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④ 아싸라비용

  • 기획특집
  • 2024년 여름호 (통권 92호)
④ 아싸라비용

 

아버지가 집 앞 술집으로 나를 불렀다. 전에 없던 일이라 걱정이 앞섰다. 아버지와 술을 마시는 게 처음은 아니지만, 다른 사람이 있거나 식사 중의 반주인 경우가 많아서 항상 가벼운 분위기였다. 굳이 따로 술집으로 부른다는 건 뭔가 중요하게 할 이야기가 있다는 뜻이었다.

술을 마실 만한 상황도 아니었다. 소설 마감이 일주일 남아 있었다. 그것도 편집자에게 따로 메일을 보내 얻어낸 기간이었다. 바쁘다는 핑계를 대고 싶었지만, 장소가 집 앞이라 어쩔 수 없었다.

테이블에는 백골뱅이탕과 소주 한 병이 놓여 있었다. 국물이 끓지 않는 걸 보니 아버지도 온 지 얼마 안 된 모양이었다. 아버지는 내 잔에 소주를 따랐다. 나도 아버지의 잔을 채웠다. 내 주량은 소주 두 병쯤 된다. 한 잔 정도는 마셔도 큰 지장은 없었다.

-바쁠 테니. 간단하게 본론만 말하마. 오늘부터 네가 가주다. 경주 이씨 송암공파 37대손 장손이자 장남으로 그 권리와 의무를 다해라.

아버지가 말했다.

갑자기 가문의 주인이라니 무슨 뜬금없는 소리인가 싶었다. 내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아버지가 부연설명을 했다. 한마디로 말해 앞으로 나보고 제사를 지내라는 말이었다. 증조할아버지, 증조할머니, 할아버지, 할머니, 추석, 설날까지 1년에 여섯 번.

-의무는 확실히 알겠는데, 권리는 뭘까요?

내가 물었다.

-대신 지금 살고 있는 집은 너한테 주마.

아버지가 대답했다.

30평밖에 안 되는 빌라 한 층이었지만, 나쁘지 않은 조건이었다. 문제가 있다면 당장 모레가 할머니 제사라는 거였다. 내 마감은 5일밖에 안 남았을 테고.

-내년부터 하면 안 될까요?

내가 물었다. 아버지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당장 내일부터 어머니와 함께 시골로 내려가 텃밭이나 일구고, 낚시나 하면서 살겠다고 했다.

짧은 승계식이 끝나고 나는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았다. 일단은 마감부터 해야 했다. 《대산문화》 여름호에 모파상의 「목걸이」를 이어쓰기 하는 기획특집이었는데, 한 줄도 못 쓰고 있었다. 넓게 보면 재해석의 영역일 텐데, 「목걸이」를 수십 번 다시 읽어봐도 뭘 해야 할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창조적 재맥락화. 과거와 현재, 여기와 저기를 연결하고 파괴한다. 뭘 해야 하는지 알아도 내가 하고 싶은 것과 교차점을 찾는 게 힘들다. 모파상도 이런 말을 남겨 놨다.

-이미 다 행해져 할 것이 무엇이 더 남아 있으며, 이미 다 말해져 할 말이 무엇이 더 남아 있는가?

1893년에 죽은 작가도 2024년의 나와 별다를 것 없는 고민을 했다.

마감을 앞둔 소설가의 시간은 빠르게 흐른다.

 

나는 마트에서 장을 보고 할머니 제사 준비를 했다. 아버지가 하는 걸 늘 옆에서 지켜봤고, 그동안도 어머니를 도와 음식을 만들어서 큰 어려움은 없었다. 홍동백서, 동조서율, 조율이시, 건과습우…… 이런저런 상차림 규칙들에 더해 우리 집안은 방금 자른 솔잎을 향 옆에 두는 전통이 있다.

일단 겉보기에는 그럴듯한 제사상을 차렸다. 아버지가 쓴 지방을 그대로 베껴 지방 틀에 끼우고, 초와 향에 불을 붙이고, 술을 올리고 절을 했다. 그리고 잠시 시간을 둬야 한다. 일종의 식사시간이다. 밖에 나가서 담배나 한 대 피우고 들어올 생각이었는데, 지방 틀의 문 사이로 누군가 나왔다.

할머니는 내가 다섯 살 때 돌아가셔서 정확히 얼굴이 기억나지는 않는다. 어떤 느낌 같은 것들만 남아 있다. 빨간 스웨터와 마르고 거친 흰 손가락 같은. 하지만, 나는 지방 틀 사이로 나온 게 할머니라는 걸 바로 알아봤다. 묘하게 고모들과 비슷한 얼굴에, 걸음걸이가 아버지와 똑같았다.

