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③소셜미디어와 정치소설의 위기

  • 기획특집
  • 2021년 겨울호 (통권 82호)
③소셜미디어와 정치소설의 위기

1.

정치란 국가의 권력을 획득하고 유지하며 행사하는 활동이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삶의 고통을 치유하고 부조리를 바로잡아 공동체의 연민과 희망을 불러일으키는 노력이라 말할 수 있겠다. 그런데 이렇게 정리해보면 소설 쓰기를 비롯한 인간의 거의 모든 행위가 ‘정치’일 수밖에 없으니 ‘정치’를 딱히 고유명사라 일컫기 곤란해진다. 마찬가지로 모든 소설이 빈부와 성별과 국적과 나이 등 계급 갈등을 조정하고 순리를 회복하고 많은 이들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기 위한 염원을 담고 있으니 결국 ‘정치소설’이며, 따라서 ‘정치소설’은 소설의 하위 장르가 아니게 된다. 『동물농장』이 ‘정치소설’이라면 『폭풍의 언덕』 또한 ‘정치소설’이다. 이런 관점에서 ‘정치소설’은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장르가 아니다.

물론 이 넓은 세상에는 문자 그대로 특정한 정치인, 정치 세력, 정치 행위를 직설적으로 옹호 또는 비판하는 소설이 없지는 않으므로, 이들만을 성글게 모아 ‘정치소설’이라는 범주로 부르기도 한다. 그런데 이런 소설들은 거리에서 마주치면 깜짝 놀랄 만큼 숫자가 적다. 출판을 떠나 집필 자체가 드물다. 본디 작가의 야심이란 당대의 예외적이고 일시적인 사실에 관한 제 감정을 누설하는 데 있지 않고 세계의 항구적이고 보편적인 진실을 모색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많은 작가들이 정치(‘정치소설’에 한정된 문자적 의미에서)를 혐오하거나 혹은 두려워한다. 보다 명확히 말하자면 작가들은 자신의 소설이 ‘정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사태를 기피한다.

 

2.

정치와 예술이 상극이라는 인상은 꽤 오랫동안 작가들 사이에 머물렀다. 유럽 실존주의를 수용한 1960년대 문인들의 이른바 참여문학론에 대해 순수문학론자들은 정치란 삶의 방식이고 예술은 이상의 방식이라 구분했다. 말하자면 정치는 추잡한 아귀다툼이 다반사인 속세고 예술은 저 너머 파스텔 색감의 노스탤지어다. 예술을 하면서 어찌 더러운 속세에 발을 담근단 말인가. 예술가답게 고상하고 우아해지기 위해서는 정치를 모르는 척해야 한다. 투표도 몰래 해야 한다. 정치뉴스 따위가 들려오면 귀를 꿰매야 한다. 프랑스 작가 테오필 고티에에 경도된 일군의 예술지상주의자들은 한술 더 떠서 ‘예술의 유일한 목적은 예술 자체 및 미(美)에 있으며, 사회적·윤리적 또는 그 밖의 모든 효용성을 배제해야 한다’고까지 주장하였다. 작가는 무슨 별나라에 혼자 사냐는 참여문학론자들의 핀잔에 이들 예술지상주의자들은 ‘인생을 위한 문학’ 따위는 없으며 문학이 삐라나 현수막처럼 특정 목적을 위한 도구로 사용되어서도 안 된다고 반박했다.

얼핏 보면 60년대 참여문학론은 신세대 우국지사 문학인들의 지엽적 호소로 들리고, 이후 작품 생산의 양적 측면에서도 순수문학론자들에 비해 조금 밀리는 것 같다. 문학을 비롯한 예술이 미 그 자체에만 복무한다는 순수문학 선언은 끝내주게 멋지다. 그런데 문학의 도구화를 거부하는 견해가 꽤 유서 깊은 주장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정반대다. 이솝우화나 그리스 비극만 보더라도 좋건 싫건 문학은 오랫동안 사회 공동체에 일정한 도구 역할을 해왔다. 테오필 고티에가 “무용(無用)한 것만이 아름답고 유용(有用)한 것은 모두 추악하다”고 극언한 바 있으나 찬찬히 둘러보면 우주에서 인간의 삶에 진실로 무용한 것은 단 한 톨도 존재하지 않는다. 더군다나 작가란 본디 세상에 자기 목소리를 내게끔 설계된 세속적 존재들이어서, 학을 타고 뭉게구름 위로 날아다니는 대신 애를 셋 낳을 때까지 꾀죄죄한 나무꾼의 인질이 될 수밖에 없다.

 

3.

참여문학이니 순수문학이니 하는 것은 각각 그럴싸한 이론적 기반이 있는 선택이어서 어느 하나를 취한다고 딱히 손가락질까지 당하지는 않는다. 작가들이 정치소설을 기피하는 보다 현실적인 이유는 사실 따로 있다. 하고 싶은 말을 곧장 내지르는 행위 자체가 무식해 보이는 걸 넘어서 실제로 위험천만한 까닭이다.

