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그림 산책
끝없이 펼쳐진 강과 산의 장대한 파노라마

이인문의 <강산무진도>

  • 우리 그림 산책
  • 2022년 봄호 (통권 83호)
끝없이 펼쳐진 강과 산의 장대한 파노라마

이인문의 <강산무진도>

그림 1. 이인문, <강산무진도>, 19세기 초, 비단에 엷은 색, 43.9 x 856.0cm, 국립중앙박물관    

 

이인문(李寅文, 1745-1821)이 그린 <강산무진도(江山無盡圖)>(그림 1)는 길이가 8미터가 넘는 긴 두루마리 그림이다. 이 그림을 펼치면 안개가 자욱이 낀 빈 공간이 나타나다가 갑자기 키 큰 소나무가 있는 산언덕이 불쑥 눈앞에 다가온다. 산언덕 너머로 거대한 강이 펼쳐져 있고 열린 포구가 보인다. 강 위로는 수많은 배들이 나타나 있다. 강 건너에는 성곽, 여러 개의 탑과 절, 마을이 안갯속에 잠겨있다. 강이 끝나는 곳에는 갑자기 기이한 바위산이 첩첩이 솟아있다. 산 아래에는 나귀를 탄 여행객들, 짐을 나르는 사람들, 산속 주막에서 쉬는 사람들이 보인다. 이 바위산들을 따라가다 보면 중간에 거대한 절벽이 나타난다. 그런데 절벽에 도르래가 설치되어 있고 이 도르래를 잡아당겨서 위로 물건을 올려주는 사람들이 보인다. 이 사람들 주위에는 휴식을 취하는 여행객들과 나귀들이 있다(그림 2). 다시 웅장한 바위산이 등장하고 기이한 바위가 솟아 있는 첩첩산중이 눈앞에 펼쳐져 있다. 거대한 폭포가 바위산 안쪽에 있으며 폭포 안쪽으로 난 공간에 사람들이 보인다. 바위산을 지나자 큰 소리를 내며 흐르는 개울이 나타나고 그 옆으로 산성(山城)의 성문과 마을이 등장한다. 험난한 협곡에 놓인 다리를 건너는 여행객들은 이 험준한 산을 통과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를 알려준다. 거대한 바위산 아래에는 성곽, 탑과 사찰, 누각이 보인다. 다시 협곡이 등장하고 넓고 평평한 바위 언덕에는 나무 아래에 앉아서 쉬거나 계속 이동하는 여행객들이 나타나 있다. 이 장면이 지나자 갑자기 포구가 다시 열리고 정박해 있는 배들이 눈에 들어온다(그림 3). 멀리 산 아래에는 거대한 누각들과 작은 건물들이 안개와 아지랑이 속에 자리 잡고 있다. 강 위에는 돌로 된 큰 다리가 놓여 있다. 강은 그림이 끝나는 곳까지 이어져 있으며 먼 산 아래에는 많은 건물들이 안개와 아지랑이 속에 잠겨있다. 끝없이 흐르는 강물을 따라 낮은 언덕들은 화면 뒤쪽에 희미하게 나타났다가 거대한 안갯속으로 사라지고 있다.

 

그림 2. 그림 1의 세부    

 

이인문의 <강산무진도>는 거대하고 웅장한 산과 열린 강, 포구, 강 위를 오가는 배들, 산속 마을, 험준한 산을 통과하는 여행객들, 수많은 탑과 사찰들이 파노라마처럼 화면에 나타나 있는 웅장한 산수화이다. 이 그림은 제목 그대로 끝없이 펼쳐진 강과 산, 그 속에서 삶을 살아가는 인간들이 나타나 있는 작품이다. <강산무진도>는 그림으로 그려진 영원무궁한 자연의 대서사시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그림을 꼼꼼히 살펴보면 누각, 탑, 사찰, 인물들 모두가 중국식으로 그려져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강산무진도>는 같은 주제를 다룬 중국 그림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그려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강산무진’을 주제로 한 어떤 중국 그림도 이인문이 그린 이 그림과 유사한 그림은 존재하지 않는다. 도대체 이인문은 어떻게 <강산무진도>를 그린 것일까? 중국에서 ‘강산무진’을 주제로 한 그림은 11세기부터 본격적으로 그려졌으며 강산무진도 계열의 그림들은 북송(北宋)시대에 크게 유행하였다. 11세기 초에 활약한 연문귀(燕文貴, 대략 970년경~1030년에 활동)는 강산무진도의 전통을 확립한 대표적인 화가이다. 연문귀의 <강산누관도(江山樓觀圖)>(오사카시립미술관(大阪市立美術館) 소장)와 그를 따른 화가인 굴정(屈鼎, 대략 1023년경-1056년경에 활동)이 그렸을 것으로 추정되는 <하산도(夏山圖)>는 강산무진도의 대표적인 예들이다(그림 4). 이 그림들에는 거대한 산, 드넓게 열린 강, 어촌과 산마을, 누각과 집들, 고기 잡는 어부들, 정박해 있는 배들, 폭포, 산에서 흘러내려오는 개울물, 다리들, 여행객들, 무수히 많은 나무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있다. 강산무진은 ‘계산무진(溪山無盡),’ ‘천리강산(千里江山),’ ‘만리강산(萬里江山)’으로도 불렸다. 모두 영원무궁한 대자연의 장관(壯觀)을 지칭하고 있다. 북송시대 이후 어떤 이유에서인지 강산무진도는 인기를 잃게 되어 더 이상 유행하지 못했다.