-오랜만이구나.

할머니가 말했다. 나는 꾸벅 인사를 했다. 할머니는 30cm 정도 되는 크기였다. 시장하셨는지 나보다는 상 위의 음식을 일별하더니 바로 식사를 시작했다. 귀신이 밥을 먹는 걸 처음 봐서 신기했지만, 계속 쳐다보면 불편해할 것 같아서 싱크대를 정리했다.

15분쯤 후에 식사를 마친 할머니가 지방 틀 앞에 앉아 나를 불렀다.

-음식은 입에 맞으셨나요?

내가 물었다.

-그럭저럭. 다음부터 국은 추어탕으로 바꿔라.

할머니가 말했다. 나는 그러겠다고 했다.

-저 혹시, 로또 번호는 모르시죠?

내가 물었다.

-8번, 9번, 더는 알려줄 수가 없다.

할머니가 말했다.

-두 개가 어디예요. 감사합니다.

내가 말했다.

-소설가가 되었다고 들었다. 네 할아버지도 글을 참 잘 썼는데….

한참 동안 할머니의 옛날이야기를 들었다. 저승 생활에 대해서도.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생활 같았다. 내년에는 친구들도 데려와 같이 먹겠다는 말을 듣다가,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할머니 혹시 거기 모파상이라고 있나요?

내가 물었다.

-모파상? 류노스케상은 안다만.

할머니가 말했다.

-아뇨. 프랑스 사람이에요.

나는 모파상에 대해 간단히 설명했다. 할머니는 누군지 알 것 같다고 했다.

-잠깐 데려오실 수 있을까요? 제가 지금 마감 때문에. 조금 도움이 필요해서요.

내가 말했다. 할머니는 가서 물어보겠다며 지방 틀 문 사이로 들어갔다.

잠시 후에 할머니는 어떤 여자와 같이 나왔다. 큰 콧수염이 있는 남자라고 분명 말했는데, 왜 여자를 데려온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너한테 꼭 할 말이 있다는구나.

할머니가 말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마틸드 루와젤이라고 합니다.

여자가 말했다.

목걸이를 빌리고 잃어버렸던 그 여자가 내 눈앞에 있었다.

-소설가시라고요? 「목걸이」이어쓰기를 하고 있고?

마틸드가 물었다.

-네. 뭐.

내가 대답했다.

-그 작자의 농간에 사람들이 놀아나는 걸 더는 참을 수가 없어서요. 제 이야기 좀 꼭 좀 써주세요. 마틸드는 그렇게 긴 하소연을 시작했다.

그녀가 빌린 목걸이는 진짜였다. 친구한테 몇 번이나 확인했고, 친구는 보증서까지 보여줬다. 남의 시선을 신경 쓰고 허영심이 가득한 여자라면 목걸이가 진품인지 확인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돈 많은 사람들이 잔뜩 오는 파티에 가짜 목걸이를 차고 가서 궁색한 꼴을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가짜 목걸이를 차고 가서 누가 알아보기라도 한다면 그것보다 창피한 일이 있을까요?

마틸드는 내 대답이나 반응 같은 것은 상관없다는 듯 이야기를 계속했다.

목걸이를 잃어버린 것을 알았을 때, 그녀는 바로 친구인 포레스터 부인에게 그 사실을 알리려고 했다. 실제로 편지도 썼다. 목걸이를 잃어버렸고, 지금 가진 돈이 1만 8천 프랑밖에 없으니 그걸 우선 변제하고 남은 금액은 매달 조금씩 갚겠다는 내용이었다. 포레스터 부인은 새 목걸이가 아니고 중고니까 1만 8천 프랑만 받고 넘어갈 수도 있었다. 어쩌면 아예 돈을 받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런데 모파상이 그것을 막았다. 몇 번을 다시 써도 편지 내용이 계속 이렇게 바뀌었다.

‘목걸이 고리가 망가져서 수리하러 보냈으니 기다려줘.’

계속해서 바뀌는 문장을 보면서 그녀는 자신이 꼼짝없이 덫에 걸린 것을 깨달았다. 여기저기 조금씩 돈을 빌리고, 목숨 같은 증서를 저장 잡히고, 고리대금업자와 사채업자와 거래를 하는 것보다 부자인 포레스터 부인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조금씩 비용을 치르는 게 백 배나 더 나은 선택인데도, 그 선택만큼은 절대 할 수 없도록 판이 짜여 있었다.