‘예술’이라는 단어는 반론의 여지를 차단해버리는 매우 편리한 주문이다. 어느 작가가 개인적으로 목도한 신을 남이 구태여 부정할 필요는 없고 그럴 수도 없다. 하지만 글 어딘가에서 정치 냄새를 풍기는 순간부터는 반론이 감자처럼 줄줄이 튀어나오게 된다. 누군가의 정치적 견해가 한 공동체에 똬리를 틀어버린 이상, 나머지 구성원들도 그 직접적인 영향권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문학에서 온갖 수사와 비유와 알레고리가 발달한 배경에는 미학적 필요도 있겠지만 쥐어터지지 않으려는 회피의 의도도 있다. 정치적 발언을 한다는 건 링에 오르는 것과 마찬가지다. 자기 입장을 분명히 밝힘으로써 어느 한 편을 택한다는 건, 달리 말해 다른 편과 척을 진다는 뜻이기도 하다. 물론 척을 졌다고 해서 지난 시대처럼 학살당하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골치 아픈 논쟁에는 휘말리게 된다. 그런데 이 논쟁이라는 것이 선과 악의 대결이 아니라 많은 경우 관점의 차이고, 또 아무리 상세한 발언이라 해도 취약한 구석은 존재할 터이므로, 생각을 가진 존재들 간에 그 차이는 여간해서는 좁혀지지 않을 테고, 공격이 들어오면 명예를 지키기 위한 응전이 요구되니, 일단 한번 정치적으로 발언하기 시작하면 평생 그 주제에 대한 연작을 써야 한다. 일단 완성한 글을 추가로 해명하고 변호한다는 게 작가 입장에서 참 모양새 떨어지는 짓이지만 어쩔 도리가 없다.

작가란 고유한 견해와 목소리를 세상에 퍼뜨리는 언어예술가인 한편으로 온종일 쓴 글을 팔아 생계를 영위하는 직업인이다. 다른 관점, 다른 의견을 표명해 사회에 파문을 일으키는 고약한 습성이 있다 해도 작가 역시 법과 자본과 공동체 체온에 속박된, 또 그 보호에 기대는 한 명의 이웃 시민이다. 빤히 보이는 위험 앞에서는 몸을 사리는 게 당연하다.

 

4.

비겁하게 들릴 수 있을 것이다. 과거에는 비겁한 게 맞았다. 본디 저잣거리 이야기꾼이거나 상류층의 광대였던 작가의 신분은 소설이 곧 정보요 교양이요 매일의 중요한 이슈가 된 근대에 이르러 저 높은 곳까지 치고 올라갔다. 그리하여 작가들은 인류세(人類世)의 가장 급격하고 드라마틱한 시대에 정의와 관용의 상징, 지성과 양심의 척도로 인정받았다. 그들은 타락을 꾸짖고 희망을 노래하며 상류층은 물론이거니와 포악한 집권세력과의 대결도 서슴지 않았다. 그 당시 극소수 발언권자의 한 명인 작가에게 정치적 침묵이란 공동체의 기대를 저버리는 죄악이었다. 권력의 위협에 맞서 발언한 작가는 이제까지의 존경을 유지했지만, 위협이 두려워 마땅히 발언해야 할 사안에서 도망친 작가는 하루아침에 경멸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그러나 지금은 시대가 바뀌었다. 현대의 작가는 보통 독자를 즐겁게 하거나 슬프게 하거나 난처하게 만들려는 유혹에 이끌려 글을 쓰며, 또한 자기 자신의 시리고 멍든 감정을 타인과 공유해보려는 소박한 바람에 이끌려 글을 쓰기도 한다. 버젓이 출간된 저서가 초등학생 일기보다도 두서없는 독백인 경우가 흔하다. 만인이 콘텐츠 창작자인 요즘엔 더욱 그렇다. 가방끈이 짧은, 한국어를 잘 모르는, 생계유지가 곤란한, 가족에게조차 버림받은 은둔형 작가가 지천에 깔려 있다. 그럼에도 위대한 리얼리즘 시대로부터 전승되어온 거룩한 존경을 이들에게 곧장 투사하는 건 어딘가 억지스러운 일이다. 이제는 용감무쌍한 소설을 썼다고 정치권력에 핍박받을까 봐 걱정할 필요가 없다. 만에 하나 핍박을 받는다면, 그러니까 정권의 블랙리스트에 오른다면, 작가 입장에서 그건 별로 손해가 아닐뿐더러 오히려 영광스러운 일이다.

오늘날 정말 무서운 것은 평범한 일반 독자들이다. 발표 즉시 다양한 스펙트럼의 비판이 등장할 것이며 이들은 십중팔구 문학적 성취를 지적할 텐데, 미학적으로 어처구니없는 소설들이 지천에 널렸음에도 굳이 해당 소설의 문학적 성취를 지적하는 것은 교묘히 포장된 정치적 반론이다. 이들 재야의 정치 고수들이 잡다한 정보를 엮어 제조하는 말 폭탄은 매우 위력적이다. 지식을 교환하는 대학 강의실에서마저 ‘왜 매국노마냥 일본 소설을 언급하느냐’, ‘성범죄자의 시는 등단작부터가 그루밍’, ‘페미니즘 문학에서 배울 건 혐오뿐’, ‘월북한 빨갱이 작가를 찬양·고무하셔서 기관에 신고했어요’ 등의 삐쭉삐쭉한 말 폭탄이 무시로 날아다니는 게 현실이다. 더군다나 요즘에는 이 말 폭탄이 최강 미사일인 소셜미디어를 타고 빛의 속도로 날아다닌다.

