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초대석
문화 외길 30년, 자호는 ‘남덕’… 그대 덕에 여기까지 왔으니

- 정재숙 전 문화재청장과의 대화

  • 대산초대석
  • 2022년 여름호 (통권 84호)
문화 외길 30년, 자호는 ‘남덕’… 그대 덕에 여기까지 왔으니

- 정재숙 전 문화재청장과의 대화

 

 

김유태
매일경제 문화부 기자, 시인, 1984년생
시집 『그 일 말고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등

정재숙
언론인, 제10대 문화재청장, 1961년생
편저 『나를 흔든 시 한 줄』 등

 

정재숙 ‘선배’가 문화재청장 현직에 재임하던 당시, 문화재청 출입기자로서 몇 차례 그를 인터뷰한 적이 있다. 경복궁 옆 국립고궁박물관 뜰을 걸으며 오래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고, 이화여대 대형 강의실에서 학생 300여명을 만나는 그의 모습을 짧게 스케치한 적도 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정 선배와의 대화는 언제나 그가 지녔던 ‘기자’와 ‘청장’이라는 두 가지 정체성 사잇길에서 진행됐다. ‘청장 대 출입기자’로 앉아 그를 인터뷰하는 건 낯선 작업이 아니었으나 ‘선배기자 대 후배기자’로 나눈 대화를 지면에 인터뷰체로 옮기는 건 서로에게 조금은 어색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인지 그동안 정재숙 ‘청장’에게 여러 질문을 던졌어도 정재숙 ‘기자’의 속엣말을 들어볼 기회는 적었던 듯싶다.

그와 인터뷰하면서, 그가 삶 속에서 ‘문화’라는 일관되고 통일된 흐름을 지키고자 노력한 흔적을 언뜻 발견한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다. 소속과 직함은 변모할지라도 정재숙 기자/청장에게는 자신이 정말로 사랑하는 것을 지키려고 했던 혼자만의 쟁투 같은 분위기가 감지된다. 삶이란 자신이 알지 못했던 자신의 내부를 발견하려는 여정이고, 오랜 기간 연마된 시간 속에서 자신을 꺼내 드러내기 위해선 버려야 할 것과 버리지 말아야 할 것을 구분하는 선택이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그는 삶에서 문화라는 키워드를 놓치지 않으려 분투한 것이 분명하다.

대산문화재단 요청으로 이뤄진 이번 인터뷰는 그러므로 청장과 기자라는, 그가 가진 두 가지 정체성을 확인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4월 어느 중순 늦은 오후, 국립고궁박물관 카페에서 2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 문화, 우리가 인간이란 증거

김유태(이하 김) 오랜만에 뵙는다. 청장 취임 초기 저와 인터뷰하실 때 “문화부 기자를 30년 했더니 ‘기자 후유증’이 남아 있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2년 4개월 임기를 마치고 이제 퇴임 후 1년 남짓 지났는데, 그간 ‘청장 후유증’은 없으셨는지 궁금하다.

정재숙(이하 정) 대산초대석에 응하기가 조심스러웠는데, 김 기자와 이번이 세 번째 인터뷰다. 인연인가 싶어 기쁜 마음으로 나오게 됐다. 다행히 퇴임 후에도 코로나19는 안 걸렸고, 아침에 눈을 뜨면 ‘오늘은 뭐하고 놀지?’ 생각하며 하루를 시작하고 있다. (웃음) 오라는 데는 없어도 갈 데는 많다. 집안을 치우고 책도 기증하는 등 주변을 정리하는 시간도 보냈다. 사실 뭘 쌓아두는 성격이 아닌데도 기자 30년, 청장 2년을 보내고 나니 버리지 못한 것들이 많았다.

최근 들어 마음의 무게를 가장 기울인 일은 다름 아닌 제주도 여행이었다. 아직도 운전을 못하는 ‘뚜벅이’여서 버스 타고 오가며 올레길을 여러 번 걸었다. ‘남은 삶 동안 제주도를 몇 번이나 더 걸었는지가 내 삶의 가치를 좌우하리라’는 생각을 진심으로 할 정도로 제주에 푹 빠져 산다. 올레길은 주로 서귀포 쪽을 걸었다. 틈나는 대로 화엄사, 쌍계사, 전등사 등 주요 사찰에도 자주 다녀왔다. 기자 시절에는 자연에 대한 시각이 좁았는데 청장 이후 그런 시각이 아주 넓어졌다. 그 부분이 가장 감사하다.

