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인터뷰
가슴 설레는 순간과 글쓰기의 열정

- 평론가 김윤식 선생과의 대화

  • 가상인터뷰
  • 2022년 여름호 (통권 84호)
가슴 설레는 순간과 글쓰기의 열정

- 평론가 김윤식 선생과의 대화

김윤식(1936~2018)
평생 한국 문학을 연구, 현장 비평을 하며 200여 권 이상의 저서를 펴낸 국문학자이자 1세대 문학평론가. 1962년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한 뒤 쉬지 않고 한국에서 출간되는 거의 모든 중단편을 읽고 비평작업을 했다. 1968년부터 34년 동안 서울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수많은 제자를 배출했다.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및 문학분과 회장을 지냈으며 편운문학상, 요산문학상, 대산문학상, 만해상, 청마문학상 등을 수상했고, 은관문화훈장을 받았다. 대표작으로 『한국근대문예비평사연구』(1973), 『한국근대문학사상사』(1984), 『작가와의 대화』(1996), 『문학사의 라이벌 의식 1~3』(2013~2017) 등이 있다.

 

온 인류를 2년 넘게 생존에 대한 위기의식으로 몰아넣었던 코로나바이러스가 조금씩 잦아들던 2022년 4월 말의 청아한 봄날, 당신께서 생전에 자주 드나들었던 서빙고동 커피숍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김윤식 선생님이 예의 청색 잠바와 운동화 차림으로 약속 시간 정각에 커피숍 문을 열고 성큼성큼 들어오신다. 4년여만의 만남이었다. 여전히 단호하면서도 어떤 결기에 찬 표정이지만, 필자를 발견하고는 환한 미소를 짓는 모습에 마음이 놓였다.


■ 권성우(이하 권) : 선생님, 정말 오래간만입니다. 선생님께서 저 광활한 우주로 들어가신 지, 3년 반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곳에서 어떻게 지내셨는지요?

■ 김윤식(이하 김) : 나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어제도 최인훈 작가와 김현 비평가, 일지사 김성재 사장을 만나서 캔맥주 한잔하며 두런두런 옛날 얘기를 나누었답니다. 이전 이승에 있을 때보다도 지금 그들과 한층 살갑고 정다운 관계가 된 것 같네요.

 권  아 그곳에서 생전의 문우(文友)분들과 자주 만나시나 봅니다.

 

2002년 대산문학상 수상자 기자간담회, 김윤식 평론가    

 김  그렇네요. 사실 지난 생에서는 주어진 시간 대부분을 독서와 집필로 보냈지요. 그야말로 고독한 서재 속의 삶이었다고 할 수 있겠네요. 지금은 당시 충분히 마음과 생각을 나누지 못했던 문우, 친구들과 자주 만나서 얘기하는 시간이 참으로 즐겁습니다.

 권  그러시군요. 그 말씀을 들으니 문득 선생님의 《현대문학》 추천 소감의 한 대목이 떠오르는군요. “노예선의 벤허처럼 눈에 불을 켜야만 나는 사는 것이었다.”(《현대문학》, 1962. 8., 101면)고 표현한 그 절박한 심정으로 평생을 열정과 긴장 속에서 공부하고 글 쓰는 삶을 영위하신 것이지요. 동시에 “출발이란 무릎이다. 무릎의 메타포가 출발인 것이다. 상처 없는 무릎을 보았는가. 우리가 미지를 향할 때, 우리가 보다 멀리 손을 뻗치려 할 때, 그리고 우리가 일어서려 할 때, 피를 흘려야 하는 곳은 바로 이 무릎이었다. 너는 저 새벽의 광야, 청정한 호수, 태풍 속의 존재이어야만하기 때문이다.”라는 『한국근대문학의 이해』의 서문 대목도 아련히 기억납니다. 이런 순수한 열정을 평생 동안 유지하셨기에, 『한국근대문예비평사연구』(1973)에서 『문학사의 라이벌 의식3』(2017)으로 이어지는 단독 저서만 치더라도 150권의 수많은 책을 펴내실 수 있으셨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김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네요. 그런 평생 쓰고 읽는 삶이 내 운명이었다고나 할까요. 언젠가 권성우 군도 포함되었던 수업 시간에 “문학은 패배자가 하는 겁니다. 나처럼 살지 말고 그냥 평범하게 살기 바랍니다.”라는 취지의 얘기를 한 걸 기억하는지요. 글 쓰고 책 읽는 것이 너무 좋았고, 그것만이 내 길이라 생각해 모든 에너지와 시간, 정성을 바쳤지요. 하지만 어느 순간 스스로 인생을 되돌아보면서, 만남과 사귐도 별로 없이 일상적 행복을 밀쳐 두고 너무 ‘외골수’로 학문과 글쓰기에 생(生)을 바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보통 사람들이 누리는 즐거움, 술자리, 농담, 사귐의 시간이 제 인생에는 그다지 없었습니다. 물론 속마음을 나눈 친구나 문우가 몇 명 있기를 했지만, 가끔 이루어지는 그들과의 만남을 제외하면 제 인생은 대부분 서재 창밖의 은행나무와 대화하거나(서대문구 냉천동 시절), 서재에서 한강의 흐름을 망연히 바라보는(용산구 서빙고동 시절) 그런 고독한 여정이었어요. 후회는 하지 않습니다만, 누구나 자신이 가지 않은 길에 대한 회한의 심정이 있겠지요. 그래서 지금은 여전히 읽고 쓰기는 하지만 제가 좋아하는 친구들과의 만남, 사귐에 더 많은 시간을 보낸답니다.

