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인터뷰
나는 오케스트라의 압도적 음향에 맞선 한 대의 첼로

- 평화의 음악가 윤이상과의 대화

  • 가상인터뷰
  • 2022년 봄호 (통권 83호)
나는 오케스트라의 압도적 음향에 맞선 한 대의 첼로

- 평화의 음악가 윤이상과의 대화

윤이상(1917~1995)


경남 산청에서 태어나 통영에서 성장했고, 서베를린음악대학을 졸업했다. 1959년 9월 4일 다름슈타트 국제현대음악제 하기 강습회에서 〈일곱 악기를 위한 음악〉을, 9월 16일 네덜란드 빌토벤의 가우데아무스 국제음악제에서 〈피아노를 위한 다섯 개의 소품〉을 발표함으로써 신진 음악가로 화려하게 데뷔했다. 1966년 서독 도나우에싱겐 음악제에서 〈예악〉이 초연된 이후 중진 음악가로서 주목을 받던 중 1967년 동백림간첩단사건에 연루되어 감옥에 갇히는 등 형극의 길을 걸었다. 이 일을 계기로 그는 해외 민주화운동에도 앞장섰으며, 음악으로써 전 세계에 평화의 메시지를 전파하는 데 평생을 바쳤다. 1972년 뮌헨 올림픽 개막 오페라 〈심청전〉을 세계 초연해 전 세계인에게 깊은 감동을 안겨주는 등 작곡가로서 확고한 세계를 구축했으며 1988년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 대통령으로부터 ‘독일연방공화국 대공로훈장’을 받았다.

 

 폭설이 그친 뒤, 약속 장소로 정한 커피숍으로 한 사나이가 다가왔다. 코트 깃을 세우고 계단을 올라오는 걸음걸이가 신중했다. 유리문을 열고 들어서는 그는 사진과 영상에서 본 것과 똑같은 얼굴이었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하자, 무심한 듯한 그의 눈빛이 조금 부드러워졌다.


■ 박선욱(이하 박) : 선생님, 어서 오십시오. 추운 날 약속을 잡아서 걱정했습니다.

■ 윤이상(이하 윤) : 괜찮소. 아무리 춥다고 해도 현저동만 할까?

 박  서대문형무소 말씀이십니까?

 윤  그렇소. 내가 감옥에 들어갔던 때가 1967년이니까, 벌써 55년 전이로군. 무악재에서 넘어오는 바람은 가을에도 으슬으슬했지요. 겨울 독방에 앉아 있으면 그야말로 칼바람이 숭숭 불어와 머리맡의 물그릇이 꽁꽁 얼 정도였으니 이런 추위쯤이야 시원한 편이었지.

 

윤이상(윤이상평화재단 제공)     

 박  사형선고를 받고 감옥에서 쓰신 곡이 〈나비의 미망인〉 아닙니까? 그때 심정은 어떠셨는지요?

 윤  믿어지지 않겠지만, 곡을 쓰는 동안만큼은 몹시 평온했소. 내 목숨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상황이어서, 오히려 완성하는 데만 집중했지. 작곡을 할 때 손이 곱아서 입김을 호호 불며 오선지에 음표를 그리다 보면 모든 걸 잊을 수 있었소.

 박  동백림사건은 선생님의 일생을 급변시켰던 셈인데, 그때의 상황과 심정을 들려주실 수 있는지요?

