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인터뷰
작가로서 글을 내 마음대로 쓸 자유

- 소설가 필립 로스와의 대화

  • 가상인터뷰
  • 2021년 겨울호 (통권 82호)
작가로서 글을 내 마음대로 쓸 자유

- 소설가 필립 로스와의 대화

필립 로스(Philip Roth, 1933~2018)


미국 현대문학의 거장으로 불리는 작가. 시카고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모교와 아이오와대, 프린스턴대 등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창작 활동을 했다. 1959년 유대인의 풍속을 묘사한 단편집 『굿바이, 콜럼버스』로 데뷔했으며 전미도서상,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 퓰리처상, 맨부커상 등 굵직한 문학상을 다수 수상하였다. 대표작으로 『미국의 목가』 『에브리맨』 『휴먼 스테인』 등이 있으며 마지막 소설 작품으로 『네메시스』를 발표했다.

 

■ 정영목(이하 정) : 생전에는 뵙지도, 연락을 해본 적도 없는데 이렇게 사후에 마주하게 되었네요. 세상을 떠난 지 이제 삼 년 정도 된 것 같은데 사진에서 뵌 모습 그대로이십니다.

■ 필립 로스(이하 로스) : 그렇게 기억되고 싶지요.

 정  아, 어떤 식으로 기억되고 싶다, 이런 생각이 있나요?

 로스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겠습니다. 얼마 전에 나온 내 전기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지요? 어쨌든 방금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정확하게 기억되고 싶다, 정도겠네요. 있는 흠을 감추고 싶은 생각도 없지만 없는 흠으로 욕을 먹고 싶지도 않다는 거지요.

 정  네, 그래서 소설을 그만두고 나서 말년에는 선생님 자신의 전기 작업에 공을 들이신 거겠군요. 사실 저는 선생님이 무엇보다도 정확히 알고 또 알린다는 것에 무섭게 매달린 분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특히 소설에서 그랬고, 따라서 소설적인 앎이라는 방식이 우선이었겠지만요. 그런 태도의 출발점은 무엇이었을까요? 혹시 유대인이라는 태생과 관련이 있나요? 유대인이 긴 역사 속에서 사람들에게 잘못 알려졌다는 인식과?

 

 

필립 로스(C Nancy Crampton, 문학동네 제공)    

 로스  내가 유대인 이민 3세이니 그 말도 틀리지는 않겠지요. 하지만 나는 유대인의 전통을 존중하는 쪽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가령 미국에서 이디시어로 소설을 썼던 우리 아버지 세대의 아이작 싱어와는 다르지요. 하지만 내가 유대인이기 때문에 견디어야 했던 부분, 그러니까 비교적 관대하다고 하는 미국에서도 견디어야 했던 부분이 영향을 미친 건 있을 듯합니다.

 정  사실 전기 이야기를 어떻게 꺼내나 싶었는데, 먼저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번에 대형 사고가 있었죠. 전기 저자인 블레이크 베일리가 성폭행 혐의를 받는 바람에 출판사인 노튼이 책을 절판시켰습니다. 물론 다른 출판사에서 다시 나오기는 했습니다만, 선생님이 오랫동안 공들인 작업에 뭐랄까, 큰 오점이 생긴 거라고도 할 수 있는데. 물론 선생님 탓은 아닙니다만.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로스  선의나 노력에도 불구하고 뜻대로 되지 않는 삶, 우연적 사건에 의해 박살이 나는 삶 이야기를 평생 해온 사람으로서 그런 “사고”에 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내가 문제가 있는 사람이겠지요. 그렇다고 그런 것에 익숙해질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만.

 정  말씀드리기 조심스럽습니다만, 선생님은 소설에서 여성을 다루는 방식으로 비판을 받기도 했고, 심지어 여성 혐오자라는 말까지 들었습니다. 이번 전기의 작가도 선생님이 선정하신 만큼, 여성을 바라보는 시각에서 둘 사이에 어떤 공통점이 있는 거 아니냐는 말까지 나오던데.