 

 권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것 같습니다. 저는 선생님과 같은 열정과 글쓰기 철학도 없지만, 늘 학자나 글 쓰는 삶의 롤모델을 선생님이라는 존재에서 엿보곤 했습니다. 선생님을 생각하면, 제게는 뭔가 열정과 재능이 너무 부족한 게 아닌가 생각하는 시기도 있었지요. 어느 순간에는 사람은 누구나 자기 나름의 길이 있다고, 저의 게으름을 합리화하기도 했답니다. 지금도 글쓰기 스타일과 꾸준히 쓰는 방법과 태도에 대한 고민이 많습니다.

 김  누구나 자신의 고유한 운명과 스타일이 존재하지요. 여러 길과 방법 중에 고민이 될 때는 머리(이성)보다 가슴이 시키는 대로 선택하길 바랍니다. 그러면 후회가 적을 거예요. 적어도 글과 관련해서는 자신이 가장 하고 싶은 것, 가슴 설레게 만드는 선택을 하기 바랍니다. 그래서 “삶의 절대적 근거랄까 심연에 대한 형언할 수 없는 그리움을 품은” 자만이 선택하는 그런 글쓰기 쪽으로 가보세요.

 권  잘 알겠습니다. 지금 해주신 귀한 말씀을 제 가슴에 깊이 새기겠습니다. 이번에 대담을 준비하면서, 선생님 말년의 역저 『내가 읽고 만난 일본』을 다시 읽어보았습니다. 역시 선생님만의 문체와 표정, 내면과 깊이를 느꼈습니다. 이 책은 초기의 『문학과 미술 사이』, 『황홀경의 사상』과 더불어 제가 선생님 저서 중에서 가장 아끼는 책이기도 합니다. 이 책에는 두 번에 걸친 당신의 도쿄 체류 시절의 일상과 추억, 지적 분투, 실존의 풍경이 오롯이 스며 있다고 생각되는군요. “하숙으로 돌아온 그날 밤 가슴 설레며 『소설의 이론』을 밤을 새워 읽는 동안 잠시 숨을 돌릴 때, 고마고메역에서 도쿄대 쪽으로 가는 첫 전철의 소리가 들렸다.” 같은 문장을 접하면, 저 역시 가슴이 설렙니다. 도쿄시절, 선생님의 남다른 학문적 열정과 내면의 감각이 생생하게 느껴지는 구절이네요. 생각해보니, 선생님의 도쿄행, 그 지적인 월경(越境)의 여정이 제게 일본의 근대, 일본문학, 일본 지성사에 대한 깊은 관심으로 이끈 중요한 동기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김  네, 해방 전 일제 시절 소학교 때 일본어와 일본문화를 짧게 익힌 후에 해방이 되었어요. 저 역시 그 이후의 민족주의 열풍이나 국학의 감각에서 자유롭지 않았지만, 공부를 깊게 할수록, 한국문학이란 실체의 심연을 제대로 살펴볼수록, 그 뒤에 존재하는 일본 근대문학의 그림자가 보이더군요. 한국근대문학의 특성과 지형(地形), 저력과 성취, 한계와 결핍을 어떤 편견도 없이 정직하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일본 지성사라는 시좌를 통해 한국(문학)을 바라보는 게 꼭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그런 문제의식이 내게 1970년과 1980년 두 번에 걸친 일본유학으로 이끈 셈이네요. 나는 당시 동경대학 교양학부 소속 비교문학 및 문화연구소 도서관에서 《태양》 잡지를 비롯해, 메이지 시절의 사상적 분위기와 지적 풍속에 대한 감각을 기르고자 상당한 시간을 보냈답니다. 그래야만 이광수가 일본유학 당시 지녔던 문학적·지적 감각을 포착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그 과정이 이광수를 온전히 이해하는 데 꼭 필요하다고 봤던 것이지요.

