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영 탄생 100주년 : 온몸의 시, 온몸의 철학 ④
김수영과 온몸의 윤리

  • 김수영 탄생 100주년 : 온몸의 시, 온몸의 철학 ④
  • 2021년 겨울호 (통권 82호)
김수영과 온몸의 윤리

편집자 주 l 김수영 시인의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여 그의 작품에 드러난 온몸의 철학을 주제별로 살펴보는 특별코너를 4회에 걸쳐 연재한다. 연재 순서는 다음과 같다.
1. 온몸의 존재 / 2. 온몸의 사유 / 3. 온몸의 시학 / 4. 온몸의 윤리

 

김수영


(1921~1968) 시인, 한국 현대 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김수영은 과감하고 전위적인 시작법으로 오늘날 모더니즘 시의 뿌리가 되었고 문학의 정치 참여가 가지는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한 깊은 성찰을 보여주었다. 김경린, 박인환 등과 함께 합동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을 간행하여 모더니스트로서 주목을 끌었다. 초기에는 모더니스트로서 현대문명과 도시생활을 비판했으나, 4·19혁명을 기점으로 자유와 저항정신을 바탕으로 한 참여시를 썼다. 마지막 시 「풀」에 이르기까지 200여 편의 시와 시론을 발표하였다.

 

우리는 이제까지 김수영의 온몸이 함축하는 세 측면(존재, 사유, 시학)을 돌아보았다. 온몸은 먼저 아르토의 ‘기관 없는 신체’나 메를로 퐁티의 ‘세계의 몸’과 견줄만한 존재론적 개념이다. 이때 온몸의 존재는 자기 관계 속에 놓인 힘, 그 자기 관계 속에서 외출의 역량을 분만하는 힘이다. 다른 한편 온몸은 사유의 질서가 조직되는 원점이다. 이 점에서 그것은 사르트르의 ‘초월론적 장(場)’이나 들뢰즈의 ‘형이상학적 평면’과 같은 계열을 이루는 개념이다. 이때 온몸의 사유는 어떤 먼 곳에 관계하는 가운데 끊임없이 자신의 형태와 방향을 갱신해가는 사유다.

마지막으로 온몸은 작시(作詩)의 몸짓이다. 이 점에서 그것은 데리다의 ‘원(原)문자’나 ‘원초적 글쓰기’와 동렬에 놓인 개념이다. 이때 온몸의 몸짓은 죽음의 고개를 넘어서는 ‘폭력의 경제’(혼돈과 논리의 상호 정돈)에 해당한다. 김수영은 「설사의 알리바이」(1966)에서 그 경제적 사태를 ‘아슬아슬한 설사’라 했다. 「사랑의 변주곡」(1967)에서는 ‘사랑의 절도(節度)’란 표현도 보인다. “난로 위에 끓어오르는 주전자의 물이 아슬 / 아슬하게 넘지 않는 것처럼 사랑의 절도는 / 열렬하다.” 김수영에게 작시는 ‘온몸에 의한 온몸의 이행’이며, 그런 이행의 몸짓이 사랑이다. 그리고 그 사랑은 ‘죽음의 고개를 넘어가는 기술’이며, 따라서 시는 “죽음을 꿰뚫는 가장 무력한 말 / 죽음을 섬기는 말 / 고지식한 것을 제일 싫어하는 말”(「말」, 1964)로 풀이된다.

그러나 김수영의 온몸은 존재, 사유, 작시 이외에 또 하나의 차원을 거느린다. 그것은 윤리의 차원이다. 김수영은 시란 무엇인가라는 물음과 부단히 싸웠고, 그 물음 자체를 자주 시의 주제로 삼았다. 그러나 그에게 시의 본성에 대한 물음보다 상위에 있는 것이 시인의 정체성에 대한 물음이다. 시인이란 누구인가? 혹은 시인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 김수영의 온몸은 이런 물음 없이 태어날 수 없었다. 온몸의 시학에서는 음악과 산문이 구별되지 않는 것처럼 시와 시인은 하나를 이루어야 한다. 온몸은 시적인 언어와 시적인 삶이 수렴하는 어떤 영점을 가리킨다. 그 영점에서 사실은 당위와 혼동되고, 시는 행위 자체가 되며, 따라서 시학은 윤리학과 식별할 수 없게 된다. 둘은 특히 ‘쾌락원칙을 넘어서’(프로이트) 저편의 실재(죽음충동)로 향한다는 점에서 서로 중첩된다.

