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20세기 아이

  • 단편소설
  • 2022년 여름호 (통권 84호)
20세기 아이

세미는 한쪽 어깨에 책가방을 메고 조심스럽게 방을 나온다.

오늘부터 새로 일을 나간다던 엄마는 거실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 잠들어 있다. 세미는 찌그러진 맥주캔과 귤껍질, 과자 포장지가 널브러진 탁자에서 천 원짜리 지폐 한 장과 오백 원짜리 동전 두 개를 골라낸 다음 소리 나지 않게 현관을 빠져나온다.

집 밖으로 나오자 오후 두 시를 넘긴 햇살이 머리 위로 쏟아진다.

이 집을 에워싸고 죽일 듯이 위협하던 한파는 물러간 것처럼 보인다. 보일러가 얼고, 수도가 터지고, 며칠간 씻지도 못하고, 추위에 떨며 잠들어야 했던 끔찍한 밤을 더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할아버지와 엄마, 언니와 세미까지. 네 사람이 한기가 이는 거실에 모여 아직 오지도 않은 내일을 원망하는 시간도 당분간은 없을 듯하다.

진짜 이렇게 살아서 뭐 하니, 이게 사는 거야? 차라리 죽는 게 나아. 나도 불쌍하고, 우리 주미, 우리 세미도 불쌍하고. 아부지는 지금 죽어도 여한 없지? 하고 싶은 거 다 하면서 살았잖아. 여한이 있으면 안 되지. 진짜 그럼 안 되는 거야.

술에 취해 아무 말이나 하는 엄마를 견디는 일도,

엄마, 또 시작이야? 돌았어? 뭐 만날 다 같이 죽재. 죽고 싶으면 엄마 혼자 죽어. 술이나 깨고 죽으라고.

그런 엄마가 무서워서 자꾸 더 심한 말을 내뱉는 언니를 지켜보는 일도,

그만들 해라. 이번 주에 틀림없이 주인 양반이 한번 오겠다고 했으니까. 이번엔 틀림없이 오겠지. 정 안 되면 내가 손보면 돼. 날이 좀 풀리면 옥상부터 손보고 보일러도 그때 고치면 된다.

그때마다 용서를 구하듯 고개를 숙이는 할아버지를 모른 척하는 일도, 한동안은 없을 것 같다.

세미는 폐타이어와 드럼통, 잡동사니가 쌓여 있는 마당 한쪽에서 숨겨놓은 기다란 장화를 꺼낸다. 그런 뒤엔 기다란 목을 접어 가방에 한 짝씩 담는다. 그러는 동안에도 집안은 고요하기만 하다. 세미는 마당을 지나 골목으로 나온다. 그러곤 울긋불긋한 등산복을 입은 사람들로 붐비는 등산로 쪽이 아니라 오가는 사람이 드물어서 버려진 길이나 다름없는 은목다리 쪽으로 걷기 시작한다. 지난해 튼튼한 울타리와 나무 테크로 정비한 등산로는 근사한 산책로로 탈바꿈해서 20분 남짓이면 아파트 단지에 닿고, 거길 통과하면 곧장 시장 입구가 나오지만 그것 말고는 다른 이점이 없는 탓이다.

세미는 기다란 나무 작대기 하나를 주워들고 자그마한 돌멩이를 걷어차며 걷는다. 양쪽으로 펼쳐진 빈 들판의 풍경이 성큼성큼 가까워진다. 고개를 돌릴 때마다 비닐하우스를 휘감은 비닐이 요란하게 펄럭거리고 새들이 한꺼번에 날아오른다. 세미는 나무 작대기로 겨우내 바짝 말라버린 길가 풀숲을 뒤적거린다. 오래도록 주인 없이 방치된 집들을 지나칠 때는 대담하게 대문 너머로 고개를 디밀고 내부를 살짝 엿보기까지 한다.

세미가 지금보다 더 어렸을 때, 부모님과 이따금 들렀던 동네는 지금과 달랐다. 적어도 사방이 이처럼 고요하지는 않았다. 아직 이곳에 사는 사람이 있고, 죽어도 이곳을 떠나지 않겠다는 사람도 있지만, 자신과 가족들이 거기에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하면 세미는 속이 상한다.

돌아볼 때마다 집은 조금씩 더 작아진다. 이제 저 집엔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자신을 반겨주던 순간 같은 건 남아 있지 않은 것 같다. 마당 한쪽에 숯불을 피우고 고기를 굽던 오후도, 빨갛게 날리는 불티를 올려다보던 저녁도, 먹음직스러운 냄새가 자욱하던 아침도, 집은 다 잊은 것 같다.

얘가 왜 이래. 그만 좀 보채. 몇 달만 있을 거라고 엄마가 말했잖아.

처음 이곳으로 이사 올 때 그렇게 약속했던 엄마는 여름이 가고, 가을이 가고, 겨울이 다 끝나가는 데도 아무런 말이 없다. 더는 어떤 대답도 하지 않겠다고 작정한 사람처럼 침묵을 지킨다. 할아버지도, 언니도. 가끔 길에서 마주치는 낯선 어른들도 하나 같이 말하는 법을 잃은 사람들 같다.

세미는 이곳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곳은 지나치게 조용하고, 무뚝뚝하고, 불친절하고, 그래서 결국 사람들의 말문을 막아버린다는 생각 때문이다. 이곳에 남은 건 하나 마나 한 말이거나, 하지 않거나 듣지 않으면 더 좋은 말뿐이다. 이곳엔 진짜 말을 할 수 있는 사람도, 진짜 말을 들을 수 있는 사람도 없다.

