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칼럼
선택적 행복의 실천

  • 대산칼럼
  • 2022년 봄호 (통권 83호)
선택적 행복의 실천


“상처받고 응시하고 꿈꾼다. 그럼으로써 시인은 존재한다. 그는 내일의 불확실한 희망보다는 오늘의 확실한 절망을 믿는다. 그리하여 시는 어떤 가난 혹은 빈곤의 상태로부터 출발한다. 없음을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없음의 현실을 부정하는 힘 또는 없음에 대한 있음을 꿈꾸는 힘, 그것이 시이다.” (최승자, 『이 시대의 사랑』, 1981, 뒤표지 글)


대학 시절, 최승자(1952~)의 시만큼이나 첫 시집에 실린 저 문장에 나는 오래 매혹당했다. “내일의 불확실한 희망보다는 오늘의 확실한 절망을 믿는다.” 저 말은 내게 현실인식이 치열할수록 절망을 피해갈 도리는 없다는 말로 들렸다. 나 자신의 삶 속에 존재하는 불행과 심연, 게다가 힘없고 가난한 자들이 이렇게 고통받는 세상에서 웃고 즐거운 일을 생각한다는 것에 죄책감을 느꼈다. 그렇다면 절망의 순도에 따라 글을 쓰는 자의 진정성과 치열함이 증명되는 것 아닐까? 때문에 ‘손쉬운 희망’을 말하는 것은 불의와 부정을 못 본 척하거나 혹은 알면서도 자신만 잘 살면 된다고 믿는 자들의 기만이라고 느꼈다.

시인들만큼 ‘절망’에 익숙한 사람들이 또 있을까. 다만 그 시절의 내가 몰랐던 것은 시인들에게는 ‘안전장치’가 없다는 점이었다. 너무 단순한 구분이 아닌가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소설가들은 ‘픽션’이라는 안전장치가 있다. 현실의 소설가와 소설 속 등장인물 간에 유사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장르적 특성상 거리조절이 가능하다. 또한 선한 주인공에 반대하는 악한을 입체적으로 그리는 일도 가능하다. 좀 더 자유롭게 다양한 이야기와 풍요로운 세계 창조가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시인들은 좀 다르다. 1인칭이 되지 않으면 말에 힘이 실리지 않는다는 저 오랜 장르적 특성상 시인과 시적 화자 둘 사이의 거리가 매우 가깝거나 일치하는 편이 진정한 것이라는 압력이 존재한다. 또한 시의 내용이 시인의 삶으로 증명되거나 보충되어야 비로소 그 시가 ‘진짜’이고 ‘진실’하다고 믿는 오랜 관습이 있다. 이것이 시인들을 ‘잠수함 속의 토끼’처럼 시대의 불행과 고통에 가장 먼저 예민하게 반응하는 선구자 혹은 예언가적인 위치에 올려놓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확실한 절망’에 가치를 두고 시를 쓰면서, 늘 가장 예민한 상태로 감각과 감정을 확장시키려는 노력에 오래 노출된 시인들은 자기도 모르게 저 ‘확실한 절망’에 ‘잡아먹히는 경우’가 발생하기도 한다. 절망에 너무 자주, 가깝게 다가가다 보면 손을 데이고 눈이 멀어 어느 순간 무언가를 놓아버리게 되는 일이 발생하기도 하는 것이다. ‘안전장치’가 없는 시인들은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현실의 삶에 취약한 면이 있다.

지난겨울에는 최승자의 첫 산문집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난다, 2021)를 읽었다. 원래는 1989년에 출간되었던 책인데 절판되었다가 90년도 이후 발표한 산문 6편이 추가되어 새로운 표지로 재출간되었다. ‘난다 출판사’의 김민정 대표가 최승자 시인의 산문집을 아껴 기억하다가 복간을 제안, 거절당한 것이 2014년이었다. 그때도 이미 최승자는 조현병 때문에 폐쇄병동에 있었고 이후로도 입원과 퇴원을 반복했다. 그로부터 5년 뒤, 2019년 11월 어느 날, 다시 폐쇄병동에 있던 최승자 시인에게 출간을 승낙하는 전화가 왔다고 한다. 우선적으로 나는 눈을 내리깐 채로 담배 연기를 내뿜는 최승자 시인의 깡마른 흑백 표지 사진 때문에 마음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았다. 너무나 가혹하고 생생한 존재감 때문에 사진을 정면으로 바라보기가 힘들었다. 최승자 시인을 기억하며 시인들이 남긴 문장들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시인이라면 누구나 최승자처럼 살고 쓰고 해보리라는 가느다란 꿈이 있었을 것이다. 동시에 나는 결코 그러하지 못하리라는 기묘한 자괴와 안정을 곧잘 느꼈으리라. 동거할 수 없는 감정을 당신에게 느낀다.”(서효인)는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내가 그토록 도달하고 싶었으나, 결국은 두려움 때문에 물러났던 미래에서 온 것 같은 사진이었기 때문이다.

이상하게 참혹한 마음으로 책을 읽으며 나는 ‘없음의 현실’만큼이나 ‘없음에 대한 있음을 꿈꾸는 일’을 해보고 싶다고, ‘상처받고 응시하’는 일뿐만 아니라 ‘꿈꾸는’ 단계로 넘어가고 싶다고, 애를 쓰며 생각했다. 그리고 내가 밑줄 그은 최승자의 한 문장. “이제 나는 무차별적 불행의 이상화 대신에 선택적 행복의 실천을 위해 노력하고 싶다.” 나는 지금도 더 많이 절망하고, 역설적으로 ‘확실한 절망’에 다가서려는 끈질긴 노력이 동반되어야 현실을 제대로 말할 수 있는 ‘좋은 시인’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동시에 부디 우리 시인들이 ‘무차별적 불행의 이상화’에서 조금은 자유로워져서 ‘선택적 행복’을 실천하기 위해 애쓰고, 또 담담하게 그것을 누리고, 사랑하는 사람과 좋은 한 때를 살고, 그 속에서 시를 쓰는 삶을 이어나갔으면 좋겠다.

박상수
시인, 평론가, 동덕여자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 계간 《대산문화》 편집자문위원, 1974년생
시집 『너를 혼잣말로 두지 않을게』 『후르츠 캔디 버스』 『숙녀의 기분』 『오늘 같이 있어』, 평론집 『귀족 예절론』 『너의 수만 가지 아름다운 이름을 불러줄게』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