바다와 산을 보는 여러 번의 발걸음 속에서 ‘청장 후유증’이 없진 않았다. 최근 문화재 명칭에서 재산을 뜻하는 재(財)를 삭제하고 ‘국가유산’으로 명칭이 바뀌는 작업이 진행됐다. 소식을 듣고 재임 당시 문화재청의 국가유산부 승격을 이야기하던 때의 마음이 기억났다. 이어 국가유산을 바라보는 우리네 눈길이 더 맑아졌으면 좋겠다는 생각, 우리 문화유산은 그럴 이유가 충분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다 문득 ‘여전히 내가 청을 걱정하고 있네’ 싶어져서 속으로 한참을 웃던 기억이 난다. (웃음)
 
 김  재임 기간 전체를 두고 이뤄지는 전임 기관장 인터뷰는 흔치 않다. 지금 이 순간, 청장 재임 시절 전체를 회고했을 때 가장 먼저 기억하게 되는 ‘한 순간’이 언제인지 궁금하다. 아마 그 한 순간이 ‘문화재청장 정재숙’의 마음을 설명해주지 않을까 싶다.

 

정재숙 전 문화재청장(왼쪽)과 김유태 기자   

 

 정  임명직은 임기가 없으므로 후임 문화재청장이 발표되면 지체 없이 떠나야 한다고 들었다. 새 청장 발표 소식을 듣고 지체 없이 문화재청이 위치한 대전을 서둘러 떠났다. 사실 그날은 노사협의 중이었는데 소식을 듣고 바로 떠날 정도로 뒤를 남기지 않았다. (웃음) 문화재청장 부임할 때는 어리바리하게 두려움 반에 호기심 반으로 갔는데 마무리할 때는 어떤 말 못할 안온함 속에서 끝맺음을 한 것 같다. 감사한 시간이었다.

오늘 이 자리에선 두 가지 기억을 꺼내게 된다. 먼저 ‘한국의 서원’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던 순간을 잊지 못한다. 아제르바이잔 바쿠에서 서원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가 확정되는 순간 말이다. 푸른색 한복을 입은 제가 두 손을 번쩍 든 사진이 당시에 많이 보도됐는데, 이제 와서 고백하자면 그건 ‘연출’이 아니라 진심의 환호였다. (웃음) 저도 모르게 손이 올라갔다.

또 익산 미륵사지석탑 복원 준공식 현장에서 만난 김현용 국립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를 기억한다. 대학생 시절 아르바이트생 신분으로 미륵사지와 연을 맺은 그는 19년간 미륵사지석탑 보수에 매진했다고 들었다. 석탑 하나에 삶 전체를 거신 분이다. 꿈속에서도 석탑을 쌓은 오래전의 그 도공이 나온다고 하니, 다시 돌이켜도 울림이 큰 사람이다. 한 청년이 장년이 되기까지 석탑 아래서 보낸 시간을 간접적으로 느끼면서, 뭔가가 가슴 한구석을 후비며 지나가는 느낌을 받았다. 그런 시간들을 떠올릴 때마다 매우 감사하다.

 

 

 김  문화재청장직은 다른 기관과 좀 달라서, 동시대 당면한 과제뿐 아니라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과거와 후대에 물려줘야 할 미래를 동시적으로 고민해야 하는, 그래서 책임감이 더 강조되는 자리라는 생각이 든다. ‘먼 시간’을 내다봐야 하는 자리랄까.

 정  전남 구례 화엄사에 가면 조선시대에 세워진 보제루가 있다. 누정인데, 보제루 벽면 한쪽에 “나 왔다 간다”는 내용의 낙서가 지워지지 않은 채 적혀 있다. 근래의 낙서가 아니라 조선시대에 누군가가 적은 낙서이기 때문이다. 그중 한 낙서가 흥미로운데, “함흥에서 구례까지 왔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교통수단이 마땅치 않았던 과거에 일반인이 괴나리봇짐 지고 20일, 30일 걸려서 구례까지 갔다는 얘기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문화유산과 근거리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아무래도 시간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제 세상에 없는 사람과 아직 세상에 없는 사람들까지 생각하게 되는 순간이 잦으니 말이다.

문화재청장직을 떠나 문화계에 종사했던 한 사람으로서, 문화유산이란 무엇인가를 자주 생각한다. 나름 저는 이런 결론을 내렸는데, 인간으로 태어나 한 번의 인생을 살다가 자신이 인간이었음을 인간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방식 중에 가장 보편적인 것은 바로 국가유산, 문화유산이 아닌가 싶다. 문화유산에는 시간을 가로지르는 힘이 내재되어 있다. 문화유산은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인간으로 살아왔다는 하나의 강력한 증거이고, 그래서 후대에 물려줘야 할 필요가 크다. 삶이, 생활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김  종적으로는 후대에 문화유산을 물려줘야 하고, 횡적으로는 동시대 세계인에게 문화유산을 알려야 하는 일이 문화재청의 과업이겠다.

