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글쓰기의 스승
‘와운당’에 계십니다

  • 내 글쓰기의 스승
  • 2021년 겨울호 (통권 82호)
‘와운당’에 계십니다

1960년대 명동 어느 주점에서, 어떤 청년이 우연히 시인 김수영과 자리를 함께 하게 되었습니다. 청년이 고개 숙여 인사할 때, 옆 사람이 이렇게 소개를 했습니다. “요즘 촉망받는 평론가, H군입니다.” 잠자코 듣던 시인이, 우리가 사진에서 봐서 알고 있는 그 눈빛 그 표정으로 물었습니다.

“우리나라에 평론가란 게 있었나?” 시인의 한마디에 분위기가 묘해졌을 것은 당연한 일. 그런데, 이 젊은이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시인과 가만히 눈을 맞추며, 지체 없이 답을 냈습니다. “예, 없지요. 시인이 없는데, 평론가가 어디 있겠습니까?” 순간, 김수영이 놀라움과 반가움 섞인 낯빛으로 무릎을 치면서 잔을 권했습니다. 그 젊은이가 제 선생님이십니다. 문학평론가 ‘홍기삼(洪起三)’. 워낙 이른 나이부터 문명을 드날려서, 당신의 연세를 훨씬 올려 짚는 사람도 적지 않지요. 하여, 저는 이런 질문도 더러 받습니다. “그분이 아직 생존해 계신가요?” 이 글의 독자 중에도 그런 분이 계실까 저어하여, 황급히 답을 드립니다. “예. 아직도 청년처럼 지내십니다. ‘와운당’에 계십니다.”

‘와운당(臥雲堂), 구름이 누운 집’. 지리산 뱀사골 어느 마을 이름에서 빌려왔습니다. 다녀보신 곳 중에 그만큼 그윽하고 평화로운 데가 없다며, 당호로 쓰고 싶다고 하셨지요. 제자들에게 의견을 물으셨습니다. 찬반양론이 분분했습니다. 반대하는 쪽은 ‘누울 와(臥)’가 맘에 걸린다고 했습니다.
저는 찬성 쪽에 한 표를 보탰습니다. “나무라면 안타깝겠으나, 구름이 눕는 것은 염려할 일이 아니다. 구름은 마음대로 몸을 바꾸며 만물을 적시고 기른다. 구름은 하늘의 길이라도 잴 듯 길게 누웠다가도 금세 일어나 용처럼 솟구친다. 구름은 젊은이처럼 무궁무진한 꿈을 지니고, 끊임없이 살아 움직인다.”

게다가 경기도 용인, 선생님은 경진생(庚辰生) 용띠. 이야기가 ‘구름과 용’의 관계까지 이르자, 모두들 박수를 쳤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선생님은 아직도 당신이 문단에 첫발을 내딛던 스물세 살 청년처럼 지내십니다. 한 대학의 이사장 소임을 보시느라, 일주일에 두 번은 서울을 오르내리십니다.

십 년 전과도 별반 차이가 없으실 만큼 강녕하십니다. 당신의 고희연(古稀宴)에 올렸던 축시를 꺼내봅니다. 제 무딘 붓끝으로 그린 초상화입니다.

 

(전략)제자한테 책 선물을 하실 때면 아직도/‘학우에게’라고 서명을 하시고/여럿을 두루 일컬으실 적엔/‘젊은 벗들’이라고 또박또박 눌러 말하는/당신의 눈은 아직도 깊고 푸른데,/당신 손에 쥐이면/분필도 철필이 되는데.//절정의 시절/당신의 펜은 철벽에도 또렷이 써지고/바위에 그어도/깊은 금이 남았지요.//한 시절은…… 길 위의 학생으로/디아스포라 떠도는 사람들 눈물을 읽고/한 세월은 길 위의 스승으로/동서남북 장명등 불빛을 돋우셨지요.//천년 세월 울타리쯤은/나제통문처럼 휘적휘적 넘어서/수로(水路)여, 충담사여/신라 사람들을 오늘에 불러다가/노래마다 저울에 올려/그 오래된 생각의 무게를/새 눈금으로 읽어내셨지요.//당신의 어린 벗들은 이제야/더듬더듬 당신의 속을 읽습니다./제 밭에 남의 농사를 짓지 말라는/가르침.//당신의 늦된 벗들은 이제야/당신의 저울 눈금을 읽습니다./여간한 물건을 올려선 움찔도 하지 않는 바늘의 말을 듣습니다./“시시하게 하려면/앗세 집어치울 일이다.” (후략)

- 졸시, 「오래오래 학생이신」에서

 

제가 나온 학교의 문학청년들은 대개 이 어른으로부터 글쓰기의 정신과 인생의 태도를 배웠습니다. 선생의 가르침은 가혹할 만큼 엄격했지요. 말씀의 회초리가 눈물이 쏙 빠질 정도로 매웠습니다. 저는 ‘학부’ 졸업논문을 세 번이나 고쳐 썼습니다. 그때는 선생님 뜻을 헤아리지 못해 무척 서운했습니다. 다른 친구들은 단번에 통과시키며 제 글만 연거푸 퇴짜를 놓으시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반으로 줄여와.” 반으로 줄여서 보여드리면, 또다시 반으로 줄여 오라셨습니다. 마지막 날, 오케이 사인을 해주시며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시만 쓰며 세상을 살아갈 수는 없어. ‘산문정신’이 필요해.” 제 부실한 논리와 성근 문장에 대한 경책이셨습니다. 제 젊은 날은 그만큼이나 ‘졸가리’가 빈약했던 것이지요.

 

1998년 백두산에서, 선생님(왼쪽)과 필자     

 

돌이켜보면 제 말과 글 속엔 선생님 허락도 없이 가져온 것이 많습니다. 교단에 서면서부터 저는 부쩍 더 당신 흉내를 내며 살았지요. 이 사연을 당신께 고백한 적도 여러 번입니다. “선생님을 닮으려고 애를 썼는데, 비슷한 데도 없는 것 같습니다. 한마디로 저는 ‘불초(不肖)’ 제자입니다.”

뜬금없이 영화 대사 하나가 떠오릅니다. “느그 아버지 뭐 하시노?” 거기에 선생님 생각이 포개집니다. 누군가 제게, 불쑥 이런 질문을 해오면 어쩌나 싶습니다. “선생님이 그렇게 가르치셨냐? 앞장 서라. 네 선생님 어디 계시냐?” 부디, 그런 이유로 ‘와운당’에 갈 일은 없기를 바랄 뿐입니다.

윤제림
시인, 서울예술대학교 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 1959년생
시집 『삼천리호자전거』 『미미의 집』 『황천반점』 『사랑을 놓치다』 『그는 걸어서 온다』 『새의 얼굴』 『편지에는 그냥 잘 지낸다고 쓴다』, 시선집 『강가에서』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