그녀는 보석상에서 새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샀다. 정말로 하기 싫은 일이었는데도 온몸이 실에 묶인 꼭두각시 인형처럼,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타의에 의해 자기 자신을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것만큼 끔찍한 일은 없었다.

빚을 갚아나가는 십 년 동안 그녀는 계속 모파상을 저주했다. 왜 자신에게 이런 가혹한 시련을 내리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살면서 한 번도 남에게 피해를 준 적은 없었다. 그저 사람들의 마음에 들고, 부러움의 대상이 되고 싶고, 화제에 오르길 바란 것뿐이었다. 그건 누구나 조금씩 갖고 있는 마음이었다.

-정작 본인은 성과 쾌락을 탐닉하다 매독에 걸려 죽었으면서, 저를 비난할 자격이 있을까요?

내가 보기에 마틸드는 조금 다혈질인 것 같았다. 자기가 이야기하면서 점점 화를 키워나가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주변에 깨질 만한 물건들을 멀리 치웠다. 할머니도 저런 저런 하면서 맞장구를 치면서도 마틸드의 목소리가 커질 때마다 조금씩 거리를 두면서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마틸드도 포레스터 부인도 그 목걸이가 진짜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사실 모르고 싶어도 모를 수가 없었다. 「목걸이」가 발표된 것은 1884년이다. 그 당시 다이아몬드 유사석을 만드는 기술은 조악했다. 천연 대용물이 없는 최초의 보석용 돌인 스트론륨 티타네이트는 1953년에 처음 생산되었고, 현재 흔히 쓰이는 큐빅은 1978년에 처음 생산됐다. 1884년에 생산된 가짜 다이아몬드 목걸이는 전문가는커녕 어린아이가 봐도 진짜인지 가짜인지 구별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진실을 알면서도 정해진 대사를 해야 하는 마틸드와 포레스터 부인은 일그러진 표정이었다.

-가엾은 마틸드.

포레스터 부인은 영혼의 전심전력을 짜내 한 마디를 내뱉었다. 그 문장은 모파상이 원고지에 적지 않은 말이었다.

-그 소설에는 그 한 문장만 진실이에요. 그때 너무 고마웠어요. 나를 위해 있는 힘껏 절대자에게 저항해준 친구가. 우리는 지금도 둘도 없는 친구로 지낸답니다.

어느새 마틸드는 화를 가라앉히고 무심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혹시 그 뒤는 어떻게 되었나요? 친구가 진짜 목걸이를 돌려줬으면, 그걸 팔아서 어느 정도는 물질적 보상이…, 그러니까 그 10년의 세월이 헛된 게 아니라 부를 축적한 거로 생각하면.

나는 어렴풋이 내가 생각하고 있던 이어쓰기의 방향을 마틸드에게 이야기했다.

-소설가라고 하지 않았나요? 자료조사를 전혀 안 한 모양이네요. 그즈음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대량의 다이아몬드 광산이 발견되면서 다이아몬드 가격이 폭락했어요. 다이아몬드가 본격적으로 대중화된 시기죠. 실망이네요.

마틸드가 말했다. 나는 아무 대꾸도 할 수 없었다. 다이아몬드 막대기로 정강이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모파상은 나를 괴롭히고, 진짜와 가짜도 구별 못 하는 바보로 만든 나쁜 인간이지만, 위대한 작가이긴 했나 봐요. 사람들이 아직도 나를 기억하니까요. 나는 진실을 이야기해줬으니 나머지는 당신 몫이에요. 그 사람을 넘어서 주세요. 부탁할게요.

마틸드는 그렇게 말하고 지방 틀 사이의 문으로 다시 들어갔다.

-나도 너무 오래 있어서 가봐야겠다. 8번, 9번. 이번 주에 꼭 사라.

할머니도 마지막 인사를 남기고 떠났다.

나는 제사상 위에서 식혜를 찾아 한 모금 마셨다. 달고, 맛있었다. 정말로 그랬다. 대강 상을 치우고 컴퓨터 앞에 앉았다. 모파상의「목걸이」를 이어쓰기 위해서.

나는 뭐가 됐든 가제라도 제목을 정해야 소설을 쓸 수 있다. 얼마 전 여자친구와 통화를 하는데, 내가 ‘아싸라비용’이라는 말을 했더니, 재미있다며 웃었다. 일단은 이걸 제목으로, 오늘 밤에는 제발 한 문장이라도 쓸 수 있기를.

이갑수
소설가, 1983년생
장편소설 『킬러스타그램』, 소설집 『편협의 완성』 『외계문학 걸작선』 등