1998년, 김윤식 선생의 편지     

 권  그러셨군요. 일본 유학이 선생님의 학문적·비평적 여정에서 매우 중요한 새로운 전기(轉機)가 된 셈이군요. 누구에게나 새롭게 도약하는 그런 순간이 있겠지요. 1998년인가, 제가 비평가로서 헤매고 방황할 무렵에 선생님께서 보내신 편지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기억하시는지요? 그 편지의 존재가 제게 새롭게 힘을 내면서 다시 글을 쓰게 만든 소중한 계기가 되었답니다. 당신은 편지에서 “자신을 학대하지 말게나. 자기와 자기의 마주침이지 타자와의 마주침이 아니지 않은가. 좋은 글을 쓰고자 하지 말게나. 그냥 글을 쓰게나.”라고 적으셨지요. 그 말씀을 통해, 결국 글쓰기는 자기와의 마주침, 자신과의 응시라는 사실을 제 마음에 담을 수 있었답니다. 하지만 선생님의 조언에도 불구하고, 좋은 글을 쓰고자 하는 욕망은 사라지지 않더군요. 그러다 보니, 글을 늘 힘겹게 쓰고, 많이 쓰지 못합니다. 글 쓰는 스타일에도 각자의 표정과 운명이 있는 걸까요. 거의 매일 원고지 20매씩 쓰신 선생님의 꾸준한 글쓰기 비결에 대해 여쭙고 싶습니다.

 김  아마 우리 세대 특유의 어떤 감각이 있지 않았을까 싶어요. 전후의 황폐한 대학시절을 보내며, 뭔가 절박한 마음으로 공부를 해야 한다는 감각이자, 모든 걸 바쳐서 의미 있는 일을 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있었던 시절의 태도이지요. 늘 그런 감각 속에서 살아왔으니, 하루에 스무 매 정도를 써야, 비로소 할 일을 했다고 생각했던 것 같네요. 물론 이런 점에는 세네카의 극기주의에서 영향을 받은 내 개인적 기질이나 태도도 영향을 미쳤을 겁니다. 글쓰기를 좀 더 장기적인 리듬의 차원에서 보면, 하나의 원고에 너무 힘을 빼는 게 긍정적으로 작용하지는 않을 겁니다. 오래 많이 쓰려면 무엇보다 꾸준해야 합니다.

 권  그렇군요. 꾸준한 글쓰기의 소중한 지혜와 비결을 얻네요. 참 최근에 선생님과 오랜 학문적 우정을 나눈 오무라 마스오(大村益夫, 1933~) 선생님께서 제28회 용재학술상을 수상하셨다는 사실을 알고 계시는지요?

 김  안 그래도 그 소식을 듣고 무척 기쁜 마음이었어요. 서로 있는 세계가 달라 직접 축하의 마음을 전할 수는 없었지만, 언젠가 세월이 흐르면 오무라 교수와도 이곳에서 회포를 나눌 순간이 있겠지요. 그에게는 외국문학인 한국문학 연구와 번역을 위해 평생을 바친 오무라 교수의 인생 말년이 행복하고 평안한 시간으로 채워지길 바라는 마음이에요. 그의 존재, 그와의 오랜 학문적 대화와 우정으로 인해, 한국문학과 일본문학의 관계에 대해 연구하는 과정에서 커다란 도움과 용기를 얻었습니다. 그래서 『한일문학의 관련양상』(1974), 『한일 근대문학 관련양상 신론』(2001), 『내가 읽고 만난 일본』(2012) 등을 쓸 수 있었던 게 아닌가 싶어요.

 권  올해 말에는 『황홀경의 사상』(홍성사, 1984)이 ‘사무사책방’에서 새로운 판본으로 편집되어 다시 출간될 예정입니다. 제가 이번에 그 책의 해설을 쓰면서 선생님께 꼭 여쭙고 싶은 게 있었습니다. 『내가 읽고 만난 일본』에도 나옵니다만, 게오르그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과의 만남이 선생님의 소설비평과 근대문학연구의 도정에서 하나의 뜻깊은 전환점이 된 걸로 보입니다. “한 권의 책을 읽는 일은 운명의 만남과 흡사하다. 어떤 헝가리의 비평가가 쓴 『소설의 이론』이 내게는 그러하였다.”고 적혀 있네요. 반공 이데올로기가 팽배하고 정치적 억압이 극심했던 그 시기에 국내의 어떤 학자보다도 먼저 루카치 이론에 대한 열정과 호기심을 표하신 계기와 이유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김  이념을 떠나서 인류사를 둘러싼 문제의식을 지닌 비평가, 소설의 역사철학적 성격에 대해 정교하게 철학적인 시야로 해명한 비평가 루카치에 대해 제대로 알고 싶다는 열망이 있었답니다. 왜냐하면, 내 전공인 한국근대문학비평사를 탐색하다 보면, 카프(KAPF) 비평과 만나지 않을 도리가 없지요. 그 문제의식과 이론의 뿌리를 제대로 앍고 싶다는 생각이 절박했는데, 반공을 국시로 하는 박정희 유신정권에서는 그런 지적인 호기심이나 학문적 관심조차 허용되지 않던 암울한 시대였어요. 내가 사실 1973년 『한국근대문예비평사연구』를 낸 해에 카프문학 연구와 관련, 일본