쾌락원칙을 넘어선다는 것, 그것은 많은 점을 의미한다. 정신분석에서 그것은 생명충동(에로스)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죽음충동(타나토스)의 창조적 파괴력과 더불어 힘을 사유한다는 것이다. 인식론적으로는 이분법에 기초한 합리성을 넘어 불이(不二)의 논리에 따른 합리성으로 나아감을 말한다. 존재론적으로는 문화-상징적 질서에 의해 조직된 현실의 장막을 찢고 배후의 야생적 실재(초현실)를 향해 나아감을 의미한다. 미학적 차원에서 그것은 불쾌를 무릅쓰고 우아한 아름다움, 균형과 조화, 기성의 문법과 관습에 도전한다는 것이다. 1920년대에서 1960년대까지 다양하고 왕성하게 분기했던 모더니즘은 이런 ‘쾌락원칙을 너머서’의 구호 아래 진행되었다. 특히 문학에서의 반-서사, 미술에서의 반-이미지, 음악에서의 반-화성은 모두 쾌락원칙 저편으로 향하는 전위적 실험의 산물이다.

김수영은 1950년대에 한국에서 ‘쾌락원칙을 넘어서’를 이해하고 실천한 소수의 예술가에 속한다. ‘온몸에 의한 온몸의 이행’으로 집약되는 온몸의 시학은 그 넘어섬의 원리를 창의적으로 구현한다. 우리가 「설사의 알리바이」(1966)를 온몸의 시학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꼽을 만한 중요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그러나 김수영은 ‘쾌락원칙을 넘어서’를 단지 철학적 원리나 미학적 원리로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넘어섬의 원리를 윤리학의 원리로 수용한다는 점에 온몸 개념의 독특한 매력과 장점이 있다. 그렇다면 온몸의 윤리를 대표할 만한 작품으로 어떤 시를 꼽을 수 있는가? 아마 많은 이들은 「폭포」(1957)를 가리킬 테지만, 「구름의 파수병」(1956) 같은 시도 좋은 사례다. 그러나 나로서는 「공자의 생활난」(1945)을 높이 치켜세우고 싶다.


꽃이 열매의 상부에 피었을 때
너는 줄넘기 작난을 한다

나는 발산하는 형상을 구하였으나
그것은 작전 같은 것이기에 어려웁다

국수―이태리어로는 마카로니라고
먹기 쉬운 것은 나의 반란성일까

동무여 이제 나는 바로 보마
사물과 사물의 생리와
사물의 수량과 한도와
사물의 우매와 사물의 명석성을

그리고 나는 죽을 것이다.


- 「공자의 생활난」 전문



왜 그런가? 먼저 이것이 김수영이 시인으로서 첫발을 내딛는 시점의 작품이라는 데 그 이유가 있다. 이 최초 시기의 작품에는 적어도 내용 면에서 이후의 김수영 작품을 특징짓는 주요 요소들이 대부분 들어있다. ‘꽃’과 ‘발산하는 형상’은 지난번 글에서 강조한 것처럼 김수영의 시 세계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 이미지이자 작시의 사건을 대변하는 표현이다. 그다음 ‘줄넘기 작난’은 온몸의 시학을 관통하는 자기 갱신과 형성의 의지를 암시한다. 온몸은 끊임없이 자신의 함량을 더해가는 몸, 반복되는 자기 함량 운동 속에서 외출의 역량을 더해가는 몸, 한마디로 ‘몸하는 몸’(정진규)이다. ‘줄넘기 작난’은 그런 온몸의 반복적인 자기 함량 운동을 예상한다.

위의 시에 나오는 ‘나의 반란성’은 마지막 행의 ‘나는 죽을 것이다’와 함께 쾌락원칙을 넘어가는 주체의 반-관습적 태도를 강렬하게 함축한다. 그것은 「구름의 파수병」(1956)에 나오는 ‘시를 배반하고 사는 마음’이나 ‘반역의 정신’과 유사한 표현이다. 김수영의 마지막 시 「풀」(1968)이 노래하는 반란성(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는 풀의 반란성)은 이미 최초 시기의 「공자의 생활난」에서 예상된다. 「사랑의 변주곡」(1967)에서 연출되는 디오니소스적 황홀경(복사씨와 살구씨가 사랑에 미쳐 날뛰는 황홀경)도 똑같은 반란성의 다른 표현이다.

게다가 마지막 시기의 산문 「실험적인 문학과 정치적 자유」(1968)에 튀어나오는 ‘불온성’ 개념도 초기 시에 등장하는 반란성의 동의어에 해당한다. “모든 전위문학은 불온하다. 그리고 살아있는 문화는 본질적으로 불온한 것이다. 그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문화의 본질이 꿈을 추구하는 것이고 불가능을 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김수영 전집 2』, 304쪽). 이때 중요한 점은 이런 반란성이나 불온성이 아무나 혹은 아무렇게나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즉 그 반란성은 오로지 ‘죽어가는 법을 알고 있는 사람’(「파리와 더불어」, 1960)만이 발휘할 수 있고, ‘작전 같은’ 절차에 따라 펼쳐질 때야 비로소 시적인 효력을 지닐 수 있다(그리고 여기서 죽어간다는 것은 불가능을 꿈꾸고 추구한다는 것과 같다).