세미는 자꾸만 움츠러드는 마음을 일으키고 앞을 보고 걷는다. 은목다리 앞에 이르러서는 난간에 몸을 붙이고 다리 아래를 내려다보며 천천히 걸음을 뗀다. 잡풀과 자갈, 온갖 쓰레기가 뒤엉킨 다리 아래는 물기 하나 없고, 이런 곳에 도대체 어떻게 물난리가 났다는 걸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세미는 강바닥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지난해 이 동네에 물난리가 났었다는 건 언니 주미가 알려준 것이다.

아, 진짜 홍수 나자마자 이사 왔어야 하는 건데. 좋은 건 다 주워가고 없어. 인간들, 짜증나게.

누군가 이 근방에서 쓸 만한 것을 주웠다는 소식을 들은 뒤로 언니는 매일 수색하듯 이 길을 오갔다. 훌라후프, 가죽 하네스, 매니큐어, 헬멧, 밀봉된 향초 무더기를 주운 사람도 있다고 이야기하며 언니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세미는 함께 가보자는 언니의 제안에 응한 적이 없었다. 언니가 하는 이야기들은 대체로 과장되어 있고, 부정확하며, 며칠 단위로 혹은 몇 시간 단위로 수정될 게 뻔해서였다. 경우에 따라서는 자신이 언제 그런 말을 했느냐고 발뺌을 할지도 몰랐다.

몇 주 전 이 길에서 멀쩡한 등산 스틱을 발견하지 않았더라면 세미는 언니의 말을 절대로 믿지 않았을 것이다. 어쨌든 그날 이후 조금만 손보면 되팔 수 있는 물건들이 어딘가에 남아 있을 거라는 희망이 생겼고, 그런 기대가 세미를 자꾸만 이 길로 이끌었다.

물에 젖어도 상관없는 물건, 물에 젖었지만 사용할 수 있는 물건, 사용하긴 어렵지만 흔하지 않은 물건, 흔하지 않아서 누군가 기꺼이 돈을 지불하고 구입할 만한 물건.

이 길엔 세미가 발견하고 싶은 혹은 발견할지도 모르는 물건들을 상상하는 즐거움이 있다. 그 물건들을 되팔아서 돈을 모으고, 예전 친구들을 만나러 가고, 이곳이 얼마나 형편없는 곳인지 알려주고, 반드시 돌아가겠다고 맹세하고, 마침내 원래 살던 곳으로 이사 가고, 이후에도 변치 않는 우정을 나누는. 그러니까 모든 게 원하는 대로 이뤄지는 상상을 따라가는 재미도 있다.

상상하는 건 세미가 아는 가장 쉽고 즐거운 놀이다. 이렇다 할 노력이 필요 없고, 돈도 들지 않는.

그럼에도 금세 웃음이 나는 거의 유일한 일이다. 그러나 뭐든 끝까지 상상하면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날 리 없고, 말도 안 된다는 결론에 다다르기 마련이므로 세미는 적당한 수준에서 상상을 멈출 줄도 안다.

시장 앞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을 땐 세 시가 조금 안 된 시각이다. 세미는 스마트폰 앱을 연 다음 메시지를 쓴다. 그리고 전송 버튼을 누르기 전에 저쪽에서 걸어오는 한 여자와 눈이 마주친다. 후드를 뒤집어쓰고 마스크까지 한 탓에 얼굴이 반 이상 가려져 있는데도 세미는 자신이 만나야 할 사람이 그 여자라는 걸 바로 알아차린다.

혹시 장화 사러 오셨어요?

세미가 묻고 여자가 말한다.

맞아. 장화 주인 너야? 심부름해?

여자의 말투는 어딘가 어색하고, 다시 보니 외국사람 같다. 세미는 여자의 새까만 눈썹과 까무잡잡한 이마를 빤히 올려다보며 또박또박 대답한다.

아뇨. 글은 제가 올린 거예요. 장화도 제가 파는 거고요.

세미는 정류장 벤치 위에 가방을 내려놓고 장화를 꺼낸 다음 따로 챙겨온 쇼핑백을 펼친다. 그런 후엔 주머니에서 조그마한 스티커 두 장을 꺼내 보인다. 금박을 입힌 펭귄 스티커와 폭신폭신한 별 무늬 스티커다.

이건 장화에 붙이면 예쁠 거 같아서 갖고 왔어요. 가지실래요? 제 생각엔 이쯤에 붙이면 좋을 것 같아요. 여기 얼룩이 있거든요.

여자는 스티커에는 관심이 없고 장화를 요리조리 돌려보는 데에 정신이 팔린다. 세미는 폭신한 스티커를 꼭꼭 누르며 여자의 눈치를 살핀다. 오가는 사람들이 세미와 여자를 흘끔거린다.

사진 이거 아니야. 칼라 안 맞아. 여기 자국 있어. 뭐 묻었어? 불탔어?

색깔은 원래 이 색이에요. 화면으로 보면 더 밝아 보인다고 제가 적어놨는데요. 여기 자국은 처음 살 때부터 있었어요. 이 장화는 우리 삼촌 건데 진짜 세 번밖에 안 신었어요. 세 번요. 새 거는 만원도 넘어요. 만원 넘게 줘야 한다고요.

며칠 전처럼 이번에도 허탕을 칠지 모른다는 생각이 세미의 마음을 조마조마하게 만든다. 겨우 삼천 원짜리 고물 장화를 사면서 이것저것 따지고 드는 여자에 대한 미움이 슬며시 고개를 든다. 세미는 여자의 눈을 똑바로 올려다보며 그런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한다.

아니야. 여기 바닥 더러워. 세 번 신은 거 아니야. 더 많이 신었어.

진짜예요. 제가 봤거든요.

