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버지
②불광동 단독주택에서의 1인 출판 《연극평론》

- 나의 아버지 여석기

  • 나의 아버지
  • 2022년 여름호 (통권 84호)
②불광동 단독주택에서의 1인 출판 《연극평론》

- 나의 아버지 여석기

여석기(1922~2014)
연극평론가, 영문학자, 경북 김천 출생. 고려대 교수, 한국문화예술진흥원장, 국제극예술협회(ITI) 한국본부 위원장, 한국연극평론가협회 회장 역임. 《연극평론》 창간. 저서 『20세기 문학론』 『희곡론』 『현대연극』 『한국 연극의 현실』 『동서연극의 비교연구』, 역서 『햄릿』 『리처드 3세』 『십이야(夜)』 등

 

아버지 여석기 평론가     

우리 또래의 부자 관계가 대체로 그렇듯이 아버지와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눈 기억이 거의 없다. 살아가는 데 필요한 유익한 조언이나 진로에 관한 깊은 대화 같은 것도 나눈 기억이 없으니 나의 성장기에 아버지와의 관계가 그리 이상적인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아버지는 집안에서 말씀이 없고 엄하신 분이었다. 그러니 아버지가 재직하고 계셨던 대학의 같은 과에 입학해서 같은 전공을 공부해서 가르치고 글을 쓰는 대학교수의 길을 같이 걷게 되었지만 그 과정에 아버지의 영향이 있었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고3이 끝날 때쯤 대학에서 영문학과에 진학하겠다고 말씀을 드리니 맨날 한국 소설만 읽고 영어 공부는 별로 안하던데 왜 국문과가 아니냐고 지나가듯이 한마디 던지신 것은 분명하게 기억이 난다. 그리고 어린 마음에도 그런 식의 무관심이, 다 자란 아들의 인생에 되도록 개입하지 않으려는, 쿨하고 세련된 모습으로 느껴졌었다. 대화도 별로 없었고, 힘이 되는 좋은 말도 별로 안 해주시고 멀게만 느껴지던 아버지였지만, 무슨 연유에서인지 머리가 웬만큼 큰 아들에게 아버지는 그냥 꽤 괜찮은 사람이라는 느낌으로 남아있었다. 그 막연한 느낌이 아버지에 대한 좀 더 구체적인 판단 혹은 평가로 바뀌는 것은 상당히 오랜 시간이 지나서였다.

 

하회의 병산서원에서 명예원장을 하실 때 연례 제사를 하시고 찍은 사진     

 

기억이란 것이 매우 선택적인 것이라서 어린 시절 아버지에 대해 남아있는 기억들은 거의 다 가족으로서의 관계보다는 문학 전공자로서 아버지가 집에서 하시던 일과 관련된 것이었다. 70년대 초반 중학생일 때 아버지는 《연극평론》이라는 잡지를 시작하셨다. 집에 종종 새로 인쇄된 잡지가 쌓여 있었고 때로는 우리 가족들이 들고 나르는 일도 하고 잡지의 발행지에 불광동 우리집 주소가 적혀 있었으니 지금 생각해보면 거의 1인 출판 잡지에 가까운 것이었던 것 같다. 별로 넓지 않은 단독주택이었던 우리집이 그 잡지의 사무실 역할을 했는데 일주일에도 몇 번씩 연극과 관련된 사람들이 모여서 술잔을 기울이며 연극에 관한 토론을 밤늦게까지 때로는 새벽까지 이어갔던 것은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있다.

문학이나 영화를 좋아했고 호기심이 많았던 사춘기의 나에게 그들의 열띤 대화를 엿듣는 것은 대단히 특별한 경험이었다. 연극이든 문학 작품이든 작품을 감상한 뒤의 좋은 경험에 대해 판단하고 평가하고 표현하는 것이 얼마나 흥미롭고, 심지어 열정적일 수 있는 일인가를 처음으로 깨달은 순간이었다. 그분들이 나누던 대화들은 합평회란 이름으로 잡지에 실렸는데, 대학에 들어간 후 아버지는 그 합평회의 녹취록을 원고로 풀어쓰는 일을 나에게 맡기시고 원고료를 지불해 주셨다. 용돈을 버는 일 이외에도 그 흥미로운 대화들을 반복해서 들으면서 원고로 만드는 작업을 꽤 오랫동안 수행한 것은 내가 문학 작품이나 대중문화를 분석하고 비평하는 일을 생업으로 하게 되는 데 단연코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준 것이었다.