그다음에는 「공자의 생활난」에 나오는 ‘바로 보마’를 보자. 이 말은 세 가지 시선을 의도한다. 하나는 지성의 결여를 미학적 후진성의 일차적 요인으로 보는 김수영의 주지주의적 시선이다. 온몸의 시학은 이론적 훈련과 성찰의 저편에 있지만, 그것을 절대 배제하거나 생략하지 않는다. 다른 하나는 현실 밀착적이고 현실 비판적인 자세를 좋은 시의 기준으로 삼는 김수영의 사실주의적 시선이다. 똑바로 본다는 것은 결국 옳고 그름을 정확히 한다는 것과 같다. 1960년 4.19 학생혁명 이후 김수영의 현실 참여와 비판은 최초 시기의 ‘바로 보마’ 정신의 연장선 위에 있다.

마지막으로 ‘바로 보마’는 이론적 시선과 비판적 시선 이외에 도덕적 시선을 함축한다. 이것은 시인의 ‘동무’로 공자를 불러들인 이 작품 전체의 구도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우리가 「공자의 생활난」을 온몸의 윤리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꼽는 결정적인 이유는 여기에 있다. 이 시에는 시인의 삶에 수반되는 무거운 짐을 자발적으로 짊어지려는 결의가 담겨있다. 이때 김수영이 평생 감내하리라 다짐하는 ‘생활난’은 경제적 빈곤과 같은 세속적 삶의 어려움이 아니다. 그것은 공자와 같이 세속적 삶을 배반할 수밖에 없는 구도적인 삶의 어려움이다. 공자가 시인의 동반자로 호출되는 이 시에서 우리는 도덕성을 시인됨의 근본에 두는 김수영 특유의 관점을 읽을 수 있다.

초기 시에 속하는 「폭포」(1957)는, 특히 “곧은 소리는 / 곧은 소리를 부른다” 같은 대목은 김수영의 시 세계 전체를 관통하는 유가적인 곧음[직]의 사상을 숭고의 미학 속에 장면화한다. 이런 대목에서부터 돌아보자면, 「공자의 생활난」에 표명된 직시의 윤리는 죽음충동이 이글거리는 선비정신에 닿아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1960년대 김수영이 외친 비판 정신은 단순한 현대적인 정치의식의 발로로만 보기 어렵다. 거기에는 이런 초기 시에 잠복했던 선비정신이 살아나고 있음이 분명하다.

온몸의 윤리를 구성하는 용어는 자유, 정직, 양심 같은 말이다. 이런 단어는 김수영의 시와 산문에 자주 등장할 뿐만 아니라 수많은 비평문에서 김수영의 시 세계를 여는 열쇠 말로 사용된다. 우리는 여기에 사랑을 추가할 수 있다. 사랑은 김수영에게 작시의 원리(‘죽음의 고개를 넘어가는 기술’)이기 이전에 삶의 원리이고, 이 점은 「사랑의 변주곡」(1967)을 통해 가장 감동적으로 표명된 바 있다. 그렇다면 자유, 정직, 양심, 사랑은 온몸의 윤리 속에서 어떤 배치를 이루는 것인가?

우리는 그 네 가지 개념을 온몸의 자기 함량 운동 속에 성립하는 네 가지 축에 따라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첫 번째 축은 자기 관계의 축이고, 여기서 성립하는 개념이 곧음과 정직이다. 두 번째 축은 타자 관계의 축이고, 여기에는 자유, 반란성, 불온성 같은 개념이 위치한다. 세 번째 축은 상호 관계의 축이고, 여기서 의미를 발휘하는 개념이 사랑이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 축은 원격 관계의 축이고, 양심, 죽음, 불가능, 설움과 비애 같은 개념은 이곳에서 움직인다. 온몸의 사유를 촉발하는 것이 ‘먼 곳’이라면, 그 먼 곳은 불가능, 죽음의 다른 말이다. 온몸의 윤리에서 양심은 그런 먼 곳의 절대적 타자성에 마주한 수동적 주체성이고, 설움과 비애는 그런 절대적 타자성에 응답하는 능동적 정서다.

김상환
서울대학교 철학과 교수, 1960년생
저서 『김수영론: 풍자와 해탈 혹은 사랑과 죽음』 『김수영과 논어』 『근대적 세계관의 형성』 『왜 칸트인가』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