 정  이제 우리나라는 보존 분야에선 일류라고 자부해도 될 정도로 자신감이 붙었다. 그러나 궁이든 능이든 오직 보존하기 위해 닫아놓으면 결국 상하고 썩는다. 문화유산을 미래에 전하려면 가만히 놔둬서는 안 되고 동시대인이 즐겨야 한다는 얘기다. 고색창연한 문화유산을 두고 ‘즐긴다’는 어휘가 좀 그렇다면 활용이라는 단어도 좋겠다. 재임 당시 문화재청 캐치프레이즈는 ‘어제를 담아 내일에 전한다’였는데 문화유산을 미래에 전하려면 우리가 적극 활용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열자, 그리고 놀자. 이런 마음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갯벌, 연등회, 탈춤, 장 담그기, 한지 등이 유네스코에 등재됐거나 등재가 추진 중이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흐름이 점점 해당 지역 공동체와의 교류라는 가치로 바뀌어가고 있다. 문화유산의 탁월한 보편적 가치란 겉모습만 번쩍이는 명승이나 절경이 아니라 사람과 생활이 얼마나 묻어 있는지가 관건이 된다. 제주도민은 아니지만 매년 제주도에 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제주도와 관계를 맺은 사람이다. 문화유산과 관계된 인구를 많이 늘리는 것이 중요하다.   자호 ‘놀자’의 30년 삶

 김  사실 ‘정재숙’이란 브랜드는 문화부 기자로서의 정체성이 더 크다. 아무래도 보는 눈이 많아서 이번 인터뷰가 조심스러웠던 측면도 있다. (웃음) 문화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정재숙 기자와 정재숙 전 청장에게는 하나의 일관적이고 통일적인 삶의 흐름이 감지된다. 옛 인터뷰에서 말씀하시길 “열심히 놀다보니 여기까지 왔다”고 하셨는데, 여기서 ‘놀다’란 어떤 의미였을까.

 정  공자, 맹자, 장자 등의 형식으로 나의 자호를 붙일 수 있다면 나의 자호는 문자 그대로 ‘놀자(子)’다. 그만큼 어릴 때부터 노는 걸 좋아했다. (웃음) 그런데 ‘놀다’라는 건 어떤 걸까. 이제 와 생각해보면 문화라고 이름 붙여진 것을 갖고 노는 시간에 늘 관심이 있었다. 5세 무렵 창덕궁 돌바닥에 누워서 눈물 콧물 흘리며 울고 있는 사진이 있는데, 그만큼 궁궐이 좋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머리털 나고부터 문화에 어떤 인연이 있었나 싶어진다.

고등학교 시절엔 공부보다도 극장에 가는 게 낙이었다. 거의 매일 남산에 새로 생긴 국립극장에 갔다. 1975년, 1976년 무렵이었는데 학생은 연극, 오페라, 발레, 교향악단 티켓을 20% 정도의 가격으로 아주 저렴하게 구매할 수 있었다. 기억하기로는 연극 한 편에 1000원이었던 것 같다. 그럼 그 여고생이 왜 극장을 그리 자주 갔나 싶어지는데, 또렷한 기억이지만 당시에도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런 걸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고, 또 그런 걸 하면 공부만 하는 것보다 더 가치 있는 삶을 살고 있다’고 말이다. 평생 술 좋아하시던 ‘한량’이신 아버지께 끝없는 선량함을 배웠고, 동대문에서 포목 장사하시던 어머니께서 제게 끈질긴 생활력을 가르치셨다면, 저는 그 사이에서 문화라는 나만의 꿈을 품고 있었던 것 같다.

 김  그런데 왜 기자였을까. 30년을 문화부 기자로만 살았는데 왜 처음 시작이 문화부였는지도 궁금하다. 서울경제, 한겨레신문, 중앙일보 재직 당시 전부 문화부 기자만 담당했다.

 정  대학 들어가 학보사 생활을 했다. 학생기자 하면서도 신문기자 하겠다는 생각은 없었고,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고대신문에서 3년간 문화부에만 근무했다. 학보사 출신은 취업이 다소 수월한 편인데 처음 들어간 언론사는 미술 전문 월간지 《미술세계》였다. 이후 대학원에서 미술사를 전공하려 했다. 그런데 대학원 들어가서 보니 미술사 하려면 돈이 많아야 했다. 집어치우고 서울경제 문화부에 입사했다.

