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작 대 영화
굳이 드러내지 않아도 강렬하다

- 토머스 새비지의 장편소설 『파워 오브 도그』와 제인 캠피온 감독의 영화 <파워 오브 도그>

  • 원작 대 영화
  • 2022년 봄호 (통권 83호)
굳이 드러내지 않아도 강렬하다

- 토머스 새비지의 장편소설 『파워 오브 도그』와 제인 캠피온 감독의 영화 <파워 오브 도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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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시편에 나오는 구절 ‘파워 오브 도그’를 어떻게 해석하든 상관없다. 개의 세력이든, 개의 발이든, 개의 입(아가리)든 ‘삶에서의 공포’ ‘악의 세력’이란 의미이다.

토머스 새비지의 소설 『파워 오브 도그(The power of dog)』에서 그것은 잔인하고, 노골적이고, 날카롭고, 집요하며, 영악하다. 다른 사람들은 쉽게 알아채지 못하는 산등성이에 의해 형상화된 그것은 주인공인 필을 상징한다. 동시에 그를 닮은, 그를 제물로 삼으려는 또 다른 인물인 열여섯 살의 소년 피터이기도 하다.

1925년 미국 몬태나주 서남부의 가축운송기지인 비치 부근에 자리 잡은 광활한 목장이 배경인 소설 『파워 오브 도그』는 거칠고 섬뜩하다. 단순히 시대와 공간의 느낌 때문만은 아니다. 그 속에서 펼쳐지는 인물들의 대립과 긴장, 그 과정과 결말이 가진 사악함과 집요함과 치밀함이 입을 벌리고 맹렬히 달려드는 개를 마주하는 듯하다.

이 작품은 1967년 출간되었지만 50여 년이 지나서, 그것도 뉴질랜드의 여성감독 제인 캠피온에 의해 영화화되면서 재발견된 소설이다. 미국문학사로서는 행운이다. 한 인간의 집요한 사악함을 극단적 도덕적 이탈이나 병적인 광기 없이 이처럼 거침없이 드러낸 작품이 있었던가. 주제의식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시대와 공간과 인물을 아울러 그것을 강렬하고 역공(逆攻)적으로 이야기에 침투시킨 소설이 과연 있었던가.

그 주제란 『브로크백 마운틴』과 『시핑 뉴스』의 작가 애니 프루가 말한 “남성성이 지배하는 세계인 목장에서 동성애 혐오라는 형태로 표출되는 억압된 동성애”이다. 소설도, 영화도 동성애란 말 한마디, 행동하나 드러내지 않는다. 필이 과거 한 인물(브롱크 헨리)을 그리워하지만 다른 이유를 댄다. 만약 드러냈다면 억센 남성성이 지배하는 카우보이의 세계에서는 그것은 곧 추락과 고립이다.

그래서 필은 자신을 억압할 수밖에 없다. 정체성을 감추기 위한 그 억압은 부자이면서도 지저분한 외모, 거친 야성적 생활의 고집과 비슷한 인간에 대한 악랄하고 노골적인 혐오와 차별로 표출된다. 그 대상이 형제애로 40년 넘게 한 방을 쓴 동생 조지, 그와 결혼와 미망인 로즈와 그녀의 아들 피터이다. 로즈를 돈을 노린 ‘꽃뱀’으로 취급해 멸시하고, 종이꽃을 만드는 창백한 소년 피터를 ‘암사내(sissy)’라고 조롱한다.

필의 언어는 날카롭고 차갑다. 그는 어떻게 말해야 상대에게 잔인하게 들리는지 알고 있다. 그렇게 남의 화를 긁으면서 희열한다. 삶에 난관이 있어야 열심히 살게 된다고 믿는 그는 그렇게 살지 않는 인간들에게 화산 같은 증오와 멸시를 내뿜는다. 그 증오와 멸시에는 오만함만이 아닌 배신감, 질투심, 모멸감, 자기부정 등이 뒤섞여 있다. 때문에 『파워 오브 도그』는 정반대 성격의 형제인 필과 조지, 조지와 재혼한 로즈와 그녀의 아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선함과 악함, 잔인함과 너그러운 상냥함, 약자와 강자의 대립과 투쟁의 단순한 갈등과 대립의 구도가 아니다.

그보다는 훨씬 복합적이고 중층적이다. 필은 졸부들의 사치를 경멸하고, 돈에 알랑거리는 천박한 여성과 도시의 새로운 풍속을 저주한다. 동성애적 성향을 가지고 있으면서 가장 야생적인 삶을 고집하는 울타리를 쳐버리고는 누구보다도 ‘여자 같은 남자’를 극단적으로 혐오한다. 그 실체를 드러내기 위해 토머스 새비지는 군데군데 그의 묘사에 많은 부분을 할애하면서 극적 구성 감각으로 이야기에 긴장감을 불어넣었다.

