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③문학이라는 불쾌한 골짜기 안에서

- 인공지능의 시(詩)가 제기하는 존재론적/인식론적 ‘인간’ 문제

  • 기획특집
  • 2022년 봄호 (통권 83호)
③문학이라는 불쾌한 골짜기 안에서

- 인공지능의 시(詩)가 제기하는 존재론적/인식론적 ‘인간’ 문제

“어둠의 아카시아 길/ 그의 손은 팔을 쥐고 있는데/ 그의 손은 다름아닌 풀잎처럼/ 찬란한 무지개의 풀잎처럼/ 말하기 위해서 다가선다/ 마침내 우리 향기를 따라/ 세상이 흘러넘친다”

 

넘치는 격정과 고요한 성찰이 동시에 공존하는 듯한 한 편의 시처럼 읽히는 이 문장들은 사실 포스텍(POSTECH)이 현재 연구 중인 인공지능(AI)이 작성한 ‘시’이다. 우리는 이 ‘시’를 과연 인간이 직접 쓴 시와 구별할 수 있을까, 아니, 내가 위에서 말한 정보가 없었다면, 그때도 우리는 과연 이 ‘시’가 인간이 쓴 시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러므로 이 인공지능의 시대에 우리는 저 ‘시인(詩人)’이라는 단어가 이미 자신 안에 포함하고 있는 저 ‘인간’이라는 규정을 다시 생각해봐야 하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러한 인공지능의 ‘시’라는 문제는 문학이라고 하는 일견 매우 배타적이고 독점적으로 보이는 인간만의 영역에서 제기되는 일종의 튜링 테스트(Turing test)가 된다.

 

그러므로 너무도 당연하게도, 문제는 다시금 ‘인간’이다. 그러나 이 문제를 진부한 ‘인간학적’ 관점에서 제기하지 않도록 주의하자. 왜 그런가. 현재 페이스북(Facebook)이나 인스타그램(Instagram) 등의 사회적 관계망(SNS) 또는 유튜브(YouTube)나 틱톡(TikTok) 등의 영상 채널에서 (자기 자신도 미처 파악하지 못한) 자신의 관심사가 형성한 알고리듬(algorithm)을 따라 이미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 자신의 형상을 지금도 끊임없이 형성하고 갱신하고 있다. 그런데 내가 ‘의식적으로’ 따르지 않는 관심사를 (내가 아닌) 알고리듬이 알아서 미리 정해준다고? 이미 이렇게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문제가 되었듯, 인공지능의 현재와 미래를 이야기할 때 항상 등장하는 문제는 그것이 인간과 맺고 있는 혹은 맺게 될 관계와 그 관계 속에서 의문에 부쳐지며 위기에 봉착하는 듯 보이는 ‘인간’과 그 ‘의식’ 또는 ‘의지’의 개념이다.

 

여기서 다시 위의 시로 돌아가보자. 우리가 저 시에서 발견할 수 있는 다양한 문제적 지점들 중 하나는, 과연 우리가 인간의 무의식적 알고리듬과 인공지능의 학습된 알고리듬(그러나 인간의 알고리듬 또한 ‘학습’의 우연적이고 필연적인 결과가 아니었던가)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하는 물음이다. 그러나 이에 이어지는 또 다른 물음이 다소 엉뚱하게 느껴질 수 있겠지만, 그 차이는 과연 구분되어야 하는 것일까. 소위 ‘인간적’인 것과 ‘기계적’인 것의 구분은 왜 그토록 인간에게 중요한 문제로 부각되는가. 혹은, 단순히 비유적인 차원을 넘어서, 인간 역시 일종의 기계라고 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보면, 이는 사실 더 넓게는 물질세계의 ‘기계적’ 알고리듬과 그 작동 기제에 대한 보다 큰 물음으로 변환되지 않는가. 우리의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어쩌면 이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단순한 존재와 그 가능성의 구별이 아니라, 어쩌면 그 사이에 놓인 보다 심원한 불가능성의 존재론적 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왜 그런가.