평론가 권성우     

문인과의 접촉 여부로 당시 보안사에서 조사를 받기도 했었어요. 단지 자료와 사실 확인 차원의 순수한 학문적 작업도 온전히 허락되지 않는 시대였기에, 역으로 게오르크 루카치 같이 당시 이 땅에서 허용되지 않았던 비평적 입장에 대한 호기심이 더 강렬해졌던 것 같습니다.

 권  아, 그런 일이 있으셨다는 사실을 선생님 연보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아까 어제 최인훈 소설가와 김현 비평가를 만나셨다고 하셨는데요. 친구분들과 만나는 것 외의 그곳 생활이 궁금합니다. 그래서 이런 질문도 드려보고 싶습니다. 선생님은 1983년 런던에서 열린 유럽 한국학 세미나(AKSE)에 처음 참석하시고, 한동안 거의 매년 세계 곳곳에서 한국문학의 독자성과 특성에 대해 발표하시고, 여러 곳을 여행하셨지요. 그 여행 편력의 기록이 『문학과 미술 사이』, 『황홀경의 사상』, 『환각을 찾아서』, 『아득한 회색, 선연한 초록』 등의 십수 권의 예술기행집으로 구현된 셈이지요. 생각해보니, 선생님 당신께서 찾아간 세계 곳곳을 저도 가고 싶었고, 당신의 가슴을 설레게 만든 책들을 저 역시 읽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 계신 그곳에서도 여행을 많이 하시는지요?

 김  우주는 지구보다 수만 배 이상 거의 무한대로 넓은 곳이잖아요. 이제 힘이 많이 떨어지고 호기심이 줄어서 여행을 자주 못합니다만, 가끔 지구 주변의 행성을 둘러보고 있답니다. 우주에서 바라본 지구별의 아름다움을 지구별 주민들에게 각별한 마음으로 꼭 전해주고 싶네요. 그런 지구에서 여전히 전쟁이 일어난다는 건 우둔한 비극이죠.

 권  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이의 전쟁을 알고 계시는군요. 이즈음 세계가 돌아가는 흐름을 보며, 늘 지성과 지혜는 욕망과 감성보다 힘이 부족하다고 느끼게 됩니다. 선생님이 한창 현역 비평가로 활동하시던 시기에 비하면, 첨단 문명은 비약적으로 발전했지만 인간의 지성과 예술은 외려 퇴화하는 면도 있는 것 같습니다. 이즈음 한국사회를 봐도 비약적인 경제발전과 선진국 진입, 한류문화의 대유행 등 고무적인 대목도 많지만 동시에 새로운 야만과 퇴행으로 부를 수 있는 현상도 꽤 보입니다.

 김  드넓은 우주에 있다 보니, 이제 지구의 어떤 사건에도 일희일비하지 않게 되네요. 한층 길고 넓은 흐름으로 세계를 본다고 할지요. 하지만 글쓰기는 조금 다른 성격을 지니고 있지 않나 싶어요. 내가 1962년에 등단해서, 정말 오랜 세월 동안 글을 써왔는데, 나름대로 노력을 했지만 늘 위기의식을 느꼈어요. 한 후배 학자에게 고백한, ‘나는 늘 슬럼프였다’는 얘기도 그런 맥락에서 한 것입니다. 자신에게 만족하는 글쓰기, 그런 건 있을 수 없지요. 항상 결핍을 느끼면서, 끊임없이 긴장하며 방황하는 게 정직한 학자나 예술가의 운명이지 싶어요.

 권  선생님과의 대화에 정신없이 빠지다 보니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네요. 선생님께 듣고 싶은 얘기가 너무나 많은데, 오늘은 여기에서 대화를 마무리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곳까지 찾아와주셔서 제게 살과 피가 될 지혜의 말씀을 해주신 것을 영원히 기억하겠습니다. 다음에 또 이런 기회를 만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때까지 부디 우주의 신비를 느끼는 즐겁고 충만한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김  나도 정말 오래간만에 권 선생을 만나니 옛날 생각도 나고 참 반갑고 좋았습니다. 건강하게 잘 지내요.

 권  네, 감사합니다. 선생님과의 다음 만남을 고대하면서, 앞으로 펼쳐질 시간을 즐겁게 헤쳐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권성우
평론가, 숙명여자대학교 한국어문학부 교수, 1963년생
저서 『비평의 고독』 『낭만적 망명』 『비평의 매혹』 『비정성시를 만나던 푸르스름한 저녁』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