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기획의 말

  • 기획특집
  • 2021년 겨울호 (통권 82호)
기획의 말

문학과 삶의 관계, 혹은 문학과 정치의 관계는 문학 담론의 역사에서 가장 오랫동안 쟁점이 되어온 관점 중 하나이다. 한국 현대문학사를 조망해 보더라도 김동인 소설 「광염 소나타」의 중심 주제는 예술과 인생 중에 무엇이 더 중요한가라는 쟁점이고, KAPF의 내용 형식 논쟁, 예술대중화 논쟁, 창작방법 논쟁 등도 문학의 예술성과 프롤레타리아 혁명성 간의 우위에 대한 다툼이 쟁점이며, 1960년대 이후의 참여문학론과 순수문학론의 대립도 순수 예술성과 목적 의식성과의 대결 구도가 논쟁의 중요한 쟁점을 이루고 있다. 한국 현대문학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초창기부터 1980년대까지는 문학의 예술성과 정치성을 이분법적 구도로 파악하는 관점이 지배적이었다면, 1990년대 이후 특히 2000년대 촉발된 문학과 윤리 및 문학과 정치의 논의를 거치면서 한국문학에서 예술성과 정치성의 관계를 좀더 섬세하고 심도 깊게 파악하는 논의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본지는 2021년 겨울호를 기획하는 자리에서 바야흐로 정치의 계절을 맞이하여 ‘한국문학과 정치적 상상력’이라는 주제를 선정하면서 그동안 한국 사회가 성숙시켜온 문학의 예술성과 정치성이라는 쟁점을 재검토하고 새롭게 조명하여 진전된 사고의 물꼬를 열어보기로 했다. 그리고 진전된 사고의 물꼬를 열기 위해 총론에서 김우창 평론가, 시 분야에서 이지담 시인, 소설 분야에서 박형서 작가, 비평 분야에서 선우은실 평론가의 통찰 및 혜안을 기대하면서 네 분께 원고를 청탁드렸다.

김우창 평론가는 이상(李箱)의 시에 관한 분석을 진행하면서 시의 주제 파악이 더 넓은 질문의 지평에서 제기될 때 시의 현실성이 보인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이상이 관심을 가졌던 ‘근대화’에 관련된 문화 현상, 다시 말해 ‘식민지 근대성’이 조선인들에게 복합적인 의의를 가진 현실이었을 것이라고 파악한다. 그 연장선에서 근대성 또는 근대화가 제국주의 또는 식민주의 이데올로기의 일부이지만, 역사의 현시점에서 인간 문명이 진보하는 한 단계를 나타낸다고 지적하면서 근대성의 문명은 다른 문명적 가능성의 관점에서 비교 비판되고 분석되어야 한다는 점을 피력한다. 이지담 시인은 1980년 광주민주화항쟁을 기억하기 위해 창작한 자신의 시 「무등산 서석대」를 인용하면서 상부에서 내린 지시에 충실했던 ‘평범한 악인’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사회적 약자를 조롱한 글이 SNS에서 떠돌아다니는 것을 비판적으로 형상화한 이산하 시인의 시 「악의 평범성 1」을 인용하면서 정치인들의 이념 논쟁에 편승하여 죄의식도 없이 악에 물들어 가는 군중을 질타한다. 그리고 민주주의의 정의가 살아있는 세상에 대한 염원을 담아 미얀마 군부와 싸우고 있는 미얀마 작가들에게 보낸 자신의 시 「진주가 되는 그날」을 인용하면서 한국의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 유권자들의 현명한 선택을 기대한다.

한편 박형서 작가는 모든 소설이 결국 정치소설이고, 따라서 정치소설은 소설의 하위 장르가 아니라는 전제하에 작가들이 정치소설을 기피하는 현실적인 이유는 하고 싶은 말을 곧장 하는 행위가 실제로 위험천만하기 때문이라고 언급한다. 이제는 작가가 용감무쌍한 소설을 썼다고 정치 권력에 핍박받을까 걱정할 필요가 없지만, 소셜미디어로 대표되는 다양한 스펙트럼의 비판이 문학적 성취를 지적하면서 교묘히 포장된 정치적 반론을 제시하거나, 재야의 정치 고수들이 잡다한 정보를 엮어 말 폭탄을 제조하는 현실의 세태를 풍자적으로 지적한다. 선우은실 평론가는 한국에서 문학이 의미화되어온 일련의 역사적 과정을 돌아보고 가장 미학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타진한 2010년대 초반의 비평적 전개 과정에서 비평이 논의의 대상에서 약간 비껴있지는 않았는지 반성을 제기한다. 그리고 여성 문학을 관심사로 설정하고 공부하던 대학원 과정의 수업에서 기말 레포트를 작성할 때 성폭력과 관련한 뉴스를 접하며 글쓰기와 공부에 무력감을 경험했던 사례를 비평적 에세이로 서술하면서 비평가의 입장에서 비평을 쓰는 일 혹은 한국문학을 하는 일에 대해 언급한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연구자 및 비평가의 정체성 및 삶-정치와 문학 사이에 간극에 대한 응시 및 질문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아무쪼록 이 기획특집이 바야흐로 정치의 계절을 맞이하는 우리 사회가 한국문학의 미학성과 정치성에 대한 사유를 진전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기대한다.

오형엽
평론가,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계간 《대산문화》 편집자문위원, 1965년생
평론집 『신체와 문체』 『주름과 기억』 『환상과 실재』 『알레고리와 숭고』, 저서 『문학과 수사학』 『한국 모더니즘 시의 반복과 변주』 『현대문학의 구조와 계보』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