소설의 몸인 언어는 매우 불완전한 도구이기에 읽는 이의 심기에 따라 여러 해석이 가능하다. 허허 웃거나 무심코 지나치거나 벌컥 화를 내는 등의 어떠한 반응도 아예 틀렸다고 볼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소설은 보편적 진리를 추구하는 산문 문학인 한편으로 ‘불온한 왜곡’을 주요한 구현 원리로 갖는 예술의 한 장르여서 툭하면 과장·축소·선택·희화·미화 등이 동원된다. 매사에 진지하고 사리분별 똑바른 분들이 미워할 구석을 골고루 갖춘 셈이다. 게다가 소설은 원래 가상의 화자를 앞세워 풀어나가는 서사 장르다. 그 멍청하거나 괴팍하거나 삐뚤어진 화자는 실제의 작가가 아니고, 많은 경우 실제 작가를 대변하지도 않는다.

이 정도면 안전장치가 충분할 것 같은데, 현실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특히 세속적 성격이 두드러질 수밖에 없는 정치소설은 안전장치가 무색하게 툭하면 조리돌림을 당한다. 우리가 사는 곳은 낙원이 아니라서 세상 돌아가는 꼴에 대한 우국적 분노가 정치소설에 일견 과격한 형태로 담길 수도 있을 텐데, 그 전제부터 동의하지 않는 어떤 독자는 해당 분노와 과격이 사회적 재앙이라 판단하여 생업을 포기하고 전투에 돌입한다. 인터넷 기사의 댓글을 몇 줄만 읽어보면 알 수 있듯이 익명 대중들의 분노할 요소를 찾아내는 감식안과 과격하게 내달리는 정력은 천하무적이다. 이들이 정교하게 취사선택한 사실 정보와 감수성이 폭발하는 문장에 어쭙잖은 작가 따위는 나가떨어지기 일쑤다.

 

5.

그게 옳은 일일까? 몰상식한, 부패한, 어리석은, 편협한, 변태적인, 부도덕한 작가로 낙인찍어 싹수 노란 떡잎 시절부터 펜대를 분질러버리는 게 과연 우리 문학과 우리 사회에 바람직할까? 우리를 더 나은 쪽으로 이끌까?

다양성은 그냥 듣기 좋은 덕목이 아니라 인간의 사고가 전개되는 자연스러운 방식이다. 친구가 거액의 복권 당첨금을 떡볶이로 탕진한다 할 때 우리는 ‘미쳤으니 신고하자’, ‘순대가 나은데’, ‘거짓말일 거야’, ‘고아원에 기부 안 해?’, ‘정말 잘 됐어’, ‘무한 떡볶이라니 부럽다’, ‘때려서 빼앗아야지’ 등 여러 선택지를 자유연상처럼 떠올리다 결국에는 분별력을 발휘해 어느 하나로 최종 결정한다. 공동체의 여론 형성 과정도 이와 마찬가지, 다양한 주장이 두서없이 등장하되 어느 괴팍하거나 부조리하거나 멍청한 선택지를 집중 공격해 말소해버리는 대신 부드럽게 최선의 방안으로 모여든다. 조금 불안해 보일지라도 인류가 진화해온 과정을 돌이켜보면 이 방식은 그간 훌륭히 작동해왔다. 사실 우리 각자의 내면에 광적 면모가 있는 것과 우리 사회에 광인이 있는 것은 무질서도 측면에서 별 차이가 없다.

현재와 같은 즉각적이고 동시다발적인 비판이 심화된다면 작가가 실명을 내걸고 쓰는 정치소설부터 세상에서 사라지겠지만, 종내는 모든 형태의 정치적 의견 표명이 위협받게 된다. 물론 누구나 옹호든 비판이든 자기만의 고유한 의견을 갖고 이를 자유롭게 표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 당연한 대의는 다양성 기반의 공동체를 전제하므로, 표현의 자유를 밝히는 동시에 차이를 견디며 경청할 의무 및 가볍게 흘려 넘김으로써 도태시킬 여유 또한 밝히고 있다. 모두가 핏대 올려 외쳐대는 도떼기시장에서는 누구의 목소리도 안 들리는 법이다. 저마다 한두 템포씩만 차분해진다면 모든 목소리가 살아난다. 소셜미디어는 우리 모두에게 확성기를 쥐여 주었지만, 그렇다고 우리 모두가 소음이 될 필요는 없다.

박형서
소설가, 고려대학교 문화창의학부 교수, 1972년생
장편소설 『새벽의 나나』 『당신의 노후』, 소설집 『자정의 픽션』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