우리 집에서 어머니가 만든 술안주를 즐기며 세상 돌아가던 이야기를 나누던 분들이 한상철, 오태석, 이강백, 윤대성, 노경식, 손진책 같은 한국을 대표하는 극작가, 연극비평가, 연출가들이었고, 《연극평론》이 우리나라 최초의 연극 비평 전문지였다는 것, 그리고 아버지가 한국 연극 비평의 초석을 놓으신 분으로 평가된다는 것은 나중에 연극을 전공하는 동료들에게 들어서 알게 되었다. 후배 연극 비평가들이 ‘여석기 연극 평론상’을 제정해서 시상하는 것도 아마도 그런 업적을 인정하고 기리기 위함일 것이다.

1922년생인 아버지는 글을 깨치기 시작하는 시기부터의 모든 공교육을 일제의 식민지 치하에서 받고 대학교육까지 마친 후에 해방을 맞은 첫 번째 세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전히 매우 강력한 선비적 전통의 유교 문화권에서 가치와 덕목을 습득하면서 유년 시절을 보내고 고등학교와 대학 시절의 일본 유학을 통해 서구적 근대를 경험했고 일본 대학에서는 서구 인문학인 영문학을 전공하셨다. 아버지의 청년기를 관통했던 해방과 한국전쟁으로 이어지던 정치적 혼란기에는 동생과 처남과 동서를 각각의 상반된 이념적 이유로 잃게 되는 아픈 경험도 겪으면서 아주 간발의 차이나 우연으로 본인은 살아남으셨다. 먼발치에서나마 보아온 아버지의 말투나 자주 쓰는 어휘들, 일상의 사소한 변화들에 대한 어떤 자세들에는 아버지 세대가 경험한 고유한 시대적 특수성이 녹아들어 있었다. 성장한 후의 나는 그것이 동양적인 유교 문화의 조율된 절제와 서구 인문학을 통해 습득된 보편적 합리성이 잘 결합된 어떤 내면의 풍경 같은 것이라고 내 나름대로 분석해 보기도 했다. 앞에서 언급한 어린 시절 아버지에 대해 막연하게 가지고 있던 “꽤 괜찮은 사람”이라는 느낌도 어쩌면 그것과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

말년에 아버지와 나는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친구가 많지 않은 아버지에게 나는 몇 안 되는 말벗이 되어 드렸다. 세상 돌아가는 것에 대해 논평하는 것을 즐기셨다. 같은 일을 오래 했으니 내가 본인 말을 누구보다 잘 이해할 것이라고 생각하셨던 것 같다. 돌아가시기 얼마 전부터는 건강이 더 좋아지셔서 이전보다 더 활기차고 의욕적인 모습을 보이셨다. 생물적인 나이와 상관없이 너무도 정신이 또렷하고 의욕과 생기가 넘치셨다. 회고록을 출간하신 뒤에도 다른 책을 내고 싶으시다고 출판사를 알아봐 달라는 말씀도 하셨다. 그 말을 하신 며칠 뒤 등산을 하러 가시는 길에 과속하는 차에 받히셨다. 병원에 실려 가신 후에 허리가 아프시다고 말씀하시고 나서 다시 정신이 돌아오지 않으셨다. 격동의 세월을 사셨지만, 병원에 입원하신 적도 수술을 받으신 적도 없었고 무엇보다 그 연세에도 출근할 직장이 있으셨다. 우리 나이로 93세였다.

여건종
여석기 평론가의 장남, 숙명여자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교수, 교육대학원장, 1957년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