그때부터 일간신문 기자 생활이 시작됐다. 지금도 그렇지만 저연차 기자가 한 부서에서 오래 일하는 건 쉽지 않다. 그때는 순환근무제도가 지금보다 더 엄격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른 부서 보내려는 분위기가 있으면 속된 말로 ‘튀었’다. (웃음) 서울경제에서 한겨레로 옮겼고, 이후 다시 ‘또’ 튀어서 중앙일보에 2002년 입사했다. 2018년에 문화재청장 시작하면서 나왔으니 1987년 이후 30년 넘게 문화부 기자로 일했다.

전시회 보고 나서 한잔하면서 놀고, 또 작가 만나 책 읽으면서 놀고. 그렇게 오랜 시간을 ‘문화’에 ‘쩔어’ 살았던 것 같다. 그것이 내게는 바로 ‘노는’ 일이었다.

 김  기자로 일하면서 제대로 된 첫 문화부 ‘입뽕 기사’는 무엇이었는지 기억이 나나. 또 기자 생활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하나의 인터뷰를 꼽아본다면 무엇이었을까.

 정  입뽕 기사를 생생하게 기억한다. 1988년 신문 한 면을 전부 털어 「예(藝)」라는 미술 연재기사를 썼다. 당시 컬러면이 생기고 여러 신문이 복간되거나 창간되면서 정말 언론계에 그야말로 난리가 났던 때였다. 시대에 맞춰 ‘고품격’ 신문에 걸맞게 연재를 해보라는 지시를 받으면서 연재를 시작했다. 「예」의 콘셉트는 이러했다. 국전(國展)의 대통령상을 받았던 작가의 국전 수상작, 그리고 그가 남긴 최근작을 놓고 두 작품을 비교하는 기사였다. 나란히 놓고 보면 흥미로운 부분이 참으로 여럿이었는데, 구상을 하던 사람이 추상을 하고 있거나 또 추상을 하던 사람이 설치미술을 하고 있는 등의 모습이 상당히 많았다.

가장 기억에 남는 인터뷰는 박노해 시인 출옥 후 첫 단독인터뷰였다. 1998년도로 기억하는데, 옥살이를 끝내고 나왔을 때 딱 한 매체와만 인터뷰하겠다고 했다. 그는 옥에서도 투사였고 『노동의 새벽』으로 그야말로 전설인 상황이었다. 직접 뵈니 성자에 가까운 느낌이 들었는데 노동에서 더 넓어져 생명으로 나아갔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니까 사상의 전환을 이루었구나 하는 생각까지 스칠 정도였다. 당시 만난 장소는 카페였고 사진도 딱 한 장만 허락한다고 했다. 당시 상황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그런 인터뷰는 제가 얻은 또 하나의 유산이다.

 김  가장 기억에 남는 현장은 어디였을까. 청장 시절에도 현장을 강조했고 기자들과도 현장에서 자주 만났다. 기자로서, 또 청장으로서 애착이 남은 현장은 어디일까.

 정  2004년 중앙일보 재직 당시 평양에 갔던 기억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고구려 고분 벽화 관련 취재였고 양각도호텔에 묵었다. 벽화 보려 들어가려는데 보존한다고 철벽에 시멘트를 발라뒀더라. 기자단은 밖에서 기다리고 북한 인부들이 그걸 안에서 깨부쉈다. 시간이 지나 안에서 공기가 밀려 나오는데 정말 그 공기는 잊지 못한다.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것만 같았다. 그날 제가 얼마나 흥분을 했느냐 하면, 들어가서 보니 벽화가 너무 어두운 거다. 왜 이렇게 어둡지 하는데 옆에 이춘근 MBC PD가 제게 “선글라스를 벗으셔야지” 하더라. 벽화 보러 들어가면서 마음이 너무 격앙된 나머지 선글라스를 착용한 상태로 들어갔으니 당연히 어두웠던 거다. (웃음)

선글라스를 벗으니 벽화가 눈에 들어왔다. 정확한 워딩은 아니지만 ‘마치 화공이 금방 붓을 떼고 나간 듯 색채가 살아 있다’는 내용이 담긴 첫 문장을 기사에 썼다. 그만큼 전율하는 순간이었다. 이후 문화재청장으로 일하면서 개성 만월대에도 갔는데 남북 문화교류에 대한 생각을 자주했다. 한일관계도 그렇고 남북관계도 그렇고 정권이나 국제정세 속에서 식견을 말할 만한 위치에 있지 않다. 다만 문이 닫히더라도 남북 간의 문화 교류는 끊이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정치와 권력의 밑바닥에는 휴머니즘과 보편성의 마음이 작동하고 있지 않나.