 로스  일단 나는 내 전기를 쓴 사람이 받은 혐의를 받은 적은 없습니다. 둘째로, 여성 혐오 문제와 관련하여, 내가 어떤 여성을 혐오한 건 사실일 것이고, 또 어떤 여성을 사랑한 것도 사실일 겁니다. 더불어 내가 어떤 남성을 혐오한 건 사실이고, 어떤 남성을 좋아한 것도 사실입니다. 내가 혐오한 여성이 나를 여성 혐오자라고 비난할지 모르지만 정확하게 말하자면 나는 그 사람을 혐오한 거지요. 그리고 설사 작품 속에 어떤 혐오가 나타난다 해도 그게 작가인 나의 혐오인가요? 설마 내가 동화를 쓸 거라고 기대한 건 아니겠지요? 나는 평생 소설 속 인물과 나를 동일시하는 시각 때문에 곤욕을 치른 사람입니다. 그게 내가 받은 혐의였지요.

 정  전기가 나오기 몇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볼까요? 『에브리맨』에서도 무덤과 관련된 대목이 인상 깊었지만, 특히 『새버스의 극장』에서는 주인공 새버스가 자신의 묫자리를 찾는 장면이 나옵니다. 죽음 관련 이야기라면 『아버지의 유산』도 빼놓을 수 없고요. 선생님은 꽤 일찍부터 죽음이나 무덤 이런 데 관심이 깊었던 듯합니다. 그런 작품들의 흐름으로 보아 선생님은 가족이 있는 곳에서 영면을 누리실 줄 알았더니 정작 묻히신 곳은 한나 아렌트가 묻힌 바드 대학 묘지더군요.

 로스  원래 『새버스의 극장』을 준비를 할 무렵 실제로 부모님 무덤 근처에 내 묫자리를 살 생각을 했는데 관리인이 너무 좁다고 권하지 않더군요. 그다음에는 내가 살던 콘월의 묘지로 갈까 했지만, 그 많은 이방인과 영원히 함께 살 생각을 하니 피곤하더라고요(웃음). 바드 대학은 내가 마지막으로 길게 가르친 곳인데, 거기 총장 부부와 인연이 있어 그들에게 부탁했던 겁니다.

 정  묘석도 그렇고, 이름과 생몰 연도만 적힌 비명도 인상적입니다.

그게 콘월의 내가 살던 곳에 있던 돌이에요. 그리고 비명을 새긴 사람은 그 동네 석공이지요.

 정  죽음에 대한 관심 이야기는 하지 않으셨는데, 그런 관심은 개인적 경험과 관련이 있나요?

 로스  이미 죽은 사람더러 자꾸 죽음 이야기를 하라니…… 예를 들어 『에브리맨』은 내가 나의 영웅이라고도 부르는 솔 벨로우가 죽은 뒤에 그때까지 쓰던 것을 밀쳐놓고 바로 쓰기 시작한 책으로…….

 정  선배 작가가 죽은 경험 뒤에 일인칭 시점에서 나의 죽음을 이야기하는 책을 쓰신 셈인데, 혹시 벨로우와 어떤 동일시 같은 걸 하셨던 건가요? 그의 죽음에서 자신의 죽음을 연상할 만한?
어떤 면에서 나는 벨로우의 길을 따라간 셈이지요. 벨로우는 유대인 작가였지만 유대인 작가를 넘어 미국인 작가가 되었고, 또 그럼으로써 미국인 작가도 넘어섰다고 봐야겠지요. 그런데 나는 벨로우가 그럴 수 있었던 것이 그가 자신의 고향이라 할 수 있는 시카고를 발견했기 때문이라고 봐요. 즉 유대인 작가니 미국인 작가니 하는 걸 떠나 진실로 작가가 된 거지요. 소설이란 가장 내밀한 이야기를 가장 구체적으로 하는 겁니다. 하지만 이미 아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모르는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런데 뭘 모르려면 그걸 가장 잘 알아야 합니다. 가장 잘 알지 못하면 모른다는 것도 모르게 되니까요. 그렇게 모르는 이야기를 함으로써 소설은 그 자체가 알아가는 과정이 되는 거고요. 따라서 유대인으로 태어난 작가는 유대인 이야기를 하고, 시카고에 태어난 작가는 시카고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어떤 대의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그런 사람으로 거기에서 태어났고, 또 정직한 작가로서 자기가 가장 잘 아는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지요. 나는 그걸 벨로우한테 배운 셈입니다.