 윤  남산 중앙정보부에 끌려갔을 때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소. 어느 밀실에 떠밀려 들어갔는데, 다짜고짜 옷을 모두 벗기고는 몽둥이로 때리더군. 일제 때 항일운동을 하다 감옥에 갇혔을 때가 떠올라 아찔했소. 건장한 중정 요원들은 번갈아 매질을 하다가 대뜸 “너는 간첩이지? 자백해라!”라며 차갑게 명령을 하더군. 거짓 자백을 하라는 거지. 못하겠다고 하면 몽둥이로 개처럼 두들겨 맞았소. 지옥이 따로 없었소. 물고문을 당한 뒤 축 늘어지면 의사가 와서 주사를 놓곤 했지. 깨어나면 다시 고문을 가한 뒤 하얀 종이를 내미는 거야. 그러고는 군복 입은 요원들이 불러주는 대로 쓰기를 강요하고. 결국, 그들의 강요에 굴복한 나는 중정 요원들이 요구한 구절을 토씨 하나도 틀리지 않고 그대로 옮겨 적었지. “나는 공산주의자이다”라고. 며칠 동안 고문을 받고 축 늘어진 내 옆에서 그들은 마치 전리품이나 얻은 듯이 낄낄거리더니 상부에 보고한다며 자리를 뜨더군. 그 순간, 나는 지독한 모멸감에 사로잡혔소. 인간의 존엄성을 짓밟힌 참담함에 치를 떨다가 죽음으로써 나의 결백을 드러내고자 육중한 재떨이로 나의 뒤통수를 세차게 때렸지. 몇 번이고 내리쳐서 정신이 흐릿해지는 가운데, 철철 흐르는 피를 손가락에 묻혀 벽에 썼소.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다! 나의 아이들아, 나는 간첩이 아니다”라고. 그런 뒤 정신을 잃었지. 깨어나서 여러 우여곡절을 겪게 되었는데,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리고 보니까 아내마저 감옥에 들어와 있어서 얼마나 놀랐는지 모르오. 아내도 나처럼 독일에서 중정 요원들에게 납치를 당해 한국으로 끌려온 것이었소. 나중에 들으니, 중정 요원들은 국제법을 무시하고 유럽에서 활동하던 교수, 지식인, 유학생들을 백주 대낮에 많이도 납치했더군. 국내외를 통틀어 중정 요원들에게 끌려온 숫자가 150여 명이 넘는다고 들었소. 그중에는 파리의 이응로 화백도 있었고, 서울에서 활동하던 시인 천상병도 있었지. 참으로 기가 막힐 노릇 아니오? 감옥에 갇힌 뒤, 유럽에서 의뢰받은 곡을 완성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소. 여러 차례의 간청을 한 끝에 독일에서 공수해온 연필과 지우개, 오선지를 받은 뒤 작곡을 할 수 있었소. 그게 바로 〈나비의 미망인〉이오.

 박  선생님을 구명하려는 해외의 움직임이 매우 활발했던 걸로 압니다. 전 세계 음악가와 문화예술인들의 국제적인 항의, 그리고 독일 정부의 압력도 대단했었지요?

 윤  그렇소. 나는 평생 그분들께 커다란 빚을 진 셈이오. 나의 석방을 위해 기꺼이 항의 서한을 써준 빌헬름 말러를 비롯해 연대 서명을 해준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카를하인츠 슈토크하우젠, 한스 베르너 헨체, 죄르지 산도르 리게티, 에르네스트 크셰네크, 볼프강 포르트너, 마우리치오 카겔, 얼 브라운, 롤프 리베르만, 에드바르트 슈템프틀리, 오토 클렘퍼러 등 181명에 달하는 저명한 음악인들의 호의와 격려를 잊을 수 없소.

 박  1967년에 박정희 정권은 장기 집권 시나리오의 일환으로 그해 6·8 부정 총선을 저질렀습니다. 이 전대미문의 부정선거에 대해 학생과 시민들의 규탄 시위가 점차 격렬해지자, 박 정권은 이 같은 위기를 돌파하기 위한 국면 전환용으로 대규모 간첩사건을 조작해냈다는 게 전문가들의 평가입니다. 동백림간첩단사건은 박 정권 치하의 대표적인 용공조작 사건 가운데 하나였지만, 재판이 거듭될수록 간첩 사건은 흐지부지되고 시국사건으로 변모해 용두사미로 끝났지요. 이 사건이 벌어진 지 39년 만인 2006년 1월,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 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는 동백림사건이 정치적으로 조작된 사건이며, 이 사건의 실체가 명백한 허위임을 밝혔더군요.

 윤  내가 베를린에 묻힌 뒤에야 진실 규명이 되었지요. 감옥 안에 갇혀 있을 때에도 나는 한결같이 믿었소. 진실은 언젠가는 밝혀질 것이라고 말이오.

 박  선생님께서 동백림사건에 연루된 직접적인 단초는 북한 방문 때문일 텐데요, 법에 저촉된다는 것은 알고 계셨는지요?