고무장화는 몇 주 전 은목다리 근처에서 주운 것이고, 삼촌은 있지도 않지만 세미는 아무렇지도 않게 거짓말을 이어 나간다. 거의 흙더미에 파묻혀 있다시피 한 장화를 칫솔로 씻고 또 씻으며 쓸 수 있는지 없는지 꼼꼼하게 살펴본 건 사실이니까. 구멍이 났거나 망가져서 못 쓰는 것이었다면 팔려고 내놓지도 않았을 테니까. 여자는 마음을 정하지 못한 듯 장화를 내려다보며 말이 없다.

길어진 오후의 햇살이 버스정류장 안까지 밀려든다. 불이 켜진 듯 정류장 안이 환해진다. 세미는 정류장 앞에 정차했다가 출발하는 버스를 힐끔거린다. 한재 삼거리, 배일마을, 화양 주차장, 고릉 방파제. 버스 차체에 적힌 커다란 글자들이 순식간에 멀리 달아나버린다.

이거 삼촌 장화야? 진짜야?

여자가 묻고 세미는 엉뚱한 말을 한다.

근데 아줌마는 어디서 왔어요?

틀림없이 여자는 자신보다 더 먼 곳에서 왔을 테고, 그렇게 생각하자 이상한 친근감이 생겨난다. 세미는 말하고 싶다. 이곳이 얼마나 형편없는 곳인지, 이곳이 자신을 얼마나 슬프고 우울하게 만드는지. 여자에게도 자신과 비슷한 마음이 있는지, 확인하고 싶다.

아줌마, 여기 친구 있어요?

그러나 세미가 거듭 물어도 여자는 대꾸가 없다. 요리조리 장화를 살펴보는 데에만 골똘하다. 여자의 그런 모습이 세미의 눈엔 이곳의 다른 어른들과 다를 바 없다. 여자는 이미 이곳 사람이 된 것 같다.

이 장화는요. 삼촌이 저한테 주고 간 건데요. 안 사실 거면 갈게요.

결국 세미가 보란 듯 장화를 다시 가방에 넣으려고 하자 여자가 못 이긴 듯 지갑을 꺼낸다. 여자에게 삼천 원을 건네받은 뒤에야 세미는 여자에게 장화를 내어준다. 그렇게 거래가 끝이 난다.

세미는 호주머니에 든 지폐를 만지작거리며 시장 안쪽으로 걷는다. 후문을 빠져나오자 철물점 앞에 할아버지가 있다. 여느 때처럼 조그마한 접이식 테이블 앞에 앉아 도대체 누가 살까 싶은 휴대폰 케이스들을 파는 중이다. 오가는 사람들이 할아버지와 싸구려 케이스를 힐끔거리며 지나친다.

멀리 오렌지색 트럭이 보이고 경쾌한 음악 소리가 흘러나온다. 세미는 할아버지가 있는 쪽을 살피며 트럭 쪽으로 다가간다. 트럭에 설치된 커다란 전광판에 숫자와 글자가 번쩍번쩍 떠간다. 트럭 아래에선 오렌지색 조끼를 입은 사람들이 오렌지색 피켓을 흔드는 중이다. 그리고 누군가가 트럭 위로 올라와서 마이크를 쥔다. 음악 소리가 잦아들고 트럭 위에 선 사람의 목소리가 또렷해진다. 경제, 정의, 공정, 투표, 국민, 그런 단어들이 지나가던 사람들의 발길을 붙잡는다.

저도 주세요.

세미는 몰려드는 사람들을 피해 홍보지를 나눠주는 남자에게 손을 내민다. 남자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홍보지 한 장을 준다.

하나 더 주세요.

세미가 다시 손을 내민다.

두 장이나 필요가 있을까?

세미가 대답하지 않자 남자는 하는 수 없다는 듯 홍보지 한 장을 더 건네준다.

부모님께 갖다 드려라, 알았지?

세미는 오렌지색 바탕에 귀여운 강아지 사진까지 박혀 있는 홍보지가 마음에 든다고 말하지 않는다. 더 밝은 오렌지색이었다면 훨씬 좋았을 거라는 말도 하지 않는다. 어쨌든 이 홍보지로 뭔가 예쁜 걸 만들 수 있을 거라는 말도 참는다.

부모님 어디 계시니? 혼자 여기 있으면 안 된다. 저쪽으로 가거라.

결국 남자가 사람들 사이를 요리조리 누비며 홍보지를 줍고 다니는 세미에게 그렇게 경고한다. 그래도 세미가 자리를 뜨지 않자 머리를 쓰다듬는 척하며 멀리 내몬다. 세미와 눈이 마주치자 눈을 반쯤 감고 고개를 빠르게 두 번 젖는다. 그것이 다가오지 말라는 의미임을 세미는 금방 알아차린다.

세미는 철물점 쪽으로 발길을 돌린다. 할아버지는 꾸벅꾸벅 졸고 있다. 지나가던 누군가가 케이스 몇 개를 그냥 집어 가도 모를 것 같다. 세미는 잠시 할아버지를 지켜보다가 돌아선다. 그러곤 곧장 집으로 온다.

식구들이 모두 귀가한 저녁이 되어서야 세미는 할아버지에게 이렇게 물을 수 있다.

할아버지, 우리 옥상 공사는 언제 해?

무슨 공사 말이냐?

옥상 고친다고 했잖아.

아, 그래. 해야지. 날 좋을 때 얼른 해치워야지. 그나저나 요즘 허리가 시큰거려서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세미 네가 도와줄 거냐? 도와준다고 했잖아. 토요일에 부동산 아저씨 오는 거 알지? 그 전에 해야 해, 할아버지.

부동산 사장이 왜?

그때 집 보러 왔던 아줌마랑 다시 온다고 했잖아. 지우 아줌마 말이야. 이 집 살 거라고 했던 아줌마 있잖아. 잊어버렸어? 그때 어떤 언니랑 같이 왔었잖아. 나랑 놀았던 언니. 기억나지?