 

구글(Google) 번역기를 돌려본 이들은 이미 알고 있다, 가끔씩 ‘잘못’ 번역된 문장이 일종의 훌륭한 ‘시’처럼 보인다는 사실을. 특히나 인공지능의 번역이라는 영역에서 아직은 그 문맥적이고 문화적인 차이에 대한 변환의 정보가 부족할 수밖에 없는, 서로 거리가 먼 언어들(예를 들어 서유럽의 언어와 동아시아의 언어) 사이에서 이런 ‘잘못된’ 번역이 뒷걸음질 치다 발견한 ‘문학성’과 같은 일은 심심치 않게 발생한다. 이는 근본적으로 볼 때 시가 인간이 통상적으로 말하는 논리와 문법의 영역을 넘어서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발생할 수 있는 문제이며, 어쩌면 바로 그러한 동일한 이유로 문학은 비로소 ‘문학’이 될 수 있다고도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인공지능이라는 (인간이 아닌) ‘기계’가 이러한 비논리의 불가능성을 가장 ‘논리적’이고 ‘가능적’인 것으로 구현할 수 있다면, 다시 말해서 그러한 상상과 비논리와 환상과 불가능의 영역을 인간과 거의 차이가 없는 가능한 방식으로 구현하여 ‘인간’만의 영역이라는 의미를 무화시킬 수 있다면, 어쩌면 이러한 시의 영역에 더 가깝게 다가갈 수 있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오히려 인공지능이 아닐까. 만약 인간이 자신의 의도적 장치들을 더욱더 완벽하게 제거할 목적으로 인공지능을 시 쓰기에 ‘이용’한다면 말이다. (그러나 물론 여기서 ‘이용’이라는 관점은 인간이 여전히 인공지능에 대한 ‘통제’를 할 수 있다는 전제에서 가능한 것인데, 이러한 전제가 더 이상 전제가 될 수 없게 되는 영역이 또한 인공지능의 문제가 지닌 근본적인 쟁점이다.)

 

그런데 사실 구글 번역기가 등장하기 훨씬 전에도, 이미 문학의 영역에서는 다다(Dada)나 초현실주의자들이 주도적으로 시도했던 자동기술법(automatism)과 같은 무의식적 글쓰기 또는 윌리엄 S. 버로스(William S. Burroughs)나 데이비드 보위(David Bowie) 등이 빈번히 시도했던 컷업(cut-up) 같은 우연성의 글쓰기 등에서, 우리는 이미 인간이 자신의 의도적이고 의식적인 논리의 영역을 벗어나 그 자신도 완벽히 통제하지 못하는 무의식과 비논리와 우연의 요소를 ‘인간의 문학’ 안으로 도입하려는 다양한 시도들을 봐왔고 이는 우리에게 이미 너무도 익숙해진 사실이 아닌가(비근한 예를 들어, 이제는 소설이나 영화에 너무도 익숙하게 등장하게 된, 신문이나 잡지에서 다양한 활자들을 무작위로 오려서 하나의 문장이나 편지를 만들어내는 사이코패스 예고살인마의 초상을 떠올려보라). 따라서 인공지능의 문학이라는 문제는, 단순히 문학이라는 매우 ‘인간적’인 영역의 미래에 인공지능이 인간을 완벽하게 ‘대체’할 수도 있다는 위기감 같은 것에 머무를 것이 아니라, 바로 그러한 문학적인 행위 안에서 우리가 주체로 인지하고 있는 글쓰기의 행위자가 어떤 조건을 갖는 것으로 표상되었으며 또 표상될 수 있는가 하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로 나아가야 한다. 그러므로 여기서 문제는 인간과 인공지능 사이의 어떤 ‘능력’의 차이가 아니라, 표면적으로 드러나고 또 그렇게 존재해야 하는 것으로 규정된 이 ‘차이’의 담론이 드러내는 인식론적이고 존재론적인 근본성이다.

