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의 풍경
불고기 외식사(史)

  • 근대의 풍경
  • 2022년 여름호 (통권 84호)
불고기 외식사(史)

일제강점기, 해방, 6.25와 분단으로 이어지는 굴곡진 근현대사를 관통하면서도 삶은 계속되었다.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고기를 구웠으며 그 중심에는 불고기가 있었다.

일제강점기 불고기는 “평양 명물”로 통했다. 평양의 소는 “평양우”라는 지역 브랜드가 따로 붙었을 정도로 우수했고, 그래서인지 대동강변의 유원지 ‘모란대’는 불고기의 성지였다. 당시 동아일보 평양지국에 근무했던 오기영은 동아일보 1935년 5월 1일자 칼럼 ‘팔로춘색(八路春色) : 옛 생각은 잊어야 할까’에서 다음과 같이 한탄했다.

 

대동강변 40리 긴 숲의 풀빛을 뿌리까지 짓밟은 청일, 러일 두 싸움통에 총상을 입은 채 서 있는 기림의 늙은 소나무 밑에는 ‘봄놀이’도 한창이다. 소고기를 굽는 것이다. 야유회의 맑은 운치도 있음직하거니와, 모진 뿌리가 죽지 않아 살아남은 노송들이 그 진저리나는 고기 굽는 냄새에 푸른빛조차 잃은 것 같다.

 

얼마나 고기를 구워댔는지 그 연기에 소나무 숲이 고사될 정도가 되자 결국 당국이 나서서 고기구이를 금지시켰다(동아일보, 1935.5.5., “모란대 명물 불고기 금지”; 매일신보, 1935.5.5., “공원음식점에 실외 소육을 엄금... 고기 굽는 연기에 송림이 고사”).

해방 직후 평양식 불고기 전문점이 서울에도 입성했던 것은 신문의 음식점 광고를 통해서 확인할

그림 1. ‘평양관’ 광고(서울신문, 1948.10.7.)  

수 있다. ‘한일백화점식당’(동아일보, 1946.4.6.), ‘남산’(동아일보, 1946.8.11.), ‘평양관’(서울신문, 1948.10.7.) 등에서는 “순평양식”을 강조하며 불고기를 간판 메뉴로 내세웠다. 그 시기 이미 <그림 1>과 같이 즉석 숯불구이 ‘테이블 바비큐’에서 최상의 불고기 맛을 이끌어내어 즐겼다.

그런데 갑자기 6.25가 발발했고 많은 것을 결핍시켰다. 결핍은 변화를 요구했고, 불고기 역시 바뀌어야만 했다. 모든 물자가 부족한 상황에서 어렵게나마 구할 수 있었던 것은 과거 불고기에 쓰였던 최상급 등심과 안심이 아닌, 질긴 다릿살이었다. 이 부위를 어떻게 하면 맛있게 먹을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은 혁신을 가져왔다. 질긴 부위를 먹는 방법은 고기를 얇게 써는 것이었다. 무쇠 칼로는 한계가 있기에 ‘육절기’가 도입되었다.

그림 2. 1961년 영화 <삼등과장>의 육수 불고기 불판 등장 장면    

또한 부족한 고기 양을 늘리기 위해 각종 부재료가 첨가되었고, 굽는 것 대신 육수가 자작하게 끓이는 조리법이 등장했다. 여기에 발맞추어 기존의 석쇠가 아닌 ‘불고기 전용 불판’이 고안되었다. 불판의 봉긋한 위쪽에는 듬성듬성 구멍이 나 있어서 고기를 구우면서 직접 불기운이 닿았고 소위 ‘불향’을 입힐 수 있었다. 그리고 구운 고기에서 흘러내린 양념 육수는 우묵한 가장자리에 자작하게 고여 끓을수록 점점 더 진해지고 맛있어졌다. 불향 입은 고기구이와 달콤 짭짤한 진한 국물의 매력을 동시에 맛볼 수 있는, 그야말로 전 세계 하나밖에 없는 창의적인 고기구이가 탄생한 것이다.

<그림 2>의 1961년 영화 <삼등과장>에서 가족들의 갈등을 봉합하는 화해의 음식은 바로 이 육수 불고기였다. 신통하게도 국물 있는 불고기는 밥과 매우 잘 어울렸다. 과거에는 주로 술안주였던 불고기가 국물이 생기면서 밥반찬이 되었고 점차 가족 단위 외식 메뉴의 대명사로 전국적인 각광을 받게 되었다.

 

그림 3. ‘나이론 회관’ 광고(馬山日報, 1965.9.19.)  

 

충북 제천이 고향이신 올해 80대 초반 필자의 아버님이 처음 불고기를 드신 것은 1961년이었다. 첫 시식 소감을 다음과 같이 말씀해 주셨다.