 정  벨로우의 길을 따라가셨다고 하지만, 중요한 차이는 벨로우는 노벨상을 받았고 선생님은 받지 못했다는……앗, 말이 헛나왔습니다.

 로스  아니, 이런…….

 정  ……너무 속물 보는 듯한 표정이신데, 저세상에 가셔서 거룩해지셨는지는 몰라도, 선생님도 이 세상에 계실 때는 상을 포함한 남들의 평가에 아주 민감하셨던 걸로 아는데요. 솔직히 노벨상도 몹시 바라지 않으셨나요?

 로스  주면 고맙게 받았겠지요. 내 책 제목이 『포트노이의 불평』이 아니라 『탐욕스러운 자본주의 하의 오르가슴』이었다면 받았을지도 모르고. 어쨌든 그쪽에서 나를 염두에 두지 않고 있다는 것 또한 잘 알고 있었습니다.

 정  선생님이 첫손에 꼽히는 후보라고 생각한 사람이 많았던 건 사실이죠. 2016년 이십여 년 만에 나온 미국인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밥 딜런이었을 때 어떤 사람은 스웨덴 사람들이 선생님 염장을 지르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알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고, 어떤 사람은 밥 딜런이 노벨상을 받았으니 선생님은 그래미상을 받아야 하는 거 아니냐고 농담을 하기도 했죠.

 로스  그다음 해에 왜 ‘피터 폴 앤드 메리’에게 상을 안 주었는지 모르겠더군요.

정영목    

 정  하지만 선생님은 노벨상만 못 받았을 뿐이지 상복은 많았죠. 심지어 나라에서 주는 상을 받아 대통령과 함께 찍은 사진도 있더라고요. 게다가 평단의 인정도 받아서 20세기 후반 미국에서 가장 중요한 작가로 꼽히는 건 당연한 일이 되었습니다. 나아가 책으로 돈도 많이 버셨지요. 결국 선생님은 작가로서 여러 면에서 “성공”을 거둔 분입니다. 그런데 저는 선생님이 그 성공을 너무 즐기시는 것 같아 좀 놀랐습니다.

 로스  내가 내 능력과 노력으로 이룬 일을 정당하게 평가받고 존중받는 게 왜 누군가가 불만을 가질 일이 되는지 모르겠군요.

 정  노력과 정당한 평가라는 말은 너무 순진하게 들립니다. 그 말이 왜 제 귀에는 아메리칸 드림을 이룬 이민자 2세, 3세의 성공 이야기처럼 들리는 걸까요? 아닌 게 아니라 이게 노벨상이 선생님에게 안 간 이유라는 생각도 듭니다.

 로스  그건 『미국의 목가』를 쓴 작가에게 할 이야기는 아닌 것 같은데요.

 정  『미국의 목가』를 쓴 작가이기에 드릴 수 있는 말씀입니다. 『미국의 목가』는 아무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은 한 인간에게 닥친 불행과 그 인간이 겪는 고통을 치밀하고 치열하게 그려낸 비극이고, 네, 위대한 작품입니다. 그리고 그 작품에서는 물론 아메리칸 드림이 이루어지지 않죠. 하지만 그 작품이 과연 아메리칸 드림 자체를 문제 삼고 있을까요? 아메리칸 드림 자체는 건드리지 않으면서 한 인간이 우연한 불행으로 무너지는 것으로 그리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모든 선의와 노력은 우연적 사건에 의해 붕괴될 수 있다는 일반론으로 넘어가고, 아메리칸 드림 자체는 온존되고 있다는 거죠.

 로스  그 작품에서 주인공 스위드가 노력과 선의에도 불구하고 큰 불행을 겪고 인생이 망가지는 건 맞습니다. 그렇다고 아메리칸 드림을 문제삼지 않는 건 아니지요. 스위드의 불행은 딸이 테러리스트가 되면서 생기는 것인데, 딸의 꿈은 스위드의 꿈과 다르지요. 즉 이민자의 환상이었던 아메리칸 드림의 유효성은 스위드의 딸 세대에만 와도 사라져 버립니다. 이걸 어떻게 온존이라고 말할 수 있나요?