세미는 음악 소리가 흘러나오는 언니의 방을 흘끔거리며 목소리를 낮춘다.

요전에 왔었던 그 여자 말이냐? 그 여자는 안 살 사람이야. 살 사람이었으면 길게 말할 것도 없이 계약금부터 걸었을 거다.

이주 전 토요일 오후, 부동산 사장이 데려온 여자는 이전에 왔던 사람들과는 다른 데가 있었다. 비둘기색 차에서 부동산 사장과 함께 내린 여자는 폐타이어와 드럼통, 더 이상 쓰지 않는 잡동사니가 가득 쌓인 마당 한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머, 동백나무가 있네? 꽃피면 정말 예쁘겠어요. 왜 나무 하나가 집 전체를 화사하게 만들잖아요. 직접 심으신 거예요?

길이 험하다느니, 부지가 좁다느니, 주택이 낡았다느니, 위치가 애매하다느니 하는 불만부터 토로하지 않은 건 여자가 처음이었다. 언니는 집에 없고, 아침부터 두통이 심하다던 엄마는 현관 앞에 팔짱을 끼고 서서 말이 없었다. 마당 한가운데 뒷짐을 지고 선 할아버지도 이렇다 할 반응이 없었으므로 대답은 세미가 했다. 동백나무 쪽으로 재빨리 걸음을 옮기면서였다.

이게 동백나무인지 어떻게 아세요?

여자는 세미와 눈을 맞추며 가까이 다가왔고,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보면 알지. 빨갛게 꽃 핀 거 못 봤니?

못 봤어요. 엄마랑 언니랑 저는 여름에 이사 왔거든요. 여긴 우리 할아버지 집이에요.

그래? 그럼 조만간 볼 수 있겠구나. 동백은 봄이 되기 전에 꽃이 피거든. 꽃도 예쁘지만 향이 정말 좋아. 꽃향기 좋아하니?

세미는 여자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갔다. 여자가 입은 코트에서 좋은 냄새가 났다. 여자의 손목에서 반짝이는 팔찌가 세미의 시선을 자꾸 잡아당겼다. 아니, 그런 것보다 세미의 마음을 사로잡은 건 여자의 표정이었다. 여자의 얼굴엔 뭔가 터져 나올 듯한 조마조마한 느낌이 없었다. 엄마와 언니, 할아버지를 마주할 때마다 느껴야 했던 불안의 조짐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세미는 더 이야기하고 싶었다.

자신이 언제, 어디서, 어떤 꽃들을 보았는지, 생김새와 향기가 얼마나 달랐는지, 왜 어떤 것은 좋고, 왜 어떤 것은 싫은지. 비슷비슷해 보이는 꽃과 나무를 어떻게 구별할 수 있는지, 꽃과 나무의 이름을 누가, 언제, 어떻게 정하는지, 묻고 말하고 듣고 싶었다.

아, 여기 이 집은 어르신 두 분이 오래 사셨어요. 세입자 자주 들고 나는 것보단 훨씬 낫죠. 아무튼 자기 집처럼 정말 깨끗하게 쓰셨어요. 할머니가 참 점잖고 좋은 분이셨는데 지난해에 돌아가셨어요.

부동산 사장이 끼어드는 바람에 세미와 여자의 대화는 중단되었다. 세미는 천천히 마당을 둘러보고, 집 안으로 들어서는 사장과 여자의 뒤를 따라갔다. 여자는 부지가 큰 편이라느니, 이 가격이면 꽤 괜찮다느니, 이만하면 교통이 나쁘지 않다느니, 투자할 가치가 충분하다느니 하는 사장의 말에 귀를 기울이다가 잠깐씩 세미를 돌아보며 부드럽게 웃어주었다.

옥상으로 향하는 두 사람을 뒤따라갈 때 세미는 차량 뒷좌석에 앉은 그 애를 봤다.

회색 코트를 입은 여자애는 차창을 끝까지 내린 채 스마트폰을 보는 중이었다. 세미는 두 사람을 따라 옥상으로 올라가는 대신 그쪽으로 갔다. 분명 세미를 보았을 텐데도 여자애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근데 여기 물난리 났었다.

결국 한참 만에 세미가 그렇게 말했다.

그게 뭔데?

여자애는 잠깐 고개를 들고 세미와 눈을 맞췄다. 스마트폰에서 알록달록한 불빛이 새어 나왔고, 그 바람에 여자애의 한쪽 볼이 환해지다가 말다가 했다.

비가 엄청 많이 왔거든. 그래서 전부 다 떠내려갔어. 뉴스에서 본 적 있지 않아?

아니, 못 봤는데.

여자애는 건성으로 세미와 눈을 맞추곤 다시 스마트폰으로 고개를 떨구었다.

안 믿는구나. 보여 줄까?

그래서 세미는 불쑥 그렇게 말해버렸다.

고개를 들면 옥상 난간에 서 있는 부동산 사장과 여자가 보였다. 두 사람은 집과 마당, 그 주변을 에워싼 동네와 동네 너머 어딘가를 주시하는 중이었고, 현관 앞을 서성거리던 엄마와 할아버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세미는 보란 듯이 근처에서 나무 작대기 하나를 주워 왔고, 여자애에게 소곤거렸다.

홍수 난 거 볼래? 이리 와 봐. 보여줄게.

말없이 사라진 자신과 여자애를 찾느라 소동이 벌어진 것을 세미는 나중에 알았다. 고작 은목다리가 보이는 곳까지 갔다가 돌아왔을 뿐인데 왜 사십 분이 훌쩍 지나버렸는지, 매일 오가는 길인데 왜 자꾸 새로운 것들을 발견하게 됐는지. 대화할 줄도 모르고, 웃을 줄도 모르고, 뭔가 계속 골이 나 있는 듯한 그 애에게 왜 계속 친근하게 말을 걸게 됐는지도.

