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버지
④“돼지처럼 먹고, 소처럼 일하고, 학처럼 살아라”

- 나의 아버지 정한숙

  • 나의 아버지
  • 2022년 여름호 (통권 84호)
④“돼지처럼 먹고, 소처럼 일하고, 학처럼 살아라”

- 나의 아버지 정한숙

정한숙(1922~1997)
소설가, 평북 영변 출생. ‘시탑’, ‘주막’ 동인으로 활동, 고려대 교수, 국제 펜클럽 한국본부 이사, 한국소설가협회 대표위원, 대한민국예술원 회장,
한국문예진흥원장 역임. 대표작 『묘안묘심』 『암흑의 계절』 『끊어진 다리』 「흉가」 「금당벽화」 「논개」 등

 

아버지 정한숙 소설가     

 

등산을 많이 다니시던 시절, 정한모 시인(왼쪽)과 아버지    

 

벌써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사반세기가 넘어간다. 이제 세월의 흐름 따라 아버지에 대한 기억도 점차 희미해지고 있다. 내 기억에 남아 있는 강렬한 아버지의 모습은 로프를 타고 하강하고 있는 커다란 흑백 사진, 지금은 한양 도성길 조성으로 사라져 버린 삼선교 낙산 꼭대기에 있던 집 응접실 벽에 늘 걸려있었다. 유명한 산악인, 경희대 박철암 교수가 촬영했다는 글이 사진 뒤에 있었는데, 이 사진도 지금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찾을 수가 없다.

 

주막동인, (왼쪽부터) 전광용, 정한모, 정한숙, 전영경     

 

1997년, 장례식  

 

그러나 철들면서 실제로 아버지가 본격적으로 등산하시는 모습을 뵌 적은 없다. 낚시를 즐기시면서 주말마다 낚시터를 찾으시고 등산보다는 술을 즐기셨던 것 같다. 중학교 시절 주말이면 거나하게 취하신 아버지가 민물고기를 잔뜩 가지고 오시던 기억이 새롭다. 고등학교 다니던 시절 아버지를 따라 낚시터를 간 적이 몇 번 있다. 낚시에 집중하기보다는 술을 즐기시고, 술기운이 오르면 노래를 부르시다 낮잠을 주무셨다. 나는 아버지가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하는 것은 알았지만, 기타를 치실 줄 안다고는 생각해 보지 않았는데, 동생이 고등학교 시절 통기타를 치고 있는데 오시더니 옛날 노래 하나를 연주하시는 모습에 놀란 적이 있다. 이건 제자들도 주변 사람들도 알지 못했던 일이라 생각된다.

아버지는 담배를 엄청 많이 태우셨다. 집에서 글을 쓰실 때는 줄창 담배를 물고 계셨는데, 어린 시
절 하루에도 몇 번씩 서재에 들어가 재떨이를 비우던 기억이 있다. 집필하시는 동안은 엄청 예민해지셔서 늘 어머니가 조용히 들어가서 재떨이 가지고 나오라고 하셨던 기억이 있다. 사람들 중에는 그렇게 술을 드시는데 글을 언제 쓰시냐는 의문이 있었던 분들도 계신데, 놀라운 것은 늘 거나해서 늦은 시간에 집에 들어오시는데도 아침이면 멀쩡한 모습으로 새벽에 일어나서 글을 쓰셨다. 우리가 커가면서는 이른 식사를 하시고는 연구실로 출근해 끊임없이 글을 쓰셨다고 들었다. 돌아가신 후 아버지의 작품 목록을 정리하면서 그 많은 작품을 보고 우리를 위해 정말 열심히 사셨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가슴이 뭉클해지기도 했다.

 

결혼식    

 

즐기시던 파이프를 물고 연구실에서 

 

아버지는 한국동란 전에 월남해서 대학교를 다니고 결혼해 서울에 사셨다. 그러나 실향민으로 늘 고향을 그리워하셨다. 고향 영변의 약산, 진달래꽃으로 유명한 영변군 약산동, 그곳이 아버지의 고향이다. 할아버지가 독립운동으로 일찍 만주로 떠나셔서 동네 선교사 집에서 일을 거들며 농업고등학교를 나오셔서, 곡물 검사소에서 일을 하셨다고 하는데, 이때 먹고사는 일에 크게 문제가 없었는데도 학업에 대한 열망으로 좋은 직업을 버리고, 남쪽으로 내려와 대학을 다니셨다고 했다. 대학교 때 만난 전광용 선생님, 정한모 선생님, 전영경 선생님과 뜻이 맞아 ‘酒幕同人(주막동인)’이란 모임을 함께 하셨고, 네 분 다 삼선교, 성북동에 사셨기 때문에 내 어린 시절에는 가족끼리도 다 친분이 있었다. 한 달에 한 번씩 각 집을 돌아가며 모임을 하면서 서로의 글을 읽고 품평회를 하시고, 가족이 다들 모여서 식사를 하곤 했다. 부엌에서 정종을 데워서 방에 들일 때, 내가 가지고 가겠다고 나서서는 몰래 주전자에 입을 대고 마시고는 온종일 취해 해롱거렸던 어릴 적 기억도 있다.