 

처음에 서울 올라와서 입주 가정교사를 했는데, 아이들 성적이 잘 나왔어. 그래서 주인댁에서 한턱낸다고 데리고 나가서 불고기를 사주더라고. 그때까지 고기는 국으로, 국물에서 몇 점 건져서나 먹었지, 고기 자체를 그렇게 먹어본 건 처음이었어. 아니, 고기를 이렇게 먹어도 되나, 나라 망하는 건 아닌가 걱정 되더라고…… 하하하……

 

수도권뿐 아니라 멀리 경상남도 마산지역까지도 외식시장이 불고기로 들썩였다. 1968년과 1969년 연속 ‘경남신문 선정 인기업소 1위’였던 ‘나이론 회관’은 이름도 당시 최첨단을 상징했던 ‘나이론’에서 따온 것처럼 순발력 있게 유행 메뉴를 상품화한 식당이었는데, 1965년에는 “마산 요식업 최초로 입하한 육절기”를 자랑하며 불고기를 집중 광고했다(<그림 3>). 그 뒤를 이어 1970년에 1위 인기업소가 된 ‘화성회관’ 역시 경남신문 1967년 9월 27일 광고에 “한식의 원조 대중식사, 한국요리, 즉석불고기”를 대표 메뉴로 내세웠다. 더구나 냉면이 이미 6.25 피난민들과 함께 한반도 남쪽까지 진출해서 본격적으로 퍼져나갔기에 불고기는 냉면과의 조합을 이루었고 그 반응은 뜨거웠다.

불고기가 국내에서만 인기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일찍이 세계화된 음식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으로 건너간 불고기는 ‘야키니쿠’의 원조가 되어 일본 식문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 또한 이민자들과 함께 미국으로 간 불고기는 1946년에 하와이 한국음식점 간판메뉴로 등장했다(국민보, 1946.12.4.). 그리고 지휘자 정명훈 씨의 회고에 따르면, 1966년 시애틀에 문을 연 부모님의 햄버거 가게에서 패티를 불고기 스타일로 구워 인기가 많았다고 한다. 1992년 롯데리아에서 출시하기 26년 전에 이미 미국 시애틀에 ‘불고기 버거’가 있었다는 이야기인 것이다. 또한 조선일보 1963년 4월 9일자 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불고기가 동남아 지역에도 유행”해서, “개당 70센트의 가격으로 1,000개의 불고기판이 태국에 수출되었다”라고 보도되기도 하였다.

우리나라 쇠고기 소비량은 1970년대 중반 이후 급격하게 증가했다. 그 시기는 바로 불고기 전성기이기도 하다.

1970~80년대 한국인 쇠고기 소비의 상당량은 ‘불고기’로 섭취되었다고 해도 무리가 아니다.

이렇게 남한에 내려온 불고기는 변신을 거듭하며 한국의 대표 음식으로 성장했는데, 그동안 북한의 불고기는 어떻게 되어 있을까? 여전히 굽는 불고기의 정체성을 고수하고 있는지, 아니면 그동안 남한과는 또 다른 어떤 변화가 생겼는지, 헤어진 이산가족 소식만큼이나 궁금하지만 분단 이후 북한의 불고기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

2018년 남북정상회담에서도 양 정상의 식탁 위에 올려졌던 것은 ‘냉면’뿐이었다. 북한에서는 소를 잡는 것이 철저히 통제되어있다고 알고 있기에 행여 민간에서 불고기가 사라진 것은 아닐까, 궁금함을 넘어서 걱정을 하던 참이었는데, 얼마 전 신문에서 반가운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평양주재 영국대사로 근무한 뒤 올해 서울로 부임한 신임 콜린 크룩스(Colin Crooks) 주한영국대사 인터뷰에서였다. “북한에서 가장 그리운 건 뭘까요.”라는 기자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묘향산도 아름다웠고, 단풍이 한창인 금강산도 멋있었지만”(중략) “어느 휴일, (평양) 모란봉 공원에서 불고기를 구워 먹고 막걸리를 마시고 흥겨워하던 북한 주민들과 어울렸던 시간이 그립네요.”

- 중앙일보, 2022.03.23. “北에서 내려온 ‘대사 동지’…‘유창한 조선어’ 크룩스 주한 英대사”

 

무릎을 쳤다. ‘와! 다행이다! 여전히 북한 주민들이 불고기를 구워 먹는구나... 모란봉 소나무, 여전히 불고기 냄새로 고생하는구나!’

 

통일이 되면 꼭 하고 싶은 일이 있다. 실향민들이 저마다 고향집을 향해 갈 때, 남한 태생인 나는 제일 먼저 평양행 기차표를 사야겠다. 성큼성큼 모란대에 올라가서 “진저리나는 고기 굽는 냄새”에도 여전히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노송을 한번 쓰다듬어 주고, 그 궁금했던 “평양 명물” 불고기 맛을 봐야겠다.


그림 1. ‘평양관’ 광고(서울신문, 1948.10.7.)
그림 2. 1961년 영화 <삼등과장>의 육수 불고기 불판 등장 장면
그림 3. ‘나이론 회관’ 광고(馬山日報, 1965.9.19.)

이규진
경남대학교 식품영양학과 교수, 1968년생
저서 『불고기 - 한국고기구이의 문화사』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