안세미, 너 말도 없이 어딜 갔다 와? 얼마나 찾았는 줄 알아? 지난번에 엄마가 분명히 말했지. 말없이 사라지면 혼난다고!

마당 밖까지 나와 있던 엄마가 소리를 질렀고, 차체에 비스듬히 몸을 기대고 서 있던 여자가 미소를 띠며 다가왔다.

어디 갔다 온 거야? 아니다, 엄마가 맞춰볼게. 너희 둘 동네 구경했구나. 송지우, 너 여기 마음에 들지? 엄마 말이 맞지?

세미와 지우가 돌아오고 나서도 부동산 사장과 여자는 한참을 더 그곳에 머물렀다. 두 사람은 집 안을 한 번 더 둘러보았고, 집 앞 진입로에 나란히 선 채로 멀리 차들이 오가는 도로 쪽을 내다보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신중한 표정으로 준비해 온 서류를 살펴보고, 스마트폰을 열고 뭔가를 검색하기도 했다. 사장이 여러 사람과 통화를 이어가는 동안 여자는 세미와 잠깐씩 눈을 맞추었다.

아줌마, 근데 이 집 마음에 드세요? 오늘 살 거예요?

차 주변을 맴돌던 세미가 물었다.

글쎄, 고민을 해봐야겠지?

만약에 사면요. 아줌마랑 언니랑 이 집으로 이사 와요?

아니, 여기서 살 건 아니고, 그냥 사두는 거야.

왜요? 여기 와서 살면 동백꽃도 매일 볼 수 있잖아요.

여자는 대답 대신 조수석에서 쿠키 하나를 꺼내주었다.

세미라고 했니? 네 덕분에 이 집이 아주 환하구나.

그 순간 세미는 투명한 포장지에 담긴 구름 모양 쿠키를 절대로 뜯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여자가 자신에게 해준 그 말을 오래 간직하고 싶어서였다.

그날, 세미는 여자가 이 집의 새로운 주인이 될 거라고 믿었다. 여자가 주인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나무의 이름을 불러주고, 처음 보는 자신에게도 근사한 말을 해주는 사람이니까. 여자가 이 집을 지금처럼 내버려 두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아니, 여자가 이곳으로 이사 오면 엄마가 이사 갈 집을 새로 알아볼 테고, 그럼 이 동네를 진짜 떠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렇다 할 말도 없이 그 사람들이 가버렸을 때 실망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

엄마, 그 아줌마 왜 그냥 간 거야? 이 집 안 산대? 왜? 너무 멀어서? 비싸대? 이 집 얼만데?

내가 집주인이니? 그걸 어떻게 알아. 들어와서 살지도 않을 인간들이 더 까탈스럽게 굴지. 그 여자가 뭐가 걱정이야. 돈 있으면 집이야 얼마든지 사지. 널린 게 집인데. 머리 아파 죽겠으니까, 말 걸지 마.

엄마는 주방으로 들어가 버렸고 할아버지가 느릿느릿 답했다.

비 오고 눈 오면 난리가 나는 이런 집을 누가 사겠나. 가격이라도 아주 싸게 내놓으면 모를까. 어림없지.

그래서 얼마 후, 그 여자가 다시 집을 보러 올 거라고, 절대 집을 비우지 말라고, 엄마가 당부했을 때 세미는 마음이 급해졌다. 토요일 오후 2시라는 걸 거듭 확인했고, 봄맞이 대청소를 해야 한다고 엄마를 졸랐다.

야, 돌았냐? 갑자기 무슨 청소야. 청소를 왜 해. 니가 집주인이냐? 니가 집 팔 거야? 엄마, 얘 진짜 돌았나 봐.

언니가 비아냥거리며 시비를 거는데도 세미는 대거리하지 않았다. 언니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니까. 집주인은 다 거기서 거기라고 여기니까. 어느 쪽이 나쁘고, 어느 쪽이 더 나쁜지 판단할 줄 모르니까. 집주인이 바뀌어야 비로소 이 집을 떠날 수 있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을 테니까.

이틀 뒤, 수요일 오후에 세미는 할아버지를 졸라 옥상으로 함께 간다.

바람은 쌀쌀하지만 해가 좋은 날이다. 선명한 청록색이었을 옥상 바닥은 전체적으로 푸르스름하고, 깨지고 갈라져서 허옇게 시멘트가 드러난 부분도 있다. 세미는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들고 와서 옥상 바닥을 쓸기 시작한다. 바람에 흩날리는 스티로폼 조각과 조그마한 시멘트 조각을 줍고 난 뒤에는 고무 대야와 화분을 옮기고, 제 몸집보다 큰 장독을 끌어내려고 애를 쓴다.

가만있어 봐라. 이걸 할 수 있으려나 모르겠다.

세미가 바쁘게 움직이는데도 할아버지는 옥상 바닥을 이리저리 오가며 꾸물거린다.

이럴 게 아니라, 돈이 들어도 업자를 부르는 게 낫지 않을까 싶다. 괜한 짓을 벌이는 거 아닌가 싶어.

바람이 불 때마다 품이 큰 바지가 홀쭉해지며 할아버지의 앙상한 다리가 도드라진다. 성긴 머리칼이 휘날리고 그때마다 할아버지의 얼굴이 울 것처럼 일그러진다. 그러나 세미는 물러설 마음이 없다. 커다란 장독 여러 개를 일 층으로 옮기고, 오래전 할아버지가 사두었던 페인트 통과 장갑, 붓과 롤러 따위를 가져온다. 그런 식으로 그만둘 마음이 없음을 분명히 한다.