 김  왜 문화부였을까. 또 문화부 기자는 정재숙 선배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정  문화는 제게 삶이고 또 사랑이었다. 예술가, 저술가, 철학가 등 문화라는 영역 안에서 활동하는 모든 사람이 나의 스승이고 친구였다. 그 사람들이 남긴 결과물을 내가 기쁜 마음으로 해설하고, 그렇게 남긴 기사를 독자와 나누는 과정은 정말이지 행복했다. 문화부 기자로 일하다 국민들이 내주신 세금으로 좋은 자리에서 2년 4개월을 지내기까지 했으니 이런 막대한 부채를 어떻게 갚아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악착같이 부딪힌 술잔

 김  정재숙이라는 사람으로 다시 초점을 좁혀보자. 엄마로서 기자라는 직업을 이어가는 일은 쉽지 않았을 듯하다. 피로하기만 했던 시절이 지나고 조금은 여유를 느껴도 되는 시간이 이제 오지 않았나 싶은데, 기자 혹은 문화유산 분야에 종사하려는 여성 후배들에게 조언한다면.

 정  문재인정부에서 여성에게 많은 기회를 제공한 점도 작용했고, 내각이든 공적기관이든 여성과 남성 비율을 균등하게 가져가는 부분에 대해 강조한 데다 또 그런 부분이 기관 평가에 작용하는 분위기도 있었다. 그러다 보니 최근 몇 년간 여성의 기관장 진출이 활발해졌는데 이는 문화재청도 마찬가지였다. 궁 소장을 여성이 맡거나 문화재연구소장직이 여성에게 주어지기도 하는 등 가시적인 변화가 다수 있었다. 젠더 이슈에서 우리 사회는 한걸음씩 나아가고 있다.

하지만 제가 저 스스로를 돌아봤을 때 저의 여성성이 강하게 작동했는지는 다소 미지수다.

얼마 전 딸아이와 대화하다가 “이제 엄마도 전업주부가 됐다”고 하니 딸아이가 대뜸 이렇게 말했다. “엄마, 엄마는 평생을 ‘남성적’으로 살았잖아.” 남성적인 방식으로 남성적인 대처로 기자 일을 해왔다는 의미였다. 딸에게 엄마 정재숙은 여성보다는 남성적인 저널리스트로 기억됐던 거다. 이제 와 돌이켜보면 ‘그들’과 함께 경쟁하는 과정에서 저는 그들과 비슷한 태도를 취해야만 했다. 물론 그것은 이렇게 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위기감 때문일 수도 있고, 더구나 제가 고려대 출신이다 보니 ‘고대 여자’는 속된 말로 여자로 쳐주지 않았던 (웃음) 기자 사회의 전근대적 분위기도 조금은 작동했다. 제가 술을 아주 좋아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술을 좋아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웃음) 제가 기자생활하면서 술을 악착같이 먹은 건 사실 제 입장에선 ‘술이라도 잘 해야 대접해주지 않겠나’ 하는 마음도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제가 여성으로서 걸어온 길에 이런 과한 의미를 부여하기는 쉽지 않다. 다만 이런 이야기는 남기고 싶다.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 여성에게 문호가 좁은 건 분명한 사실이지만 우리 여성들이 조금은 과감해질 필요가 있다.

막상 사회에 나와 보니 뛰어놀 수 있는 곳이 너무나 많았고, 경쟁해야 할 남성들과도 충분히 해볼 수 있는 여지가 적지 않았다. 새로 사회에 나오는 여성들에게 그렇게 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던 세상을 대물림하고 싶지 않다.

 김  마지막 질문이다. 30년간 기자로 일했고 그 끝에서 ‘어공(어쩌다 공무원 생활을 하게 된 사람을 뜻하는 은어, 반대말은 ‘늘공’으로 늘 공무원이란 뜻)’까지 했다. 다음 여정이 궁금하다.

 정  자호 ‘놀자’에 대해 앞서 이야기했는데, 제겐 자호가 더 있다. 자주 쓰는 자호는 ‘남덕’으로 ‘남의 덕에 산다’는 뜻이고, 또 하나의 자호 ‘빈데’는 ‘빈 데가 너무 많다’는 뜻이다. (웃음)

남덕과 빈데는 정말 저의 절실한 결론이다. 빈 데가 너무 많아서 남의 덕으로 여기까지 왔다. 어공까지 했으니 이제 다음에는 문화와 관련해서 어떤 일을 해야 할까. 요즘 나의 화두다.

 

 

김유태
매일경제 문화부 기자, 시인, 1984년생
시집 『그 일 말고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