 윤  당시 동독과 서독은 어느 정도 왕래가 가능한 상황이었지. 서베를린에 사는 시민들은 물가가 싼 동베를린에 가서 가끔 장을 보고 올 정도였으니까. 1956년에 유럽으로 유학을 간 나는 그런 분위기 속에서 살고 있었기에 개방적인 인식에 젖었던 것도 사실이오. 대한민국의 엄정한 반공법이나 국가보안법과 같은 구속으로부터 심정적으로 벗어나 있었다고나 할까. 실은, 해방 후 외세에 의한 한반도의 분단 상황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마음도 컸을 거요. 나는 평생 남북한을 하나의 단일한 조국으로 인식하려 했던 자의식 속에서 살았던 사람이니까. 어쩌면, 나의 예술가적 기질로 인해 어떠한 속박에 갇혀 있기를 거부하고 있었는지도 모르지. 1963년에 북한을 방문할 때 스스로 세운 목적은 세 가지였소. 첫째는 강서대묘의 사신도(四神圖)를 보는 것, 둘째는 친구 최상한을 만나는 것, 셋째는 전쟁 이후 변모한 북한의 실상을 살펴보는 것 등이었소.

 박  친구분과 모처럼 만나 기쁘셨겠습니다.

 윤  기쁘다마다. 하지만, 오사카 음악학원에서 나랑 같이 하숙하면서 오페라 아리아를 함께 부르던 옛 친구는 나를 서방 부르주아 음악에 맹종하는 위인으로 매도하더군. 서글픈 마음이 들었소.

 박  뭐라고 위로할 말씀이 없군요.

 윤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는 말도 있지 않소? 오랫동안 그 체제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으니 그럴 수밖에……

 박  사신도 감상은 잘 하셨나요?

 윤  어느 날, 북측의 안내 요원을 따라 강서대묘에 갔던 일이 바로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떠오르는군. 무덤 안으로 들어간 나는 숨이 멎는 듯한 충격에 휩싸였소. 1400여 년의 세월을 뚫고 우렁찬 소리로 포효할 것만 같은 서쪽 벽의 백호가 금방 눈에 띄었소. 오사카 음악학원 시절부터 책상 앞에 백호도를 붙여 놓고 영감을 얻곤 했는데, 실물을 눈으로 보니까 심장이 터질 것만 같더군. 고개를 돌리니 금세 하늘로 솟구칠 듯한 자세로 용틀임하는 동쪽 벽의 청룡이 보였소. 뱀과 거북이 서로 휘감은 상태로 팽팽한 긴장감과 조화로움을 유지하는 북쪽 벽의 현무, 강철 같은 꼬리와 굳건한 날개를 펼치며 곧장 불길을 토할 듯한 남쪽 벽의 주작까지 모두 신령한 기운을 품고 있었지. 네 벽의 사신도를 조화롭게 감싸는 듯한 천장 덮개돌에 그려진 황룡까지 모든 게 황홀하기 그지없는 널방 벽화였소.

 박  선생님께서 실내악곡으로 구성한 4중주곡 〈영상〉은 강서대묘에서 감상하셨던 사신도의 구도를 음악적으로 형상화한 특징을 지녔다는 평가가 지배적입니다.

 윤  서대문형무소에서 플루트, 오보에, 바이올린, 첼로를 위한 〈영상〉을 쓰면서 그때의 감흥을 가락에 투영시켰던 건 사실이오.