할아버지, 이건 내가 열어 줄게.

할아버지의 몸놀림이 굼떠서 세미는 속이 탄다. 세미는 보란 듯 페인트 통 앞에 쪼그리고 앉는다. 결국 할아버지가 세미를 만류한다. 둬라. 다친다. 내가 할 테니까. 내려가서 대야 하나 가져와라. 걸레도 가져오고. 신문지하고 비닐봉지도 몇 개 챙겨와라.

세미는 할아버지가 말한 것들을 빠짐없이 가져온다. 할아버지는 걸레로 바닥을 대충 닦아내고 페인트 통을 연다. 코가 따가운 기름 냄새가 확 끼친다. 할아버지는 페인트 통을 기울여 물처럼 투명한 액체를 바닥에 조금 부은 다음 붓으로 대충 펴 바르기 시작한다.

할아버지, 이거 설명서 없어? 이렇게 하는 거 맞아? 저쪽도 할 거지? 전체 다 할 거야? 여기만 해? 다른 데는 안 하고?

페인트를 펴 바르는 할아버지의 손놀림이 서툴러서 세미의 마음이 조마조마해진다.

보고 심하게 깨진 데만 해야지. 이 넓은 옥상을 나 혼자서 어떻게 하겠나.

할아버지가 손을 갖다 댈 때마다 얇은 페인트 껍질 같은 것들이 계속 떨어져 나온다. 할아버지의 얼굴이 심각해진다.

가만있어 봐라. 일단은 이걸 발라보고 마를 때까지 기다려야지. 한 번에 다 되는 게 아니다. 보자, 실리콘 건을 사둔 게 있었는데. 어디 뒀나 모르겠네.

할아버지는 차분한 목소리로 세미를 다독인다. 세미가 원하는 건 실리콘이니, 우레탄이니, 방수니, 하는 설명이 아니라 이 옥상을 새것처럼 만드는 것이다. 아니, 적어도 아주 헌 것처럼은 보이지 않게 하는 것이다. 할아버지가 낀 장갑이 얼룩덜룩해진다.

할아버지, 내가 할까? 내가 해볼까?

할아버지는 말없이 금이 가고 깨진 바닥 두 곳에 투명한 액체를 펴 바른 뒤, 몸을 일으킨다. 그런 후엔 페인트 통 뚜껑을 닫고 펼쳐 놓은 것들을 정리하기 시작한다. 멀리서 음악 소리가 들린다. 세미는 몸을 일으키고 난간 쪽으로 다가간다. 다가오는 트럭이 보인다. 이번엔 오렌지색이 아니고 연보라색이다. 연보라색 조끼를 입고 연보라색 피켓을 흔드는 두 사람이 트럭 위에 있다. 길이 고르지 않아서 트럭이 계속 덜컹거리는데도 두 사람은 용케 중심을 잡고 서 있다. 전광판도, 조명도 없는 트럭은 세미가 지난번 보았던 오렌지색 트럭보다 작고 낡은 것 같다.

뭐든 하나씩 해야지. 한꺼번에 했다간 큰일 난다. 그만 내려가자.

할아버지는 트럭을 내려다보며 혀를 찬 뒤 세미에게 말한다. 세미가 몇 차례 더 졸라보지만 할아버지는 그대로 돌아선다. 난간을 잡고 계단을 내려가는 할아버지의 뒷모습이 어느새 보이지 않게 된다. 세미는 여전히 엉망인 옥상 바닥을 내려다보며 그곳에 조금 더 머무른다.

할아버지가 옥상 바닥을 완벽하게 고치지 않았다는 사실, 그건 할아버지가 안 하는 게 아니라 못한다는 사실. 그런 걸 모르지 않는데도 자꾸만 짜증이 치솟는다. 세미는 할아버지가 했던 것처럼 붓을 쥐고 아직 마르지 않은 페인트를 고르게 펴 발라본다. 덧칠할 때마다 바닥은 조금씩 나아지는 것 같지만 다시 보면 달라진 게 없다.

해가 질 무렵,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언니와 엄마가 돌아온 저녁엔 빗줄기가 굵어져서 집 안에서도 세찬 빗소리가 들릴 정도다.

할아버지가 무슨 수로 옥상을 고치겠니, 사람 불러야지. 아버지, 주인한테 연락해봤어? 왜 말이 없어, 아직까지. 진짜 사람들 너무하네.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 텔레비전을 보는 엄마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만다. 늦은 밤에 일이 끝나는 엄마가 왜 이렇게 일찍 귀가했는지 묻는 대신 세미는 잠자코 나무 창틀만 올려다본다. 물이 흘러내리는 탓에 오른쪽 창틀은 축축해진 지 오래고 시커멓게 색이 변한 창틀 새로 물이 고이는 중이다.

이렇게 비가 올 줄도 모르고 괜한 짓을 했다. 그나저나 벽 안에서 새는 거면 옥상 손보는 걸로는 소용이 없을 거야. 놔둬라. 일단은 두고 봐야지.

세미가 옥상에 올라가보자고 조르지만 할아버지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빗소리가 약 올리듯 세미의 귓가를 떠나지 않는다. 밤새 비가 내린다. 다음 날에도, 그다음 날에도. 비는 그칠 듯 그칠 듯 끈질기게 이어진다. 비는 토요일 아침이 되어서야 완전히 멎는다. 거짓말처럼 날이 갠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세미는 옥상으로 간다. 살그머니 방문을 열고 나온 뒤, 엄마가 잠들어 있는 거실 소파를 지날 때 숨을 참았다가 주방 식탁에 앉은 할아버지의 뒷모습을 지날 땐 바짝 몸을 숙인다.

