴 「밤하늘이 강처럼 흘렀다」. 그 밖에도 대사 한마디를 쓰려고 구상한 소설도 있다. 이번엔 질문이 소설을 쓰게 했다. 호의나 고마움과는 상관없는 내용이었다. 「그들의 마리오네트」. 이사한 집에서 처음 쓴 단편소설이었다. 나는 내 삶에서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누군가 작의를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하는 게 어떨까.

어린 시절 어느 소극장에서 인형극을 보았다. 십자로 엇갈려 만든 나뭇개비에 줄이 연결되어있고 그 줄에 관절이 매달린 마리오네트였다. 조정하는 이가 나뭇개비 잡은 손을 움직이자 인형은 걸음을 떼어 걷고 느닷없이 입을 벌리고 팔을 뻗었다. 가끔은 헛발질하던 두 발이 땅에서 떨어져 공중에서 걷기도 하고 부자연스럽게 구부러진 팔로 자신의 머리를 치기도 했으며 속삭이는 말을 하는데도 과장되게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 그랬으므로 그 모습은 성실함이 지나쳐 능력 밖의 일을 해내는 것처럼 보였다.

원하지 않는 일을 마지못해서 하는 것은 아닐까 그런 의문이 들 즈음 다른 인형이 등장하는 차례가 되었다. 좀 전까지 움직이던 인형은 바닥에 팔다리가 꺾인 채로 주저앉아 있곤 했다. 움직이는 일이 허락되지 않은 듯 보였다. 조정하는 이가 줄을 잡을 때까지 기다리는, 헐겁게 늘어진 몸피와 보는 일, 듣는 일마저 하지 못하는 맥빠진 표정. 불가피한 일이라는 듯 고개를 바닥으로 떨군 자세. 몹시 울적해 보여 마음이 쓰이곤 했는데 왠지 마음을 쓰는 일이 어렵게만 느껴졌다. 그 모습이 나에게서 때로는 다른 이의 모습에서도 찾아지고는 했으니까.

 

등단 8년, 대산창작기금 수혜 7년 만에 소설집이 나온 이유에 관해 나는 이렇게 대답하고 싶었다. 기다리는 일이었다고. 등단작 「유품」에 나오는 대사였다. 완성도가 떨어진 것도 맞고 그래서 퇴고 과정이 한없이 길어진 것도 맞다. 미덥지 못한 나를 가만히 누르고 있던 시간도 길었다. 소설집이 왜 이제야 나왔는지보다 소설집이 이제야 비로소 나왔다는 말이 더 적절하리라. 내게 주어진 때가 있듯이 책도 세상에 나올 시기와 계절이 정해져 있다면 알리바이가 될까.

『사진을 남기는 사람』 소설집이 봄날 세상에 나왔다. 어딘가에 관절이 매달린 인형처럼 오늘은 쓰고 내일은 기다리고 그다음 날은 누군가를 만나 웃고 울고. 맥빠진 표정으로 주저앉아 있다가 또 쓰고 기다리고. 그렇게 기다린 계절에.

바람을 말해도 된다면 나는 다만 누군가가 내게 너그럽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그리하여 읽고 쓰는 일에 좀 더 오래 나를 매달아 주기를. 쓰기에 행복하므로. 이 지경으로. 꼭 언젠가는 곰살맞고 다정한 사람들이 등장하는 이야기를 미학적으로 쓰고 싶다. 글이 아니라 마음을 쓰고 싶다. 이 지경이 된 건 아무리 생각해도 내게 행운이다. 도움 주신 모든 분께 감사드린다.

 

※ 필자의 소설집 『사진을 남기는 사람』은 재단의 대산창작기금을 받아 2021년 아시아출판사에서 발간되었다.

유희란
소설가, 1968년생
소설집 『사진을 남기는 사람』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