박선욱, 하이델베르크-카를 테어도어 다리의 동상앞에서 

 박  첼로로 백호를 표현하고 플루트로 현무를, 오보에로 청룡을, 바이올린으로 주작을 표현한 것에 대해 음악계는 찬사를 쏟아냈습니다. 일본의 음악가 야노 토오루[矢野豁]는 자신의 논문에서 “내가 윤이상에 대하여 하나의 깊은 확신을 가진 것은 몇 년 전 플루트, 오보에, 바이올린, 첼로를 위한〈이마주(영상)〉를 들었을 때였다. 그 확신이란 것은 유럽의 음악사에 불후(不朽)의 이름을 남길 아시아 출신의 작곡가는 지금 현재 윤이상밖에 없다는 생각이었다.”라고 극찬한 적이 있지요. 그는 나아가 “윤이상이 엮어 짜낸 획기적인 어법은 유명한 ‘하우프트톤’(Hauptton, 主要音)이다. 이 관념을 단순히 실험적으로 써서 보였다는 것이 아니라, 더 적극적으로 음악의 정통적인 어법으로서 위치를 세워 보였다는 것으로써 윤이상의 이름은 음악사에 새겨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야노 토오루는 윤이상 선생님의 음악적 특징을 ‘주요음’이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는데, 이것에 대해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윤  가볍게 차나 한잔할까 해서 왔는데 갑자기 음악 강의를 하게 됐군요, 하하. 한국 사람이면 가야금의 농현에 대해 잘 아실 겁니다. 음의 떨림을 통해 긴장감과 여운, 가락과 가락 사이의 색다른 운치를 느끼게 해주는 기법 아니겠소? 다성 화음의 체계인 서양의 가락에 비해 동아시아 음악은 단음 체계로 이루어져 있는 게 특징이지요. 하지만, 우리 음악에서는 한 음이 주제를 이끌어가면서도 농현과 같은 변화를 통해 여백의 미를 창출합니다. 나는 서베를린 음악대학에서 쇤베르크의 12음기법을 공부했는데, 어느 날 보리스 블라허 교수가 내게 그러더군. “윤! 당신은 한국 사람이니 동아시아 음악 전통의 뿌리를 더 연구해 보시오. 그것을 12음기법과 접목시키면 당신만의 독창성이 드러날 거요.”라고 말이오. 나는 그 말에 깊은 감명을 받았소. 내가 신진예술가들이 선망하는 다름슈타트에서〈일곱 악기를 위한 음악〉으로 입지를 굳힌 것도 따지고 보면 블라허 교수의 조언 덕분이었소. 사실, 그보다 2년 전쯤 다름슈타트에서 존 케이지를 만난 것도 내게는 큰 행운이었지. 거기서 스물일곱 살의 백남준을 만난 것도 무척 반가운 일이었소. 하지만, 존 케이지를 비롯한 급진적인 음악가들의 온갖 기행과 현란한 퍼포먼스를 보면서 나는 속으로 외쳤소. “나는 이들과 다른, 나만의 음악을 할 것이다.”라고 말이오. 작곡을 거듭하는 동안 나는 하나의 음(音)을 통해 주제를 이끌어가는 법을 연구했소. 여러 음들이 한덩어리가 되어서 주제의식을 밀고 나아가게 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인데, 그것이 바로 주요음이오. 주제의식을 지닌 음의 무리가 주요음을 이루고 있기에, 그것은 단선 음향이 아닌 복합 음향으로 존재하게 되지요. 따라서, 나의 주요음 개념은 한국 전통음악과도 구별되며, 서양의 음악 어법과도 전혀 다른 형태를 띠게 되는 겁니다.

 박  음악 강의는 좀 어렵네요. 선생님은 1969년 독일로 추방당하신 뒤 활발한 작곡 활동을 하셨는데, 어느 날부터인가 해외 민주화운동의 선봉에 서게 되셨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윤  한국에서 추방당할 때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이 나를 협박하더군. 동백림사건에 대해 함구하지 않으면 통영의 일가친척이나 지인들이 무사하지 못할 거라고. 한동안 두려움을 떨칠 수가 없었소. 그렇게 침묵 속에서 세월이 흐르던 중 1973년 도쿄에서 김대중 납치사건이 터졌소. 그때 퍼뜩 떠오른 일이 있었소. 사실, 내가 풀려난 것은 전 세계의 음악인들이 한국 정부를 향해 나의 석방운동을 벌여준 덕분 아니겠소? 나는 그분들로부터 은혜를 입었는데, 불의를 보고도 입을 다물고 있다면 배은망덕한 일이 되겠지. 나는 곧장 일본으로 가서 김대중 석방운동을 벌였소. 그때 일을 두고 루이제 린저 여사가 말하더군. “동백림사건은 당신을 정치적으로 눈을 뜨게 해주었어요.” 하고 말이오. 맞는 말이오. 나는 일본 유학 시절 일제와 싸우기 위해 무사시노 숲에서 유격 훈련도 했고, 귀국한 뒤에는 통영의 한 무인도에서 비밀조직에 가담해 항일운동도 했소. 한글로 된 악보를 소지하고 있다는 이유로 일경에 체포되어 투옥된 경험도 있었소. 그렇지만, 독일 체류 시절에는 12음기법을 체화하고 독창적인 음악을 창조하기 위해 오로지 음악만을 위해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오. 그런 내가 동백림사건을 겪으면서 정치적으로 다시 각성한 것이오. 김대중 납치사건을 계기로 더불어서 김지하 석방운동도 벌였고, 유신체제의 폭압성을 서방 세계에 알리면서 민주화운동의 한복판으로 뛰어들었소. 물론, 음악 작업까지 병행하는 고된 나날의 연속이었지만, 보람도 무척 컸소.