옥상 바닥에 깔아둔 대형 비닐 위에 흥건하게 빗물이 고여 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비닐 나부끼는 소리가 요란하다. 세미는 비닐을 벗기며 찬찬히 옥상 바닥을 살핀다. 할아버지가 손봤던 부분은 다시금 허연 시멘트가 그대로 드러나 있다.

지금이라도 뭐든 해보면 되지 않을까. 아줌마에게 공사 중이라고 말하면 되지 않을까. 세미의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질문은 점점 더 많아지고, 세미가 답할 수 있는 질문은 하나도 없다.

세미는 난간에 상체를 기댄다. 높낮이가 거의 느껴지지 않는 주택, 잿빛에 가까운 담벼락, 무뚝뚝하기 짝이 없는 들판, 오가는 사람이 거의 없는 골목과 가느다랗게 이어진 도로, 멀리 우유갑처럼 서 있는 아파트 단지까지. 세미의 눈에 들어오는 건 아무리 봐도 애정이라고 할 만한 건 조금도 생겨나지 않는 풍경들뿐이다.

부동산 사장과 여자는 정오가 조금 넘어 도착한다. 지난번처럼 비둘기색 차가 마당 한쪽에 멈춰서고 사장이 운전석에서, 여자가 조수석에서 내린다. 엄마와 언니는 집에 없고, 현관 앞에 서 있는 할아버지는 말없이 고개만 까딱한다.

아줌마, 안녕하세요.

세미가 인사를 건네자 여자가 반갑게 알은체를 한다.

아, 그래. 너구나. 우리 지난번에 봤었지? 그동안 잘 있었니?

두 사람은 집안부터 둘러본다. 엄마가 생활하는 거실, 할아버지가 쓰는 큰방, 언니의 작은 방과 세미가 공부하는 쪽방을 살피는 여자의 얼굴이 골똘하다. 두 사람은 화장실 세면기와 변기, 주방 싱크대, 마당으로 통하는 주방 샛문까지 꼼꼼하게 확인한 뒤 밖으로 나온다.

지금 여기 짐이 많아서 그렇지, 실내는 이만하면 꽤 넓은 편이에요. 나중에 입주하실 때 새로 수리 싹 하시면 훨씬 넓게 쓰실 수 있죠. 창도 새시로 갈고 거실에 통창도 하나 내고. 그럼 뭐 새집이나 다름없어요.

사장이 말하면 여자는 고개를 끄덕이지만 탐탁지 않은 눈치다.

저 안쪽 동네는 지하수 끌어다가 쓴다는데, 여기까지는 수도가 확실히 들어오는 게 맞죠? 이 집 주인은 왜 집을 팔려고 한대요? 가지고 있으면 그래도 돈 될 텐데. 지금 팔려는 이유를 모르겠네요.

질문하는 여자의 표정이 날카로워진다. 세미가 따라다니는 걸 알면서도 여자는 세미를 돌아보지 않는다. 눈이 마주쳐도 알은체를 하거나 웃어주지 않는다. 금방이라도 꽃이 피어날 듯 붉게 봉우리가 맺힌 동백나무의 존재도 까맣게 잊은 것 같다.

아줌마, 지우 언니는 오늘 안 왔어요?

결국 참지 못하고 세미가 묻는다.

지우? 지우 이름을 기억하는구나. 지우는 못 왔어. 그런데 지우가 언니였니?

네, 근데 지우 언니는 왜 안 왔어요?

학교 갔지. 학원도 가야하고. 레슨도 있고. 너는 학교 안 가니?

우리는 다음 주부터 가요. 이번 주까지는 방학이고요.

그래. 그렇구나.

여자의 대답은 성의가 없다. 목소리에서도, 표정에서도 상냥함이라곤 느껴지지 않는다. 어느 학교에 다니는지, 학교에서 무엇을 배우는지, 심지어 몇 학년인지조차 묻지 않는다.

지우 언니한테 못 만나서 아쉽다고 전해주세요.

그래, 그럴게.

여자는 다시금 사장과의 대화에 정신이 팔린다. 세미는 계속 사장과 여자 주변을 맴돈다.

꼬마야, 어른들 이야기하잖니. 저쪽에 가 있거라.

부동산 사장이 주의를 주는데도, 할아버지가 그만하라고 고개를 젓는데도 세미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세미는 지난번처럼 여자가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주고, 다정하게 질문해 주면 좋겠다. 이곳에서는 아무에게도 기대할 수 없고, 누구에게도 들을 수 없는, 근사한 말을 한 번쯤 더 듣고 싶다.
마당을 한 바퀴 둘러본 뒤 두 사람은 옥상으로 간다. 세미도 두 사람을 따라간다. 계단을 오르는 세미의 마음이 조마조마해진다.

어르신, 여기 뭐하셨어요? 뭘 하신 거예요?

계단을 다 오르자마자 부동산 사장이 계단 아래를 향해 목소리를 높인다. 중얼거리는 듯한 할아버지의 대답은 들리지 않고, 사장의 목소리가 조금 더 커진다.

어르신, 이거 주인 알면 큰일 납니다. 이렇게 마음대로 손대면 안 돼요.

사장의 표정이 굳어진다. 옥상 바닥을 둘러보는 여자의 표정도 좋지 않다. 세미는 난간에 등을 붙이고 서서 두 사람의 눈치를 살핀다. 돌아서면 동백나무가 바로 내려다보인다. 붉게 맺힌 봉우리가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다.

방수가 제대로 안 되는 모양이네. 관리가 안 되나 봐요?