 

그림 3. 그림 1의 세부   

 

이인문은 김홍도(金弘道, 1745-1806년 이후)와 동갑으로 친한 친구였다. 두 사람은 도화서(圖畵署) 화원으로 막역한 사이였다. 김홍도와 마찬가지로 이인문도 도화서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중인 가문 출신이었다. 이인문은 산수화에 뛰어난 기량을 발휘하였다. 김홍도는 주로 한국적인 진경산수화, 풍속화를 그렸다. 그러나 이인문은 중국적인 화풍을 추구하였으며 중국적인 주제를 지닌 산수화를 잘 그렸다. <강산무진도>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중국의 어떠한 강산무진도와도 이 그림은 유사한 점이 없다는 사실이다. 첫째, 중국의 강산무진도는 주로 봄 또는 여름의 풍경을 보여준다. 그런데 <강산무진도>에 나타난 계절은 가을이다. 가을 풍경을 그린 중국의 강산무진도는 존재하지 않는다. 중국에서 궁정화가(宮廷畵家)가 강산무진도를 그렸을 경우 영원무궁한 대자연의 장관을 의미하는 ‘강산무진’은 ‘영원한 제국의 번성’ 또는 ‘태평성세(太平盛世)’를 의미했다. 가을은 만물이 쇠하는 조락(凋落)의 계절이다. 따라서 가을은 태평성세의 계절이 될 수 없었다. 만물이 어두운 겨울을 이기고 새로운 삶의 활력으로 빛나는 봄 또는 만물이 무성한 여름이 태평성세의 계절이었다. 따라서 가을 장면을 그린 <강산무진도>는 중국의 강산무진도 전통에 비추어 보았을 때 ‘강산무진’을 주제로 한 작품들 중 매우 예외적인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 <강산무진도>에는 무수한 여행객이 등장한다. 중국의 강산무진도에는 소수의 여행객, 어부, 산촌 사람들만이 나타나 있다. 그런데 <강산무진도>에는 산촌에 사는 사람들도 보이지만 대부분의 등장인물들은 어디론가 이동하는 여행객들이다. 이 그림이 강산무진을 주제로 한 그림이라면 왜 이렇게 많은 여행객들이 필요했을까? 이 점은 풀기 어려운 수수께끼이다. 셋째, <강산무진도>에는 너무도 험난한 산들이 많이 등장하고 있다. 중국의 강산무진도에는 산과 강이 조화롭게 어울려있다. 반면 <강산무진도>에는 드넓은 강과 포구도 나타나있지만 화면 전체를 압도하는 것은 웅장하고 기세 넘치는 바위산들과 기이한 봉우리들이다. ‘강산무진’의 핵심은 산과 강이 조화롭게 결합된 영원한 자연의 아름다움이다. 따라서 험준한 산세를 특징으로 하는 <강산무진도>는 중국의 강산무진도 전통에서는 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독특한 그림이다. 결국 이 세 가지 사실에 기초해 볼 때 과연 <강산무진도>가 ‘강산무진’을 주제로 한 그림일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그림 4. 전(傳) 굴정(屈鼎), <하산도(夏山圖)>(또는 <하산도권(夏山圖卷)>), 1050년경, 비단에 색, 45.4 x 115.3cm,뉴욕 메트로폴리탄박물관(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비록 그림 앞에 표구된 비단인 제첨(題簽: 그림의 앞표지)에 ‘이인문필(李寅文筆) 강산무진도(江山無盡圖)’라고 적혀있지만 이 그림이 정말로 ‘강산무진’을 주제로 한 그림인가하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 ‘이인문필 강산무진도’라는 제목은 이인문이 쓴 것이 아니다. 후대에 누군가가 제첨에 이렇게 쓴 것이다. 즉, 본래 <강산무진도>의 제목은 알 수 없다. 이러한 근본적인 의문에도 불구하고 이인문의 <강산무진도>는 동아시아의 어떤 그림에서도 그 전례를 찾기 어려운 매우 창의적인 그림이다. 이인문은 가을을 배경으로 험준한 산, 광활하게 펼쳐진 강, 수많은 배들이 있는 포구, 무수한 여행객들, 탑과 절들, 안개와 아지랑이가 가득한 마을과 성곽 등 웅장한 자연 속에서 삶을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긴 두루마리 그림 속에 장대한 파노라마처럼 펼쳐놓았다. 주제의 참신성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이 그림은 전무후무한 작품이다. 19세기 초반 동아시아 그림의 전통이 쇠락하던 시절에 이인문은 이 놀라운 그림을 남기고 조용히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는 갔지만 이 명작은 그가 지녔던 엄청난 천재성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장진성
서울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 교수, 1966년생
공저서 『Landscapes Clear and Radiant: The Art of Wang Hui, 1632-1717』, 저서 『단원 김홍도: 대중적 오해와 역사적 진실』, 역서 『화가의 일상: 전통시대 중국의 예술가들은 어떻게 생활하고 작업했는가』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