 박  해외 민주화운동에 매진하는 바쁜 가운데에서도 선생님은 유럽에서 무려 150여 곡에 달하는 곡을 쓰셨습니다. 실내악곡, 관현악곡, 칸타타, 교향곡 등 다양한 영역의 작곡 가운데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첼로와 관현악을 위한 협주곡〉이 아닌가 합니다. 언젠가 선생님은 “첼로는 바로 나 자신을 상징한다.”고 말씀하신 적도 있었지요. 음악학자 홍은미는 이에 대해 “첼로는 윤이상 그 자신이고 관현악은 그를 둘러싼 환경”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또한 음악학자 우테 헨즐러는 “1976년에 작곡된 첼로 협주곡은 윤이상의 기악 협주곡의 작곡 개시를 알리는 신호탄”이라고 말했고, 음악학자 김용환은 이 곡을 가리켜 “지금까지와는 다른 하나의 작곡적 결단”이라고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이런 평가에 대해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윤  다들 일리 있는 말씀입니다. 나는 이 곡을 쓰면서 첼로를 나 자신으로 의인화했습니다. 오케스트라는 나를 둘러싼 환경과 상황으로 구성했지요. 오직 솔로를 맡은 첼로 한 대만이 무대 맨 앞에서 오케스트라의 압도적인 음향에 맞설 뿐입니다. 3악장 내내 오케스트라가 극한의 긴장과 갈등을 연출하는데, 첼로는 카덴차를 연주할 때 거문고의 술대로 피치카토를 표현하면서 위기 상황에서 벗어나려는 듯한 몸부림을 치게 됩니다. 첼로는 천상의 음인 A(라)에 끝내 오르지 못하고 지상의 음인 G(솔)에서 G# 사이를 비틀댑니다. 나의 어머니는 피 흘리는 용이 지리산 능선을 넘지 못하고 비틀거리는 태몽을 꾼 적이 있었소. 그것이 내 운명의 복선이었는지, 독일에 있던 나는 어느 날 갑자기 한국의 독방에 갇혀 신음하게 되었지요. 다시, 첼로 협주곡 이야기로 돌아갑시다. G#에서 머물며 모든 것이 끝났는가 싶을 때, 홀연 트럼펫 소리가 들립니다. 트럼펫의 맑고 힘찬 소리가 A음으로 뻗어나갑니다. 마침내 지상에서 천상으로 올라가는 소리이지요. 첼로 협주곡에는 나의 불행한 인생의 흐름이 펼쳐집니다. 그것은 우리나라의 파란만장한 현대사와 겹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그런 면에서, 이 곡의 맥점을 잘 짚어낸 음악학자들의 견해에 이의를 달지 않겠습니다.

 박  선생님께서는 생전에 그토록 그리워하던 고향에 가고자 했으나 당시 정권의 방해로 인해 귀국이 좌절된 채 베를린 땅에 묻히셨습니다. 그러다가, 2018년 유해로나마 통영 땅에 안장되셨는데, 소회를 들려주시겠습니까?

 윤  꿈에서도 보고 싶던 통영에 터를 잡고 보니, 만감이 교차하더군요. 날마다 쪽빛 바다를 바라볼 수 있어서 더할 나위 없이 푸근한 마음입니다. 아참, 시간이 된다면 통영국제음악당에서 열리는 국제음악제를 꼭 감상해 보길 바랍니다. 혹시, 거기 양지바른 곳에서 산책하는 나를 만날지도 모르겠구려. 이제 가봐야겠소. 안녕!

 박  선생님, 이렇게 빨리 작별하게 되어서 아쉽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다시 한 번 뵙고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통영국제음악당 윤이상추모지(Ⓒ통영국제음악재단)    

박선욱
시인, 평전 작가, 1959년생
시집 『회색빛 베어지다』 『눈물의 깊이』 『세상의 출구』 『다시 불러보는 벗들』 『그때 이후』, 소설 『조선의 별빛: 홍대용』, 평전 『윤이상 평전: 거장의 귀환』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