 

(사진출처 : 넷플릭스)    

 

영화라고 크게 다르지 않다. 대조적인 인물의 성격과 그에 따른 감정과 반응이 가져오는 집착과 혐오, 억압과 복수의 긴 여정을 지치지 않고 힘 있게 끌고 간다. 시간적 제약으로 영화가 소설만큼 디테일하거나 친절하지는 않다. 결말로 나아가는 가장 중요한 나침반인, 의사인 피터의 아버지 고든의 삶, 필과의 관계, 자살이유 등을 소설 앞부분(2장)에서 세세하게 밝혔으나 영화에서는 한두 장면으로 건너뛰었다. 주제의식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종이꽃’도 단편적 에피소드와 장치에 그쳤지만 영화 <파워 오브 도그>는 영상언어로 충분히 강렬한 인물과 주제, 이야기를 창조했다.

<피아노>에서 보았듯이 극적 긴장감과 인물의 짙은 채색을 통해 인간의 존재조건을 묘파하는 거장 제인 캠피온이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여기에 배우 베네딕트 컴버배치(필 역)와 제시 플레먼스(조지 역), 커스틴 던스트(로즈 역), 코디 스밋맥피(피터 역)의 이미지와 역할을 빼놓을 수 없다. 넷은 서로의 개성을 살리면서 냉정하게 이야기의 긴장과 균형을 잡아주었고 영화가 선택한 단편적 에피소드, 이를테면 피터의 토끼 해부나 필의 눈빛 변화 등을 통해 상상과 추측을 가능하게 했다.

그 상상과 추측은 소설이 의도한 ‘억압과 혐오’가 빚어내는 악행과 복수란 여정을 벗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이 작품에 관한 한 소설을 읽든, 영화를 보든 큰 차이가 없다. 소설이 구체적 묘사와 균형 잡힌 문장으로 문학적 힘과 긴장감을 유지했다면, 영화 <파워 오브 도그>는 인물들의 깊고 생동적인 표정과 행동과 심리로 그것을 대신했다. 만약 둘을 비교하고 싶다면 어느 것을 먼저 선택해도 그 느낌은 크게 다르지 않다.

물론 소설과 영화가 처음부터, 모든 것을 나란히 하지는 않는다. 시작부터 조금 다르다. ‘소 불까기는 언제나 필이 도맡았다. 필은 먼저 소의 불알주머니를 잘라서 아무렇게나 내던졌다’로 시작하는 소설은 어디로 갈지 좀처럼 알 수 없다. 잔인하고 안하무인인 필의 성격과 행동만큼이나 거칠고 야성적이며 위험하고 섬뜩하다.

그런 느낌은 조지가 식당을 운영하는 미망인 로즈와 결혼하고, 필이 상스럽지만 핵심을 찌르는 언어와 노골적인 증오로 그것을 멸시하면서 점점 증폭된다. “어머니가 이러지 않아도 되게끔 제가 처리할게요.”와 같은 암시가 있지만 그것이 언제, 어떻게 끝날지 알 수 없다. 소설이 끝날 때에야 비로소 그 종착지가 어딘지 알게 된다.

“아버지가 죽고 나서 나는 엄마가 행복하기를 바랐다.” 영화가 시작되면서 피터는 이렇게 독백한다. 그래서 관객들은 안다. 아들의 바람대로 영화가 ‘엄마의 행복’으로 끝나리라는 것을. 비록 소설처럼 필을 중심에 놓고 이야기를 전개하지만, 최종 주인공이 피터란 예상도 가능하다. 필의 강렬한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인 관심은 열여섯 살에 불과한 피터의 ‘언제, 무엇으로, 어떻게’로 모아진다.

그것은 필이 저속한 언어, 노골적인 적대감, 싸늘한 침묵으로 배신한 동생 조지와 그 동생을 빼앗아간 여자 로즈, 그래서 복수의 대상으로 삼은 피터를 압박할수록 더욱 절박해진다. 필이 피터에게서 동질성을 발견하고, 피터가 필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는 순간 혼란을 일으키지만 더욱 가까워졌음을 암시한다. 이쯤에서 소설과 영화는 나란히 간다.
필은 피터에게 “장애물을 없애가는 게 인생”이라고 했다. 필에게는 동생을 빼앗아간 로즈가 장애물이지만, 피터에게는 사랑하는 엄마의 행복을 빼앗은 필이야말로 장애물이다. 피터에게는 이제 그 장애물을 제거하는 일만 남았다. 영화가 소설의 치밀하고, 은밀한 방법을 굳이 마다할 이유가 없다. 피터에게는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의학적 재능과 묵직한 검은 책과 학교에서 배운 사실(탄저병)이 있다. 그것으로 그는 먹잇감을 만들었고 자기감정과 오만과 착각에 빠져 달려드는 개는 그것을 덥석 물었다.

그 개는 죽었다. 시편의 구절대로 피터는 가장 소중한 엄마를 그 개의 아가리에서 구했다. 피터는 그것을 복수나 인과응보, 혹은 심판이라고 하지 않고 ‘어떤 희생’ 덕분이었다고 했다. 그 말이 오히려 더 무섭다. 그 희생으로 과연 피터가 바라던 엄마의 행복은 올까. 소설도, 영화도 쉽게 답하지 못하고 뭉뚝한 침묵으로 끝낸다. 피터 또한 그 개일지 모른다는 사실 때문일까. 오랜만에 소설과 영화가 한마음인 것을 본다.

이대현
언론인, 영화평론가, 1959년생
저서 『영화로 소통하기, 영화처럼 글쓰기』 『소설 속 영화, 영화 속 소설』 『내가 문화다』 『유아 낫 언론』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