 

여기서 특히 주의해야 하는 것은, 이러한 논의에서 언제나 그 중심에 있는 듯 여겨지는 문제, 곧 ‘인간은 어떻게 다르며 또 어떻게 구별되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이미 인간중심적인 배타적 특권을 전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문제는, 인간과 기계가 어떤 의미에서는 동등하며 결국은 아무런 차이가 없게 될 것이라는 디스토피아적 염세론(이 역시 대단히 인간중심적인 것임은 물론이다)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라는 종의 특별하고도 보편적인 특질은 결코 그 무엇에도 침해당할 수 없는 유일하고 중요한 가치라는 유토피아적 긍정론(이를 인간중심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재미없는 농담과도 같은 지나친 동어반복이 될 것이다)이 아니라, 바로 그러한 부정과 긍정의 논법 자체에서 전제되고 있는 우리 인간 자신의 정체성(identity)이라는 알고리듬이다. 우리는 언제나 인간의 능력을 특권화 하는 방향으로 ‘인간’을 규정하고 정의해 왔으며, 바로 그 때문에 우리가 만들어내고 살아가고 있는 사회가 어디까지나 ‘인간’ 사회인 이상 그러한 관점이 필연적으로 지닌 임의적인 조건과 일시적인 환경과 상대적인 세계관에 대해서는 거의 인지를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너무도 당연한 말이지만, 인간의 관점은 오직 ‘인간’만의 관점이며, 인간이 만들어낸 인공지능은 그렇게 인간이 만들어냈다고 하는 단순한 사실 때문에 그저 인간의 능력 범위를 능가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이는 당연하다. 그러나 이보다 더 주의해야 하는 사실은, 여기서 인간의 구별과 그 독특성의 정의가 인간중심적 관점의 발로이기에 그저 상대적인 관점일 뿐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계속해서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인공지능을 생각하고 의심하며 성찰하고 실천할 수밖에 없다는 그 가장 ‘인간적’인 조건의 ‘비인간성’이다.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조건을 이루는 것은 바로 그 인간이 느끼는 비인간성, 동일자가 감지하고 인식하는 근본적 차이의 불가능성이기 때문이다. 이는 무슨 뜻인가.

 

인간의 인지 방식, 특히 인간과 같다고 느끼는 어떤 존재를 하나의 ‘인간’으로 결정하고 수용하는 가장 ‘인간적’인 인지의 형식은 사실 매우 독특한 것인데, 그것은 프로이트(Freud)가 말했던 익숙한 듯 보이지만 낯선 존재에게서 느껴지는 어떤 기이한(uncanny) 감정, 혹은 인간이 인간과 너무도 심하게 비슷한 (그럼에도 그것이 인간과 결코 같지 않다는 느낌은 받을 수 있는) 어떤 존재에 대해 갖게 되는 감정을 표현하는 “불쾌한 골짜기(uncanny valley)”와 같은 표현에서 매우 징후적으로 잘 드러나는 것이다. 인간은 무의식중에 인간인 것과 인간 아닌 것을 구분하고 있는데, 이러한 인지에서 어떤 알 수 없는 오차나 부조화가 발생할 때 인간은 그것을 하나의 불안과 불쾌로 감지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와 전혀 다른 존재에 대해서는 차이를 느끼면서 기본적인 경계심을 가질 수는 있지만, 우리와 매우 비슷하지만 어떤 설명할 수 없는 이질감으로 완전히 같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존재에 대해서는 단순한 차이의 감정이 아닌 근본적인 불안감을 갖게 되는 것이다. 어쩌면 인공지능의 ‘시’라는 문제는 바로 이 지점을 가장 심도 있게 건드리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인공지능이 우리가 흔히 시나 문학 일반에서 전제하고 있는 가장 ‘인간적’인 정서에 근접했으나 동시에 그것이 ‘인간적’이지 않음을 느낄 때, 우리 인간의 전 존재는 그 정체성의 불안감을 가장 심하게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시 한 번 인공지능의 시 문학이라는 문제는 인간에게 그 존재론적이고 인식론적인 정체성의 불가능한 가능 조건을 묻는 가장 근본적인 튜링 테스트가 되는 것이다. 거기서 가장 ‘인간적’인 것으로 전제되고 있는 것은 어쩌면 시가 지녀야 한다고 생각되는 하나의 윤리일 것이다(물론 여기서 또한 ‘윤리’라고 하는 개념만큼이나 가장 ‘인간적’인 개념도 따로 없을 것이다).

