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계절의 문학
날개 펴는 K-문학, 그 현장에서는……

  • 이 계절의 문학
  • 2022년 여름호 (통권 84호)
날개 펴는 K-문학, 그 현장에서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한반도가 분단된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시인님은 시가 증오나 혐오의 벽을 허무는 데 어떤 역할을 한다고 보시는지요?” (50세 보고타 시민, 라울 아리아스 모레노)

“(시의 역할은) 없다고 봅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시의 사회적·역사적 역할이 있다고 믿습니다. ‘시’라는 장르는 사라지거나 사회적 영향력이 줄어들 수 있지만, 인간에겐 누구를 막론하고 ‘시의 마음’이라는 DNA가 있고, 공감하는 능력이 시의 마음의 요체겠지요.” (이문재 시인)

 

지난 4월 20일(현지시간) 콜롬비아 보고타시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도서관 강당에서 열린 한국문학 선집(앤솔러지) 출간기념회는 150여 청중의 열띤 호응으로 뜨거웠다. 콜롬비아 보고타 국제도서전(4월 19일~5월 2일)의 일환으로 열린 이날 행사는 은희경 작가와 이문재 시인에 대한 관심으로 예정 시간을 30분 가량 넘긴 2시간 가까이 진행됐다. 청중들은 앤솔러지에 실린 은 작가의 단편 소설 「우리는 왜 얼마 동안 어디에」와 이 시인의 시 「끝이 시작되었다」에 관심을 보이며 ‘민주화 세대’인 두 문인에게 한국 문학과 한국의 민주화에 대해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은 작가의 사인을 받고자 줄을 선 한 콜롬비아 여고생은 필자에게 “한국 드라마와 K-팝 이외에도 질서 있어 보이는 한국의 이미지가 좋다”며 한국 문학(K-문학)에 대한 관심을 드러냈다.

 

보고타 시 한국문학 앤솔러지 출간 간담회   

 

콜롬비아 보고타 시에서 발간한 한국문학선집(앤솔러지)

 

보고타 국제도서전 콜롬비아 대형서점 파나메리카나 전시구역에서 발견한 손원평 작가의 소설 『아몬드』 스페인어판  

국제도서전이 열린 콜롬비아 보고타 국제비즈니스 및 전시센터(Corferias)에서도 한국은 돋보였다. 콜롬비아 대형서점 파나메리카나 전시구역에는 손원평 작가의 소설 『아몬드』 스페인어판이 진열대 상단에 전시돼 있었다. 책을 구경하던 한 공무원은 “넷플릭스로 <오징어게임>을 재미있게 봤고, 한국 인기 드라마의 원작 소설이 나오면 사보고 싶다”고 말했다.

이는 영화·드라마·대중음악이 중심이던 한류의 흐름이 K-문학으로도 옮겨오고 있다는 방증이다. 대산문화재단과 한국문학번역원에 따르면 이 두 기관으로부터 지원을 받아 해외에서 번역 출간한 한국 문학 작품은 2011년 68건에서 지난해 190건으로 2.8배 수준으로 늘었다. 번역 출간 지원 사업은 사실상 해당 작품에 대한 해외 수요를 반영한다. 올해 들어서도 신경숙 작가의 소설 『엄마를 부탁해』 중국어판과 『바이올렛』 영어(미국)판, 정세랑 작가의 『시선으로부터』 일본어판, 정유정 작가의 『종의 기원』 아랍어판이 잇달아 현지 출판사에서 번역 출간됐다.

올해 봄은 국내 작가들의 해외 수상도 돋보인 시기였다. 정보라 작가의 『저주 토끼』가 부커상 국제 부문 최종 후보에 올랐고, 박상영 작가의 『대도시의 사랑법』은 이 부문 1차 후보에 이름을 올렸다.

일본에서는 지난해 쇼덴사에서 출간된 손원평 작가의 『서른의 반격』이 지난 4월 일본 서점대상 번역 소설 부문 1위를 차지했다.

2004년 제정된 서점대상은 인터넷 서점을 포함한 일본 전국의 주요 서점 직원들이 직접 투표해 선정한다. 손 작가는 2020년 『아몬드』에 이어 『서른의 반격』으로 두 번째 상을 탄 셈이다.

 체코에서는 지난 2월 김금숙 작가의 그래픽노블 『풀』이 뮤리엘 만화상 최우수 번역 부문을 차지했다. 한국 그래픽노블이 이 상을 받은 것은 올해가 처음이다. 3월에 이수지 작가가 ‘어린이책의 노벨문학상’으로 불리는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상 일러스트레이터 부문을 수상한 것도 빼놓을 수 없다.
 10여 년 전과 비교하면 상전벽해를 실감한다. 무엇보다 2016년 한강 작가의 소설 『채식주의자』가 세계 3대 문학상의 하나로 꼽히는 부커상(당시는 맨부커상) 국제 부문을 받은 이후 한국 문학에 대한 인지도가 달라졌음을 보여준다.

 최근 몇 년간 대세를 이룬 페미니즘이나 SF 등의 시대적 문화 흐름도 영향을 준 것으로 분석된다. 일상 속 여성에 대한 차별을 다룬 조남주 작가의 『82년생 김지영』이 2020년까지 10개 언어권에서 30만 부 이상 판매됐고, 일본에서는 2018년 출간 이후 20만 부 이상의 판매고를 기록 중이다. 이경수 중앙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한국어를 공부하러 오는 외국 출신 유학생들에게 최근 읽은 한국 소설을 물어보면 『82년생 김지영』이 다수를 이룬다”며 “젊은 작가들을 중심으로 페미니즘, 퀴어, 기후위기 등 지구인으로서의 공감할 수 있는 다양한 문제의식이 발현되고 있다”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문학 한류가 이제 도입기에서 성숙기로 본격 진입한다는 신호가 아닐까.

 물론 과제도 남아있다. 콜롬비아 학생의 말에서 보듯 K-드라마와 영화에 대한 관심이 문학으로 옮겨왔지만, 아직 K-문학 독자층은 마니아층 위주로 협소하다. 이를 위해서는 좋은 작가의 작품을 발굴해 번역할 우수한 해외 번역 전문가 양성이 필수다.

주요 작가의 브랜드를 구축하는 작업도 필요하다. 일본에서 손원평 작가의 『아몬드』에 이어 『서른의 반격』이 서점대상을 차지하면서 손 작가를 꾸준히 신뢰해온 현지 출판사 쇼덴사의 역할이 주목받았다. 쇼덴사에서 주기적으로 손 작가 작품의 판매 부수, 판권 판매 정보 등을 확보한 뒤 작가의 다른 도서를 출간한 사례를 보면, 지속성 있는 마케팅과 작가의 자체 브랜드 구축이 시급하다. 드라마나 영화와 달리 문학을 소개하는 경로는 여전히 한정적이다. K-문학의 본격적인 도약을 앞두고 출판문화계의 혁신을 기대해 본다.

하종훈
서울신문 문화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