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후기
퍼킨스의 모자 그리고 쓴다는 것

-평론집 『얼룩을 가리는 손』

  • 창작후기
  • 2022년 봄호 (통권 83호)
퍼킨스의 모자 그리고 쓴다는 것

-평론집 『얼룩을 가리는 손』

 

마이클 그랜디지 감독의 2016년 작 <지니어스>는 미국 문학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전설적인 편집자 맥스웰 퍼킨스(콜린 퍼스)와 소설가 토마스 울프(주드 로)의 만남, 책을 매개로 한 두 남자의 신뢰와 우정, 대립과 결별 그리고 울프의 비극적인 죽음까지를 담아내고 있는 영화이다. 맥스웰 퍼킨스는 스콧 피츠제럴드와 헤밍웨이를 작가로 발탁하고 그들의 책을 편집하여 출간한 담당 편집자이다. 퍼킨스는 작가의 글을 최대한 원본 그대로 출간하는 것을 미덕으로 삼는 편집자가 아니다. 그는 작가의 초고를 자세히 읽은 후 불필요한 부분을 삭제하고, 문맥과 문장에 가차 없이 수정을 요구하는 말 그대로 ‘편집’인이며, 의미 있다고 판단하는 책을 완성하기 위해 작가와 대립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냉정한 성격의 프로페셔널이다.

1929년의 어느 날 회사의 동료는 출판사에 투고된 엄청난 분량의 원고를 퍼킨스에게 전해주고, 이 정리되지 않은 문장더미를 꼼꼼하게 읽은 퍼킨스는 여기서 기이한 매력을 발견한다. 이 글을 쓴 사람은 토마스 울프로, 뉴욕의 모든 출판사에서 퇴짜를 맞고 마지막으로 찾아온 곳이 바로 퍼킨스가 근무하는 스크라이브너스 출판사였던 것이다. 퍼킨스는 토마스 울프의 책을 출판하겠다고 결정을 하고, 이를 위해 울프에게 거대한 문장더미를 독자들이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한 권의 책으로 정리할 것을 요구한다. 외향적이며 수다스러운 울프와 내향적이고 말수가 적은 퍼킨스는 성격이나 표현의 방식에서 같은 구석을 찾을 수 없을 만큼 다르지만 그들의 다름은 서로에게 이질적이기보다는 서로가 가지지 못한 부분을 보완해주는 방식으로 작용한다. 또한 서로에게 보내는 신뢰는 이 둘의 협업이 완전한 하나를 위해 진행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책이 독자들과 평단의 호평을 받은 토마스 울프의 데뷔작 『천사여, 고향을 보라』이다.

책을 읽기보다는 게임을 하며 시간을 보내고, 독서보다는 동영상이나 영화에서 즐거움을 찾는 이런 시대에 한 권의 소설책을 만들어내기 위해 협업하는 편집자와 작가의 이야기를 대중영화로 만들어낼 결심을 한 제작자의 용기는 너무나 대단했고, 결과는 부러웠다. 차고 넘치는 문장을 연기한 주드 로나 그런 문장을 다듬어 더 이상 넣고 뺄 것이 없는 한 권의 책으로 만드는 콜린 퍼스의 연기는 열연이라는 표현이 아깝지 않았다. 하지만 이 모든 것보다 내 눈길을 끈 것은 영화 속 맥스웰 퍼킨스가 쓰고 있는 중절모였다. 그는 사무실에서도, 식당에서도, 원고를 읽는 통근 열차 안에서도, 심지어 가족과 함께 있는 집 안에서도, 모자를 결코 벗지 않는다. 모자는 마치 기계가 작동하고 있음을 알려주기 위해 선명하게 불이 켜진 시그널처럼, 혹은 링에서 내려오기 전까지 결코 벗지 않는 복싱 선수의 글러브처럼, 퍼킨스의 두 눈과 모든 감각이 행간 위에 놓여 있음을 알려준다. 이는 퍼킨스 배역을 맡은 콜린 퍼스의 개성적인 재현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실제 퍼킨스의 습관에서 비롯된 형상화인데, 어떠한 장소에서도 벗지 않는 모자는 퍼킨스의 “트레이드마크”1)였던 것이다.

이 영화에서 퍼킨스는 딱 한 번 모자를 벗는다. 뇌종양으로 쓰러진 토마스 울프가 병상에서 퍼킨스에게 쓴 편지가 그의 사망 소식과 함께 당도한 것이다. 울프의 마지막 문장을 읽은 후 퍼킨스는 처음으로 모자를 벗는다. 퍼킨스는 울프의 편지를 받고 오열하지 않지만 퍼킨스의 머리에서 처음으로 내려온 모자는 지나간 시간을 향해 떨궈진 애도의 손짓처럼, 울프의 파란만장한 삶이 남긴 마지막 문장 뒤에 퍼킨스가 찍은 마침표처럼, 처연하게 빛난다. 어쩌면 그것은 울프의 모든 문장을 읽은, 그리고 이제 막 당도한 마지막 문장까지 다 읽어낸 퍼킨스의 펜에서 떨어진 잉크자국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내게 퍼킨스의 모자는 <지니어스>의 모든 이야기나 장면보다 먼저 떠오를 것이 분명한 얼룩이 되었다.

‘왜’라는 질문을 던지면 조리 있게 대답할 수 없지만, 《대산문화》의 ‘창작후기(또는 출간후기)’를 청탁받고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퍼킨스의 모자였다. 오해를 줄이기 위해 조금 더 설명하자면, 내게 연상된 퍼킨스의 모자는 영화의 말미에 등장한 벗어놓은 모자가 아니라 책에 대해 품고 있는 퍼킨스의 신념이나 열정처럼 여겨지는, 머리 위의 모자이다. 처음부터 퍼킨스의 모자가 눈에 들어온 것은 아니다. 아이러니하게도 퍼킨스의 모자는 울프의 편지를 받고 모자를 벗는, 모자의 용도가 사라지는, 그 장면을 통해 비로소 의미를 갖기 시작하였다. 굳이 나누어서 말하자면, 퍼킨스가 모자를 벗는 그 순간은 감동적이고, 미적이다. 하지만 미적이거나 예술적이라고 느껴지는 모든 것이 그대로 문학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시작점이거나 작은 동기에 불과하다. 문학은 그때 벗은 모자를 다시 쓸 때 본격적으로 시작되며, 냉정한 생각의 집중된 지속을 통해 보다 의미 있게 완성된다. 농담처럼 마무리 짓자면, 글이나 모자나 모두 쓰는 것을 통해 시작된다. 그게 어렵고 중요하다는 말이다.


1) 고정기, 『편집자의 세계』, 페이퍼로드, 2021, 22쪽.

※ 필자의 평론집 『얼룩을 가리는 손』은 재단의 대산창작기금을 받아 2021년 문학동네에서 발간되었다.

서희원
평론가, 《현대문학》 편집자문위원, 1973년생
저서 『얼룩을 가리는 손』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