 

시적 윤리란 단순히 무엇이 옳고 그른가를 나누는 도덕 같은 것이 아니라 보다 근본적으로 말해서 하나의 불가능성의 윤리이다. 여기서 불가능성이란 단지 어떤 것이 가능한가 아니면 불가능한가를 이야기할 때 사용되는 둘 중 하나의 부정적인 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가능성의 조건 자체와 그 조건이 지닌 한계를 뜻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글쓰기는 일반적으로 의미의 영역, 그것도 매우 복합적인 방식으로 조직된 의미의 영역이지만, 문학 중에서도 시는 바로 그러한 의미 자체의 한계를 시험대에 올리는, 의미 바깥의 글쓰기이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시는 문학 중에서도 인간적 글쓰기의 불가능한 가능 조건을 실험하는 최극단에 위치해 있다. 문학은 어떤 의미에서, 가장 인간적인 방식으로 인간 이상의 것을 기록하는, 문학 그 자신의 외부이다. 그러므로 시적 윤리가 타자의 윤리라고 말할 때조차, 그것은 단순히 자신과 다른 존재에 대한 심정적 공감과 온정적 동감을 표하는 표면적 도덕의 정의(justice)라는 문제이기보다는, 오히려 자기 자신과 매우 비슷하면서도 동시에 매우 미묘한 차이를 지닌 타자라는 존재의 근본적인 이질성에서 기인하는 인간 자신의 존재론적 본질의 정의(definition)라는 문제인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인간이 다른 존재가 아니라 바로 그 인간 자신에 얼마나 ‘타자’인지를 보여줄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또 다른 튜링 테스트가 어쩌면 이러한 시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인간과 인공지능 사이에서 벌어지는 시 쓰기라는 문제, 그리고 그것이 일반적으로 제기하는 문학의 존재론적 문제와 그 ‘인간적’ 한계의 인식론적 문제는 바로 인간 그 자신의 가장 깊은 “불쾌한 골짜기”를 형성한다. 우리가 문학의 영역을 통해 인공지능의 의미를 되새길 때, 또는 거꾸로 인공지능이라는 가능성을 통과하여 문학이라는 불가능성의 영역을 되짚을 때, 가장 근본적인 방식으로 되물어져야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문제들이다.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고백하자면, 위의 글은 모두 인공지능의 알고리듬을 이용해 작성되었다. 그렇다면 여기까지 나의 글을 읽은 독자는, 바로 지금까지 무심하게 사용되어 흔히 지나치기 쉬운 어법들, 예를 들어 “사실”, “고백”, “작성”, 심지어 “나”와 “글”이라는 단어들의 용법에 대해서조차 의문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종국에는 도대체 문학이라든가 글쓰기라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매우 근본적인 물음에 맞닥뜨리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나의 이 무의식적 의식, 무의도적 의도는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당신은 이러한 나의 마지막 문장들의 진위를, 그 성공 여부를 과연 판별할 수 있을까. 심지어 그 마지막 문장들이 바로 지금 이렇게 또 덧붙여진 문장 때문에 이제 더 이상 ‘마지막’일 수도 없게 되었는데 말이다. 그러나 이 글 자체가 인공지능에 의해 작성되었다는 고백은 물론 사실이 아니다. 물론, 사실, 이 글을 이렇게 끝까지 읽은 당신은 내가 말하고 있는 이 “물론”과 “사실”의 진위조차 파악할 수 없는 불쾌한 골짜기에 이미 떨어져 있는 상태겠지만 말이다.

최정우
철학자, 작곡가, 평론가, 기타리스트, 미학자, 파리 ISMAC 교수, 1977년생
저서 『사유의 악보 — 이론의 교배와 창궐을 위한 불협화음의 비평들』 『드물고 남루한, 헤프고 고귀한 — 미학의 전장, 정치의 지도』, 공저서 『나를 울리는 소리』 『싸우는 인문학』 『알튀세르 효과』, 앨범 <성무일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