나의 학창 시절에 늘 아버지는 바빴고, 내가 의과대학을 졸업한 뒤 전공의 생활하고, 군대 가고, 해외연수를 다녀오고 하느라 철이 들고 나서는 아버지와 가까이 지낼 기회가 별로 없었다. 아버지가 은퇴하고 내가 대학병원에서 자리를 잡은 후에야 함께 식사도 하고, 가까운 곳에 차를 몰고 여행을 다닐 수 있게 되었는데, 아버지는 여행에 대한 거리감이 없으셨다. 가끔 전화를 하셔서 내일 시간 괜찮으면 지난번 갔던 산 넘어 순두부 집을 가자고는 하셨는데, 거기가 설악산 넘어 한화콘도 가는 길에 있던 순두부 집이다. 아이들 깨워서 새벽에 아버지 댁에 가면, “점심 먹을 건데 벌써 가냐?” 하시면서 차에 타시면 바로 잠이 드시고, 서너 시간 푹 주무시다 도착하면 소주 한 병 드시면서 맛나게 식사를 하셨다. 그리고 온천서 목욕하시고, 차에 타시면 또 잠이 드시고, 서울 오면 저녁 식사를 할 시간이 되곤 했다. 그러면 “오늘은 별하는 일 없이 밥만 먹는 것 같은데……” 하시면서 늘 가시는 수육집에서 수육 한 접시에 또 소주 한 병을 가볍게 드시고, 칼국수를 드셨다.

동생이 결혼해서 아버지와 함께 살 때는 자주 보신탕집에 모시고 갔는데, 삼선교에 있던 정주집이
란 곳을 좋아하셨다. 어린 조카들이 강아지를 보면 “냠냠”이라고 해서 식구들이 웃을 정도로 좋아하셨다.

아버지가 늘 하시던 가훈과 같은 말씀이 있는데, 어머니가 특히 이 말을 좋아하시지 않았다. 좀 고
급지게 표현하는 말을 가훈으로 하라고, 손주들 학교에서 가훈 써오라고 하면 써줄 수 없다고 불평하셨다.

‘돼지처럼 먹고, 소처럼 일하고, 학처럼 살아라……’

이 말을 우리에게만 했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제자들이 쓴 글에서 보니 제자들께도 이 말을 자
주 하셨던 것 같다. 아버지가 특별히 자주 만나 이야기를 나누던 제자는 오탁번 교수, 최동호 교수, 송하춘 교수였다. 돌아가신 후에도 늘 연락하고 지내고 있다. 아버지 돌아가신 후 2003년에 파주 헤이리 마을에 기념관을 지었는데, 나 혼자서는 운영하는 것이 막막했지만, 제자들이 도와주셔서 개관행사, 기념행사를 무사히 치를 수 있었다. 내가 대학에서 은퇴하면 좀 더 정성 들여 기념관을 운영해 보려 했는데, 그게 마음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요즘은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정말 아무 행사도 못하고 있어 답답하고, 죄스런 마음이다.

고려대학교 문과대학에서 아버지 생일에 즈음해서 탄생 100주년 기념행사를 하겠다고 제자들이
힘을 합쳐 준비 중이었는데, 대산문화재단에서 연락이 왔다. 글 쓰는 일이 나의 적성이 아니어서 이 짧은 글을 쓰는데도 오랫동안 끙끙거리다, 어렸을 때 매일 아버지가 쓰신 원고지 9장 분량의 신문연재 소설을 들고, 성북동 운보 김기창 화백께 삽화 부탁하는 심부름 다니던 기억이 떠올랐다. 매일매일 글을 쓰는 일이 얼마나 힘이 드셨을까? 이제는 편히 쉬시리라 믿는다.

정지태
정한숙 소설가의 차남, 대한의학회장, 고려대학교 명예교수, 1954년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