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천사의 몫, 한 시에 남아 있는 것

  • 2022년 봄호 (통권 83호)
①천사의 몫, 한 시에 남아 있는 것

이상하게도 시간은 빠르게 흐르고, 시간이 떨구고 간 것들이 주변에 자꾸 쌓여간다. 책갈피에서 발견된 오래된 편지. 편지에서 그 사람은 나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여름방학에 시골집으로 돌아가서 내내 나의 사과를 기다렸노라고. 기억의 갈피를 아무리 뒤적여 봐도 발신인을 떠올릴 수는 없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내가 그에게 답신을 쓰지 않았다는 것. 누군가 삼십 년 동안의 나의 사과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검은 벌레와 하루살이 떼와 붉은 모기들이 몰려드는, 식지 않은 한낮의 열기와 눅눅한 습기와 회색 먼지가 뒤섞인 어둡고 누긋한 방에서.

 


천사의 몫

어떤 영화를 보고 알았다. 세상의 가장 아름다운 향기와 맛, 그게 천사의 몫이라는 걸

세상엔 아무도 가져가지 않을 누더기 이불과 시인 같은 것이 있지
그건 오직 천사들만의 몫으로 남겨진 것

비좁은 골목으로 달려가던 아이가
갑자기 뒤를 돌아본다, 남기고 온 것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영화는 끝이 나고

무너진 담벽에 기대앉은 천사는
너를 내려다보며 혀를 차고 손을 내밀겠지만

하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가장 달콤한 그건 너의 것이었다

그러니 천사가 가져가지 못하도록
잔뜩 웅크린 너는 죽은 시인을 꼭 끌어안고
두꺼운 이불을 덮고 잠드는 것이다

어두운 골목 저편에서
취한 건달들이 알 수 없는 노래를 부르고
가끔 시인의 영혼처럼 환한 빛이 타오른다

지상에는 아무도 가져가지 못할 누더기 이불과
너의 검은 뺨에 아무도 모르게
흘러내리는 향기가 있고



한 시에 남아 있는 것

항상 남아 있는 것이 있다 네게 종이를 한 장 건네고 아무것도 쓰지 못했음을 깨닫고 돌아보지만 너는 이미 인파 속으로 사라진 후이고

 

정작 쓰지 못한 마음은 주머니 속에서 쓰디쓴 돌멩이처럼 굴러다닐 때 시계는 정지하고 남아 있는 것은 박동하지 않는다

 

눈이 녹은 뒤에도 남아 있는 것 파도가 사라진 뒤에도 남은 것 네가 떠난 뒤에도 남은 것 어둑한 눈동자처럼 아직은 있는 것 손때 묻고 더러운 빈 종이 그런 시를 들고 나는 영원히 한 시를 떠나지 못한다

이기성
시인, 평론가. 1966년생
시집 『불쑥 내민 손』 『동물의 자서전』, 평론집 『우리, 유쾌한 사전꾼들』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