 정  …….


 로스  이민자의 성공 이야기도 그래요. 내가 언제 이민자나 그다음 세대가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었다고 했나요? 아메리칸 드림“에도 불구하고” 성공했다고는 말할 수 있겠지요. 가령 흑인이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고 칩시다. 그걸 보고 아메리칸 드림의 성취라고 하나요? 오히려 아메리칸 드림에도 불구하고, 그것과 동전의 양면을 이루는 억압에도 불구하고 이룬 성취일 수 있지요. 물론 스위드는 젊었을 때 아메리칸 드림, 또는 미국의 목가를 그냥 순진하게 믿었을 수 있지요. 바로 그게 문제였을 수도 있는 거고요.

 정  그렇다면 선생님 자신의 성공도 아메리칸 드림의 성취와는 다르게 보신다는 거겠군요?

 로스  내가 우리 아버지 이야기를 쓴 걸 보세요. 아버지는 아메리칸 드림을 이룬 게 아니라 가혹한 환경에서 한 인간으로, 한 가장으로 생존하고 살아남은 겁니다. 유대인을 배제하는 환경에도 불구하고 뉴저지 밑바닥을 발로 뛰어다니며 가족을 건사한 거지요. 그래서 아메리칸 드림을 성취한 게 아니라 자기가 사는 곳을 자기 걸로 만들고 자기가 그곳이 된 겁니다. 이민자 이세대인 솔 벨로우가 시카고에 발을 디디고, 삼세대인 내가 뉴저지에 발을 디디고 작가가 된 건, 유대인 이민자 자손으로서 꿈을 성취한 게 아니라 여기에서 이제 드디어 인간 비슷한 게 되었다는 걸 보여주는 증거일 뿐이지요.

 정  그러니까 선생님이 유대인 이야기를 쓰는 게 아니라 미국인 이야기를 쓴다는 게 그런 의미로군요?

 로스  그렇게 말할 수 있겠지요. 그리고 벨로우나 나나 평생에 걸쳐 책을 여러 권 쓴 사람입니다. 설마 그 책들을 설렁설렁 썼다고 생각하지는 않겠지요? 나는 문장 하나 쓰는 게 고역이었던 사람이에요. 쓰다 만 원고도 산더미지요. 대부분의 나날은 방구석에서 일하며 보낸 셈이에요. 그렇다고 무슨 고행하는 수도승처럼 살았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저 내 과제라고 여기는 것을 잘해 보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그 결과를 남이 정확하게 인정해주는 것은 좋아했다, 라는 이야기입니다.

 정  비슷한 문제를 조금 다른 맥락에서 또 여쭈어보고 싶습니다. 선생님은 과거 동유럽, 특히 체코의 탄압받는 작가들과 교류가 깊었고 사람들을 모아 그들을 지원하기도 했습니다. 밀란 쿤데라가 영어권에 알려진 데에는 선생님의 공로가 크다는 건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물론 선생님이 그걸 자랑한 적은 없지만요. 우리나라도 그런 탄압의 시절이 있어서 당시 동유럽 작가들의 상황이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는 편이고, 역설적으로 그런 혹독한 상황에서 정말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있다고도 생각하는 편입니다. 하지만 선생님은 그런 게 신화라고 보시는 듯한데요.

 로스  조지 스타이너는 현대 서방 문학이 엉망이라고 비난하면서, 걸작은 체코슬로바키아 작가들처럼 체제의 탄압을 받는 작가들에게서 나올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지요. 그런데 그런 기계적인 발상이 도대체 어떻게 가능한지 모르겠습니다. 셰익스피어가 살던 엘리자베스 여왕 시대의 잉글랜드가 당시 기준에서 그렇게 탄압받고 억압받는 곳이었나요? 체코와 같은 체제는 작가를 죽이고 독자를 죽이고 결국은 문학과 언어를 죽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에 비하면 미국이나 서유럽은 작가들이 자유롭게 자기 할 일을 할 수 있지요. 걸작이 뭔지는 몰라도, 나라면 당연히 자유로운 곳을 택할 겁니다.