여자는 웅덩이처럼 물이 고인 바닥 여기저기를 둘러보며 묻는다. 주택은 원래 이삼 년에 한 번씩 옥상 방수를 해야 하고, 큰 비용이 드는 것은 아니며, 믿을 만한 설비 업자를 소개해주겠다는 사장의 말에도 여자의 표정은 부드러워지지 않는다.

멀리서 음악 소리가 들린다. 다시 트럭이다. 이번엔 오렌지색도 연보라색도 아니고, 도대체 무슨 색인지 알아볼 수가 없다. 트럭 위에는 피켓을 흔드는 사람 대신 커다란 현수막이 걸려 있다. 사장과 여자, 세미까지. 세 사람이 빠른 속도로 가까워지는 트럭을 지켜본다. 음악 소리가 줄어들고 말소리가 커진다. 지지직거리는 스피커 소음 속에서 선택, 개발, 특화, 추진, 그런 단어들이 튀어 올랐다가 가라앉길 반복한다.

아줌마, 근데 저기 보이세요?

그리고 세미가 불쑥 말한다.

응? 뭐라고 했니?

여자가 묻고 세미가 손으로 은목다리를 가리킨다.

저기 다리 보이세요? 저 다리가 은목다리거든요.

세미는 성가신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사장을 똑바로 쏘아본 뒤 조금 더 목소리를 키운다. 여자가 세미가 가리킨 곳을 본다.

지난번에 지우 언니랑 저기까지 갔었거든요. 언니가 그때 뭐라고 했는지 아세요? 저 다리 건너면 21세기, 여긴 20세기라고 했어요.

그래? 지우가 그런 말을 했어? 무슨 말일까, 그게?

이 동네가 엄청 구리다는 말이겠죠? 근데요. 언니는 20세기에 안 살아봤잖아요. 21세기보다 20세기가 더 좋을 수도 있잖아요.

그래, 그럴 수도 있지.

여자의 얼굴에 미소가 떠오른다. 아니, 그건 세미의 착각이다. 여자는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세미를 보고는 다시금 부동산 사장과 눈을 맞춘다. 두 사람은 계속해서 같은 말이 흘러나오는 트럭을 내려다보며 대화를 나눈다. 선거와 결과, 개발과 공약 같은 말을 주고받는 두 사람의 얼굴이 진지해진다.

사장님, 오늘 보고 계약하려고 했더니 안 되겠네. 그냥 했다가는 내가 후회할 거 같아요. 다시 생각을 해보고 연락드릴게요. 그래도 되죠? 그럼 여기 말고 괜찮은 물건 하나 더 있는데 보고 가세요. 이왕 여기까지 오셨는데, 차로 가면 10분도 안 걸려요. 그 집 보면 사모님, 진짜 마음에 드실 겁니다.

두 사람이 옥상을 내려간다. 돌아갈 채비를 하는 것 같다. 사장이 할아버지에게 인사를 건네고 차에 오른다. 시동이 걸린다. 세미는 막 조수석에 오르려는 여자에게 다가간다. 세미는 말하고 싶다. 할아버지는 옥상을 엉망으로 만든 게 아니라, 엉망인 옥상을 고치려 했다고. 그러나 할아버지 혼자 힘으로는 절대로 옥상을 고칠 수 없고, 당장 이 집을 떠날 수도 없다고. 식구들을 점점 더 무뚝뚝하고 퉁명스럽게 만드는 이 집이 미워 죽겠다고.

아줌마, 이거 가지실래요?

그러나 세미는 명랑한 목소리로 반듯하게 접은 오렌지색 종이를 내민다.

이게 뭐니?

여자가 세미와 눈을 맞춘다. 세미는 동네 지도, 라고 말하지 않고 비밀 지도, 라고 말한다. 그건 시장에서 받은 오렌지색 홍보지로 만든 것이고, 세미만 아는 동네의 지름길과 비밀 장소를 표시해 둔 것이고, 세미가 지금 여자에게 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이지만 여자는 이렇다 할 관심이 없다. 전화벨이 울리자 가볍게 손을 흔든 뒤, 차에 올라탄다. 차가 출발한다.

한 주가 지난다. 부동산 사장도, 여자도, 트럭도 더는 동네를 찾지 않는다. 동네는 다시 이전처럼 고요해진다. 모두가 이곳을 또 까맣게 잊어버린 게 틀림없다. 그리고 며칠 후, 늦은 오후에 세미는 동백나무에 꽃이 핀 것을 본다. 이제 막 피어나기 시작한 꽃은 작지만 아주 붉다. 그러나 까치발을 하고 아무리 코를 가까이 가져가도 향이 나지 않는다. 아무런 냄새도 느낄 수가 없다.

그날 저녁, 세미는 그것에 관한 일기를 쓴다. 동백나무 잎사귀에 대해, 아무런 향이 나지 않는 동백꽃에 대해. 언젠가 누군가에게 동백나무를 설명해야 한다면 여자처럼 잘못된 정보를 주지 않기 위해. 아니, 멀리서도 나무의 생김새를 단번에 알아보는 사람이 되기 위해, 여자처럼 다정한 목소리로 나무의 이름을 불러주는 사람이 되기 위해.

세미는 일기를 쓰다 말고 반쯤 열린 방문을 돌아다본다. 엄마는 소파에 누워 잠이 들었고, 할아버지는 나지막하게 소음이 흘러나오는 텔레비전 쪽에 시선을 두고 있다. 언니는 보이지 않는다. 세미는 조심스럽게 일어나 소리 나지 않게 방문을 꼭 닫는다. 그런 후엔 반듯한 글씨로 여자가 자신에게 해주었던 근사한 말을 가장 마지막 줄에 쓴다.

김혜진
소설가, 1983년생
장편소설 『중앙역』 『딸에 대하여』 『9번의 일』, 중편소설 『불과 나의 자서전』, 소설집 『어비』 『너라는 생활』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