 정  제가 계속 지적하고 싶었던 부분이 바로 그런 당연함인데요. 선생님의 그런 당연한 선택에서 미국인의 순진한 자부심 같은 게 느껴지거든요. 가령 미국의 자유란 게 어떤 건지, 또 미국의 자유가 체코의 탄압과 과연 별개의 문제인 건지 의문을 가져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로스  나는 작가로서 글을 내 마음대로 쓸 자유를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설마 스타이너 식으로 미국의 작가는 자유롭기 때문에 진지할 수 없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겠지요? 체제의 탄압으로 인한 고난 이야기를 해야만 진지하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주제의 진지성으로 자신의 진지성을 보여주지 않는 진지한 책을 쓰는 것도 얼마든지 가치 있는 일입니다. 그래요, 나는 동유럽이 심각한 상황에 처했을 때 자위나 섹스 이야기가 나오는 『포트노이의 불평』을 썼습니다. 그 덕분에 섹스 작가로 소문나 체코 경찰의 의심의 눈초리를 피하기도 했지요. 하지만 가령 동유럽에서 엄청나게 진지한 것이 미국에 오면 왜 하찮아지는가, 하는 문제도 작가가 다룰 만한 주제이고, 소설로 만들려면 엄청난 힘이 필요하지요. 체코와 같은 탄압이 없는, 적어도 내 마음대로 글을 쓸 수는 있는 미국에서 목격되는 정신적 위기를 제대로 다루는 것, 그게 나 같은 작가에게 주어진 운명이었습니다.

 정  선생님도 말씀하셨듯이, 선생님은 아메리칸 드림을 당연시할 수 없는 유대인 출신이었기 때문에 작가로서는 오히려 유리한 지점에 있었고, 그래서 다른 주류 인종 작가는 볼 수 없는 것을 보았던 것 아닐까요? 가령 생전에는 업다이크의 문학적 위상이 선생님보다 높아 보였음에도 지금은 평가가 달라진 느낌이 드는 것도 그 점과 관련이 있는 것 아닐까요? 지금 미국에서 흑인은 물론이고 다른 이민자 출신 작가들이 높은 평가를 받는 것도 단지 그들에게 가산점을 주어서만은 아니라고 봅니다.

 로스  나도 훌륭한 유대인 작가, 훌륭한 흑인 작가를 많이 알지만 가령 포크너가 작품의 수준에서 그들보다 처진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물론 포크너는 벨로우나 리처드 라이트가 다루는 소재나 주제를 절대 다룰 수 없었겠지요. 하지만 그게 운명이라니까요. 작가는 어차피 자기가 가장 잘 아는 걸 쓸 수밖에 없다고 했잖습니까. 걸작이 뭡니까? 고난이 뭡니까? 작가가 걸작을 쓰기 위해 글을 쓰나요? 걸작을 쓰기 위해 고난을 찾아가나요? 작가는 뭔가를 이루기 위해 쓰는 사람이 아닙니다. 작가는 상을 타기 위해 쓰는 게 아니듯이 좋은 작품을 쓰기 위해 쓰는 게 아니에요. 그냥 자기를 쓰는 것일 뿐입니다.

 정  네, 그 “자기”라는 것이 선생님 말씀대로 운명처럼 어떤 시대와 장소와 결합되어 있다고 생각하기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사실, 선생님이 말년에 소설에 관해 비관적인 말씀을 하신 게 선생님이 미국에서 성공한 소설가라는 것과 관련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거든요. 가령 어느 곳에서는 소설이 망가져도 다른 곳에서는 새로 피어날 수도 있는 것 아닐까요?

 로스  세계가 한 덩어리가 되고 있으니 공동의 절망이 있고, 또 언어마다 그 나름의 절망이 있겠지요.

 정  희망은?

 로스  죽은 자에게 희망을 묻지 마세요. 그건 산 자들이 알아서 할 일이지요.

정영목
번역가, 이화여자대학교 통역번역대학원 교수, 1960년생
역서 『새버스의 극장』 『미국의 목가』 『포트노이의 불평』, 저서 『완전한 번역에서 완전한 언어로』 『소설이 국경을 건너는 방법』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